1980년대 한국 경제 - 1980nyeondae hangug gyeongje

영화의 경우 특수효과의 사용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이기도 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성공 이후 간간히 만들어지던 블록버스터가 보편화 되었다. 다만 CG 그래픽의 십분 활용은 90년대부터 확장되기 시작한다.

  • 잃어버린 10년을 겪기 전인 1980년대 일본은 유일무이한 아시아 강대국으로 여겨졌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규모 세계 2위였지만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겨졌었다. 블레이드 러너, 로보캅 3, 떠오르는 태양(라이징 썬), 다이 하드 등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실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일본의 경제성장을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두려워했다. 게다가 당장 눈앞에 놓인 비현실적인 환율이 심각한 문제였고 일본의 급성장은 이런 환율 탓이 크다는 게 당시 서구권의 인식이었다. 결국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5개국 경제 수장들이 모여 플라자 합의로 환율을 현실화하기로 합의한다.[6]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는 파격적으로 평가절상되고 이런 엔화의 절상과 함께 일본 경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내고 거품 붕괴와 함께 일본의 성장은 서서히 끝이 나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 다양한 장르가 성행했던 시기였다. 2010년대부터 저예산 영화와 블록버스터 영화가 분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에서 당시 제작비 예산이 블록버스터[7]와 저예산 영화들을 같이 만들어서 다양한 장르가 나올 수 있었다. SF 영화부터 청춘 영화, 슬래셔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들이 고르게 흥행했다. 게다가 시나리오(각본)가 당시 기준으로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성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흥행의 원동력되기도 했다. 복고풍이 불고 있는 201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리메이크로 제작할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 흥행작들은 대부분 블록버스터에 한정되어있음을 감안하면, 이 시기까지는 아직 저예산 영화들이 힘을 쓰던 시기라는 말이 된다.

2.3. 게임[편집]

아타리 쇼크라는 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인해 비디오 게임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후 닌텐도의 마리오 시리즈와 패미컴이 대박을 치면서 일본 제작사들에 의해 시장이 재개편, 2001년에 마이크로 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콘솔 시장은 일본 제작사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횡, 종스크롤 액션, 슈팅게임들이 이때부터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80년대 중, 후반엔 일본식 RPG의 대표라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2.4. 만화, 애니메이션[편집]

한국 만화에 대한 검열은 여전했지만 보물섬, 아이큐 점프 같은 만화잡지들이 등장하면서 만화 시장이 팽창했던 시기. 특히 1983년부터 보물섬에서 연재된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는 전 세대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 캐릭터로 자리잡았고,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실사영화와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후반 로보트 태권 V를 필두로 활발하게 이뤄지던 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이 1980년대 들어 소재고갈, 표절, 지나친 반공의식 주입 등을 이유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1986년 우뢰매 시리즈의 히트로 순수 애니메이션 대신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한국형 특촬물이 어린이 극장가를 장악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7년부터 TV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되면서 떠돌이 까치(KBS), 달려라 호돌이(MBC) 등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제작되었고 1988년 최초의 TV 시리즈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가 방영되었다. 이때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 TV 애니메이션이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에서는 은하철도 999와 기동전사 건담이 일으킨 아니메 붐이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과거 TV판의 확장판 수준이었던 극장판이 오리지널 스토리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성인 소비자를 위한 OVA가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는 해외 합작의 감소와 어린이 시청 인구 감소 등 버블경제의 역풍을 맞으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AKIRA 같은 대작도 1988년 첫 상영 당시에는 흥행이 저조했다. 그 와중에 미야자키 하야오[8]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스튜디오 지브리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같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히트시켰다.

1970년대 일본 만화계에 나가이 고가 있었다면 1980년대에는 토리야마 아키라가 있었다. 토리야마는 1979년부터 소년 점프에 개그 만화 닥터 슬럼프를 연재한데 이어 1984년에는 배틀물 소년 만화의 대명사 격인 드래곤볼의 연재를 시작했다.[9] 또한 캣츠 아이, 시티헌터를 히트시킨 호조 츠카사, 터치의 아다치 미츠루도 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가였다. 여성 만화가 중에서는 시끌별 녀석들, 메종일각 등으로 러브 코미디 장르를 유행시킨 타카하시 루미코가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대 일본 TV 애니메이션은 후지TV가 닥터 슬럼프, 시끌별 녀석들 같은 개그물과 북두의 권, 드래곤볼 등 소년 액션물을, 테레비 아사히가 도라에몽을 필두로 한 후지코 후지오 애니메이션과 건담 시리즈로 대표되는 리얼로봇물을 주로 편성했다.

2.5. 대량 학살[편집]

전 세계 독재자들이 반정부 성향을 보이는 자국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 대한민국: 5.18 민주화운동 - 전두환 학살 주도, 현장 사망 1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 65명.[10] 00 - 01 - 02 - 03 - 04

  • 중국: 천안문 6.4 항쟁 - 덩샤오핑(당시 최고지도자), 리펑(당시 총리) 학살 주도, 7,000명(나토, 대만, 대한민국 추정)~10,000명(바르샤바 조약기구, 일본 추정) 사망 추정.

  • 짐바브웨: 구쿠라훈디 학살 - 로버트 무가베(당시 최고지도자, 짐바브웨 총리) 주도, 1982년~1983년간 마타벨레랜드 지역에서 2만여 명 학살.

  • 시리아: 1982년 2월 2일 하마 학살 - 하페즈 알아사드(당시 시리아 대통령) 지시, 리파트 알아사드(하페즈 알아사드의 동생) 주도, 38,000명(리파트 알아사드 본인 주장)~40,000명(시리아 인권위원회 추정) 사망 / 타드무르 대학살 - 1982년 6월 하페즈 알아사드의 동생인 리파트 알아사드가 군대를 이끌고 정치범들이 수용된 타드무르 감옥에 진입, 재소자들 무차별 학살. 수천 명 사망 추정.

  • 이라크: 알 안팔 작전 - 사담 후세인(당시 최고지도자, 이라크 대통령) 주도, 1986~1988년간 182,000여 명 학살, 1988년 3월 16일에는 할랍자에 독가스를 살포해 5,000여 명 즉사.

3. 한국의 경우[편집]

3.1. 정치[편집]

역사다시보기 - 6월민주항쟁(The June Struggle for Democracy)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암살당해 18년 철권통치가 끝났으나, 뒤이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공백을 메웠고, 12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및 유신정우회는 박정희 사후 구심점이 뚜렷치 않아 혼란에 빠졌고, 민주화 세력들도 갈팡질팡해서 정국은 안개처럼 보이지 않은 채로 예측불허 상태로 흘렀다. 이 상황 속에서 1980년 2월 29일에 정부가 윤보선과 김대중 등 687명을 복권하여 민주화에 호응하는 듯했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 통칭 '3김' - 이 등장하여 앞으로의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 사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잡기 시작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암약하며 언론포섭 계획인 'K-공작계획' 같은 집권 시나리오를 은밀히 만들어 권력 장악을 할 채비를 했다.

1980년 봄 들어서 학생과 민주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 열기가 다시 거세졌는데, 이들은 유신헌법 폐지, 전두환-신현확 퇴진, 비상계엄 해제, 민주정부 수립 등을 외쳤다. 학생운동 조직은 종전의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부활시켜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했고, 4월 9일 성균관대 학생들의 군장검열 거부로 '병영집체훈련 반대투쟁'도 점차 퍼졌다. 5월 13일부터 연세대 등 6개 대학생 3천여명이 교문을 나서 광화문을 거쳐 서울역, 남대문, 종로 등에서 격렬히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군 투입 움직임을 읽은 지도부는 서울역에서 '회군'을 결정했다.

같은 시기 사회 저명인사 100여명이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고, 학생운동에 놀란 각 정당들도 계엄령 해제 건의를 준비했으나 정치권과 재야세력들은 앞으로 들어설 정부에 관심을 기울여 주도권 다툼을 하다 신군부의 암약에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운동계에선 4월 21일 동원탄좌(현 넥스트사이언스)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의 파업(사북 사건)이 있었고, 동국제강, 일신제강, 남화전자, 롯데제과 등지에도 민주노조 쟁취운동 등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신군부는 5월 17일에 국무회의에서 각료들로 하여금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찬성토록 했고, 다음날 0시를 기해 본격 선포하여 김종필과 이후락 등에게 부정축재자 혐의를 씌워 연행했고,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도 소요 조종 혐의로 강제 연행하며 학생운동 지도자 등 민주인사에 대한 수배를 개시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언론을 검열하고, 시위 등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시키며 대학까지 휴교시켰다. 5월 18일 전남대 교문 앞 시위를 계기로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으나 신군부는 광주시민 전체를 '폭도'로 규정하여 무자비하게 짓밟음으로서 9일여만에 비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투쟁은 훗날 살아남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됐다.

신군부는 동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실권을 잡고 박정희처럼 '반공과 안보'를 국시로 유지했으며, 공화당과 유정회, 신민당 출신 등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했으며, '삼청계획'을 통해 먼저 고급공무원 등 공직자들을 대거 숙청했고, 언론인 933명을 해직했다. 또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전 국민을 혹독하게 다뤘다. 같은 시기 김대중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의 문턱까지 오기도 했다.

8월에 전두환이 군복을 벗고 유신헌법에 따라 정식으로 대통령에 뽑혔고, 10월에는 대통령 간선제와 7년 임기제, 국회의원 1/3 전국구 배정, 국회 해산권 부여 등을 골자로 한 8차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만들어져 반공법을 흡수한 '개정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노동쟁의 제3자 개입금지를 골자로 한 '개정 노동쟁의조정법', 기업별 노조제를 골자로 한 '개정 노동조합법', '사회보호법', '언론기본법' 등 체제 안정을 뒷받침할 각종 법률들을 만들었다. 1981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김대중의 감형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전두환 정권을 인정받았고, 2월 대선에선 선거인단제에 따라 재선임되어 '제5공화국'이 본격 출범됐다. 3월 25일엔 11대 총선이 열려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 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으로 대표되는 '1대대-2중대-3소대'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광주항쟁으로 지핀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학생운동권은 무림-학림 논쟁 등을 통해 전열을 정비했고,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계기로 '반미자주화 투쟁'의 봉화가 점차 피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에 5공 정권은 정국의 안정을 이유로 제적 학생들을 복교시키고 경찰을 대학에서 철수시키는 등의 이른바 '유화 정책'을 실시하자 1984년부터 점차 여러 대학에 총학생회가 결성되어 다시금 가두투쟁이 시작됐고, 노동운동권에선 1980년대 초반에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남화전자, 청계피복 등 기존 민주노조들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됐음에도 1984년을 기점으로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재결성되고 서울 구로공단과 가리봉공단 등을 중심으로 대우어패럴, 로옴코리아, 삼경복장,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대한마이크로 등지에서 새 민주노조들이 결성돼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불씨를 키웠으며, 대학생들도 공장에 위장취업까지 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노동운동을 했다. 또 '농활'과 '공활'도 급증했다. 이렇듯 민주화운동은 학생과 지식인을 넘어 농민과 노동자 등 기층민중까지 파급됐으며, 나아가 광주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발전했다. 특히 민주-민중운동은 5공 독재반대 투쟁과 더불어 민중생존권 쟁취, 반미자주화와 통일 등의 투쟁을 해왔다.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되어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손을 잡았고,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등 민추협 중심으로 만든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켜 '선명야당'으로서 5공 정권과 싸우기 시작했고, 1986년에는 민주-민중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대통령 직선제 쟁취 투쟁을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호헌론으로 맞서며 재야 민주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했으나,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같은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낸 사건들이 잇따라 터져 대중들의 반감이 커졌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란 전민항쟁으로 이어져 또 궁지에 몰린 신군부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해 직선제를 수용하는 등 정국 전환을 시도했다. 12월에 열린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양김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당선됐고, 1988년에 새 헌법이 발효되면서 제6공화국이 출범됐다.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내각과 군부 등 요직에 하나회 혹은 전 정권 시기 인사들이 그대로 있기에 '5.5공화국'이란 소리를 들었으나, 대신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보장됐고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기에 정치권력도 어느 정도 정당성을 유지했다. 또 전임 정권과 달리 입법 및 사법부의 권한이 강해지고 헌법재판소도 세워졌기에 3권 분립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일정해졌다.

그해 4월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과반수 장악에 실패해 여소야대가 되어 정권은 야당과 민주세력들의 개혁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 측은 청문회를 열어 일해재단 같은 5공 때 비리들을 파헤치며 '5공 청산'을 부르짖었고, 전두환의 형 전경환 등 친인척들이 구속되고 전두환 부부도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 바람은 보수 세력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으니, 1988년 정권 출범 초기부터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월간 <현대공론> 8월호를 통해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며 민주화에 따른 좌익 세력들의 득세에 대해 우익 인사들의 각성을 호소했고, 오홍근 테러사건 같이 정보기관이나 극우 세력에 의한 백색테러들이 주를 이루기도 했다. 1989년에는 노태우 정권이 중간평가까지 거부하며 '공안정국'을 선포한 뒤 공권력을 총동원해 재야세력에 용공혐의를 씌워 탄압하는가 하면, 온갖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여론을 호도했다. 같은 시기 탈냉전 바람이 일자 정권은 1988년 헝가리 한국대표부 설치를 시초로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동구권 등 공산권과의 관계를 개선코자 했지만, 다른 한쪽에선 동구권 관계개선을 명분으로 북한을 고립시키겠다는 냉전적 사고에서 못 벗어났다는 견해도 있었다.

남북관계에선 통일 관련 제안이 빈번히 제시됐던 때였다. 최규하 정권 때인 1980년 1월 12일과 24일에 남북한 양측이 처음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호칭을 처음 쓴 후 남북총리회담 예비접촉까지 하면서 전임 대통령 때보다 좀 나아질 듯했으나, 5.17 내란 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 파탄났다. 그해 10월에 먼저 북한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먼저 제시하자 전두환 정권도 1982년에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같이 내세웠고, 1984년 수해 때 북한의 구호물자를 받아들인 후 이듬해 남북 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상호 교환 방문이 이뤄져 남북관계에도 빛이 보였고, 남북정상회담도 비밀리에 계획됐으나 여건상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한 양측은 상대방을 적대시하면서도 권력 유지를 위해 제안을 하는 핑퐁게임을 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나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금강산댐 건설 소동 같은 게 터졌다. 다른 한편 전두환 정권은 통일운동을 탄압하여 1986년에는 유성환 신민당 의원이 국회에서 국시와 관련해 "반공보다 통일이 상위개념"이라 했다가 안기부에 구속된 것도 당시 상황을 증명한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 후 1988년에는 김중기 서울대 총학생회 후보의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와 국토순례대행진 제안을 계기로 통일운동 열기가 28년 만에 다시 살아났고, 5월 서울대생 조성만의 투신을 계기로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학생들의 가슴 속에 와닿기 시작했다. 전대협은 6월 10일과 8월 15일 두 차례 남북학생회담을 시도했다가 경찰에 의해 무산됐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통일운동의 역량이 더더욱 키워졌다. 다른 한편 국보법 철폐운동과 더불어 '북한 바로알기 운동'도 같이 퍼졌으며, 1989년에 터졌던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 황석영 등 재야인사들의 무단방북 사건들도 이 흐름에서 일어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창구단일화를 내세워 재야세력의 통일운동을 억누르는 한편 '7.7 선언'을 발표했고, 1989년엔 현 통일정책의 기반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마련했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한국 진보세력의 사상과 이념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진보정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전쟁의 기원 등의 서적으로 대표되는 친일파 청산론, 반공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북한에 대한 재평가와 북한과의 화해 및 통일의 추구,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미국에 대한 재평가는 이후 이때 민주화 운동을 벌인 86세대들이 정권을 잡게 된 2000년대에 과거사 청산 활동, 북한과의 화해, 협력 및 외교 다각화 노선 등으로 현실정치에서 시도되게 된다.

3.2. 경제[편집]

1980년 경제는 2차 오일쇼크 때문에 마이너스에서 시작했다가 1981년부터 다시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채는 갈수록 늘어 1985년 기준 총외채 468억 / 순외채 355억 달러로 올라가 '외채망국론'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다행히 1986년 3저 호황으로 인해 숨통이 트였으나, 미국의 수입개방이 거세져 농축산물 개방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자 농민들이 생계에 큰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84년 함평/무안 농민투쟁, 1985년 소몰이 투쟁 등이 벌어졌고, 1985년에는 '함평농민회'라는 자주 농민운동조직을 결성했다. 이는 1987년 전국농민협회, 1988년 전국농민운동연합으로 각각 발전되었다. 공산품 역시 정부가 점진적으로 수입개방을 감행해 1986년 수입담배가 허용됐고, 1987년 물질특허, 1988년 영화직배 등이 각각 개방되었다. 1989년에는 GATT BOP원용조항이 폐지되고 GATT 11조(수출입 수량제한 철폐) 이행국이 되어 농산물 88.5%, 공산품 99.9%로 각각 증가했다. 금융시장 역시 1987년 외국보험사 지사 개설을 허용했고, 1988년에 현지법인 설립까지 허용했다. 또 기업들도 기술개발에 주력하기보다 비업무용 부동산 매입에 주력했다.

1981년을 계기로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중산층의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3저 호황이라고 해서 경제 성장과 수출 증가를 거치면서 전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중산층의 비중이 두터워졌다.[11]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자가용 자동차를 보유한 가정이 크게 늘게 되어 '마이카' (My Car)가 유행어가 되었다(마찬가지로 ‘오너드라이버’라는 말도 유행했다) 1가구 1자동차 시대는 90년대의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보급률이 크게 늘어났고 주차난도 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 되었던것도 사실이었다. 1985년의 한국의 GNP는 2,310달러로 낮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3.3. 사회[편집]

1980년대 대학가

1980년대 초 고속버스 안내양 멘트


- 유튜브 'KBS 옛날티비' 채널 《그땐 그랬지》: 이십세기 708090 관찰기도 참고.

  • 대학 졸업자들은 대기업에 취업이 잘 되고[12] 공무원의 경우에는 당시에는 그리 돈을 못 버는 직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13] 시험경쟁률이 낮아서 하급 공무원이 되기 쉬웠다. 다만 그때도 행정고시의 경우에는 엘리트가 되기 수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은 건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물론 당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도 근로환경이 열악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참고로 공무원 시험은 88년까지는 쉬웠으나 89년부터 취업율이 둔화되고 한국 경제가 예전만큼 시원찮치 못하게 되어 조금씩 어려워졌다. 91년 이후 만만치 않은 시험으로 어려워졌는데, 참고로 80년대 후반에 대학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안가고 7급이라도 시험 쳐서 들어갔다면 들어갔을 텐데 5~6년 만에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대기업도 대졸자라면 80년대에는 C-성적도 골라서 갈 수 있던 것을 91년 이후에는 성적이 B-이하라면 대기업 들어가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석유 가격도 80년대 중반부터 좀 안정화 되어서 마이카를 일단 사기만 하면 부담 없이 끌고 다니던 시기였다.

  • 대학교 교육은 극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오늘날에는 최상위권이 아닌 이상 대학교를 나와도 우수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당시에 대학은 달랐다. 대학 문이 굉장히 좁아서 당시 대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수재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골라서 들어갔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 분위기는 70년대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4/5의 청년들은 주 6일 고강도 노동으로 저임금으로 굴려졌다. 경제 성장이 중요하던 때라 노동자 운동을 조직한다면 기업과 경제에 장애가 된다면서 금기시 되었다. 이 탓에 노동자의 권리라는 개념은 없었다. 열악한 환경 탓에 본인에게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했다. 해고가 쉬워서 고용주의 권력이 강했다. 그 때문에 고용주가 무엇을 지시하던 노동자는 따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 근무 환경이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 개발도상국 시대였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두자릿수를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만큼 이자율도 높았다. 대출 이자 또한 높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반인이 대출받기 까다로웠다.
    지금의 사채업 수준으로 대출 이자가 높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국민들은 자가보다는 임대나 월세, 조금 사정이 좋으면 전세로 집을 구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세들어 사는 사람의 권리 같은 건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가 잦았다. 재개발한다고 통보 받으면 그대로 집을 내주어야 했다.

  • 의료 보험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사보험 역시 전무했다. 혹여 일부 양심 없는 병원에서 사기를 치거나 터무니없는 진단을 내려서 비용을 뻥튀기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시대였다. 일반인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 같은 것은 부재했기 때문이다. 아프기라도 하면 비싼 병원비를 그대로 내야해서 상류층 이하의 사람들, 특히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집이 휘청거리는 위태로운 가정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상황은 80년대가 지속되면서 개선되었다.

  •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부와 차별화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올림픽 개최에 따라서 시민을 학살한 독재정권이었다는 점을 희석시켜야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면이 있어서, 통금이 해제되고, 교복이 자율화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개인 과외가 금지됨에 따라 사교육 없이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세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몰래 할 사람은 다 하고 과외 가격만 올랐다.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란 명분으로 대학 정원도 급속하게 불어났는데, 이것이 결국엔 전두환의 의도와 달리 학생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졸업 못한 사람은 자퇴율 때문에 많지 않았다.

  • 대령으로 예편하고 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된 오명의 전화 전전자교환기 도입 추진에 따라 1987년 DDD가 전국에 깔리면서 재래식 전화의 현대화가 완료되었고, 이는 1990년대 PC통신과 삐삐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가는 기틀을 닦았다.

  • 3S정책의 일환으로 <애마부인>을 위시한 에로영화들이 대거 제작되었고, 1988년 미국의 영화시장 개방 압력으로 직배가 허용되자 토종 영화인들이 반발해 시위까지 벌였다.

스포츠로 지배하라! 5공 3S 정책(프로야구)


K리그와 KBO 리그, 민속씨름이 시작되는 등 프로 스포츠가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야구에 있어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1980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한국에서 하기로 결정된 해이기도 하며, 1982년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기로 결정되었는데 이때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지위를 알림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자부심이 커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 유소년층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아지는 등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1980년대 중반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제대로 약빨(...)을 받아서 신생아수가 1987년에 62만으로까지 떨어지기까지 했고 출생아수 70만을 다시 넘기려면 199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14]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출산율 2명대를 더이상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1960년대생들이 성인이 된 시기다.

  •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컬러방송을 할려고 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다 같이 흑백방송 보자는 기존의 흑백TV 사용자들을 배려(?)한 정책 때문에 무산됐다. 텔레비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네 번째로 늦게 컬러방송을 개시한 국가다.

  • 1980년 코미디언 이주일이 전성기를 맞이하여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모으고 배를 잡고 뒹굴게 만들었다. 가히 이주일 신드롬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주일의 데뷔는 컬러방송의 시작과 거의 일치한다. 80년대 중반부터는 KBS에서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등이 방영되며 콩트시대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컬러방송, 이주일, 조용필은 당시의 연예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 이때부터 지금의 서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강남, 특히 송파구와 잠실이 더욱 엄청난 속도로 개발되었다.

  • 이때까지도 학교에 공공연히 금전을 주는 행위가 만연했다. 60년대, 70년대가 지난 뒤에도 일부에서는 가난 등의 이유로 돈을 가져오지 않는 학생이 얻어맞거나 반 수십명이 보는 앞에서 개쪽을 당했고, 아예 학교 밖으로 쫒겨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당국은 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점차 사라진다.

  • 어느 곳이든 권위주의가 굉장히 짙었다. 국민학교마저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바로 폭력으로 응징당했다. 80년대에는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생각도 못하던 시대여서,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몽둥이 찜질을 당해도 그냥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 인권의식이 아직도 열악한 시기였다.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의 시대로, 범죄자 뿐 아니라 길거리에 나뒹굴던 죄 없는 술고래들이나 노숙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몸이고 정신이고 망가지기도 했다. 할당을 정해주고 무작정 다 채우라고 강요하던 시대여서, 경찰들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좀 불량해 보이는 사람이면 족족 잡아넣기 바빴던 탓이다.

  • 남아선호사상,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관념이 여전히 통념이던 시절이라 여성들의 경우 능력을 갖추고도 대학에 가지 않거나, 집안의 반대로 가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로 공장으로 취업하거나, 아니면 시집을 가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오늘날에는 남자, 여자 모두 기술, 가정을 다 배우나 당시에는 남자에게는 기술을, 여자에게는 가정을 교육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등 교육은 자식 모두보다 주로 장남에게 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고, 딸이나 다른 아들은 대부분 중졸이나 고졸로 학업을 마감했고, 잘해봤자 전문대를 다니는 것이 최대였다. 이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 미숙련 사무직, 공무원으로 흩어졌다.

  • 출산율의 경우 1982년까지 출산율 2.1명 이상으로 대체출산율 이상을 유지했으며 출생아 수도 80면명대를 기록해서 70년대 중후반의 추이가 이어졌으나,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으로 1983년에는 출산율 2.06명으로 대체출산율을 약간 밑돌고 출생아 수도 76만명을 기록하더니, 1984년에는 출산율 1.74명으로 1명대로 진입하고 출생아 수도 60만명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1984년~1990년의 출산율과 출생아 수는 1991년~1997년보다도 낮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낮은 출산율을 보였다. 자세한 사항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문서를 참고. 다만 아직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하지는 않았고, 출생아 수는 60만명대를 유지해서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수치였기에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시기였다.


신데렐라 노래에 뜬금없이 1980년대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4.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편집]

1980s Tokyo, Japan - Traffic, Busy Streets, Shibuya Crossing, Rare 35mm Footage

80's Japanese TV Commercials (Part 1 of 4)[15]

  • 거품경제의 호황을 누리던 시기라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고, 이 시기에 서브컬쳐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작품들이 자주 제작되었다.

  • 8비트 게임기의 중흥기를 이끌어냈다. 패미컴만 해도 전설의 레전드.

  •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희망적이고 자신에 차 있는 경우가 많다.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명목 GDP 흐름[16]

1980년

1981년

1982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단위: 10억 달러(약 1조 원)

미국 전체 명목 GDP

2,862

3,210

3,345

3,638

4,040

4,346

4,590

4,870

5,252

5,657

일본 전체 명목 GDP

1,086

1,201

1,116

1,218

1,294

1,384

2,051

2,485

3,015

3,017

독일 전체 명목 GDP

826

695

671

669

630

639

913

1,136

1,225

1,216

프랑스 전체 명목 GDP: G7

704

621

589

564

534

559

775

939

1,025

1,031

영국 전체 명목 GDP: G7

542

520

492

466

441

468

570

704

855

865

중국 전체 명목 GDP

309

292

286

307

316

312

303

330

411

459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67

76

81

90

99

103

119

150

202

248

이웃 나라 이야기 1부 불패신화


너무 높은 화폐가치로 인해 쌍둥이 적자[17]에 시달리던 미국은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국의 화폐가치를 절하할 방법을 찾는다. 결국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인 미국, 프랑스, 서독, 일본, 영국이 플라자 합의를 맺는다. 절상됐던 달러의 가치는 하락했고 독일, 일본의 화폐가치는 상승했다. 일본의 돈은 더욱 부동산에 몰리게 된다.[18]

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미국을 추월할 것처럼 보였다. 일본은 미국 경제규모 절반에 해당하는 명목 GDP를 달성했다. 그 수치가 1987년에는 51.0%, 1988년에는 57.4%, 1989년에는 53.3%에 달했다. 일본의 남아도는 돈들은 주식과 부동산에 집중적으로 쏠렸다. 덩달아서 부동산 불패신화가 불었고 거품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절상된 화폐가치 때문에 수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엔고 불황’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저금리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일본의 부동산거품과 주식거품에 더욱 불을 지르게 된다.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1인당 명목 GDP 흐름
[19][20]/단위: 달러

1980년

1981년

1982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일본 1인당 명목 GDP: G7

9,312

10,217

9,431

10,216

10,786

11,464

16,890

20,367

24,604

24,522

핀란드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1,497

11,198

11,242

10,724

11,074

11,682

15,249

18,949

22,482

24,369

노르웨이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5,569

15,307

15,003

14,701

14,737

15,449

18,495

22,020

23,706

23,805

스웨덴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5,781

14,395

12,672

11,645

12,092

12,643

16,689

20,252

22,761

23,805

미국 1인당 명목 GDP: G7

12,575

13,965

14,410

15,531

17,099

18,231

19,078

20,062

21,442

22,879

덴마크의 1인당 명목 GDP: 북유럽국가

13,609

11,782

11,513

11,571

11,289

11,974

16,880

20,950

22,075

21,454

프랑스 1인당 명목 GDP: G7

13,111

11,493

10,858

10,329

9,733

10,146

14,003

16,869

18,324

18,324

독일 1인당 명목 GDP: G7

10,699

8,984

8,681

8,691

8,222

8,358

11,929

14,841

15,904

15,632

영국 1인당 명목 GDP: G7

9,629

9,227

8,746

8,281

7,818

8,292

10,071

12,395

15,035

15,171

대한민국 1인당 명목 GDP

1,778

1,968

2,075

2,268

2,474

2,542

2,906

3,627

4,813

5,860

중국 1인당 명목 GDP

313

292

281

298

303

295

282

301

370

407


1980년대 일본은 1인당 명목 GDP에서는 이미 미국을 추월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일본위협론'처럼 보이는 사상들이 각종 매체에서 광범위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SF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라이징 선>이다.

Robocop 3 Ninja fight (scene)


1993년의 작품이지만 그러한 시대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보캅 3[21]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에 대하여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22]

사실 일본의 미국 추월에 대한 우려는 80년대와 함께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거품붕괴가 일어난 이후인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사그러들었다. 일본의 주식시장은 1989년, 부동산시장은 1991년에 최고점을 찍은후 급격한 하락세를 겪으며 거품이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했는데, 따라서 미일간 경제규모 격차가 가장 적게 났던 시점은 80년대가 아닌 1995년이었다. 이 해 일본 GDP는 미국 GDP의 71.1%까지 도달했으나, 거품붕괴와 아시아경제위기의 본격적인 영향을 겪으며 96년 59.7%, 97년 51.3%, 98년 44.4%까지 뚝뚝 떨어지게 된다.

5. 중화권의 경우[편집]

6.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편집]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경우 ▼.

  •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관련 작품 전부

    • 오! 꿈의 나라

    • 오월의 청춘

    • 부활의 노래

    • 택시운전사

    • 소년이 온다

    • 아들의 이름으로

    • 임을 위한 행진곡

    • 26년

    • 꽃잎 ▼

    • 모래시계

    • 박하사탕 ▼- 1980년대 에피소드 일부 기준.

    •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 - 회상 장면 기준.

    • 화려한 휴가

    • 1987

  • 1984 ▼

  • Spintires - 1982년의 소련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오프로드 트럭 시뮬레이션 게임.

  • Summer of 84 - 1984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호러 영화.

  • Grand Theft Auto: Vice City - 1986년의 바이스 시티가 배경이다.

  • Grand Theft Auto: Vice City Stories - 1984년의 바이스 시티가 배경이다.

  •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 기묘한 이야기 ▼ - 1980년대 미국 인디애나 주의 호킨스 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 SF/미스테리 드라마.

  • 기적

  • 그것(영화)

  • 남영동1985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1980년의 텍사스가 배경이다.

  • 끝없는 사랑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1985년의 텍사스가 배경이다.

  •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 초중반 한정.

  • 라이프 온 마스(OCN)

  • 레드 던 ▼

  •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23]

  • 마법사의 밤 ▼ - 정확한 연도는 모르나 19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 마더 러시아 블리즈 ▼ - 연도 배경은 1986년이지만, 실질적으론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묘사되는 사회상이 개막장이다(...).

  • 만남의 광장

  •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 방식[24]

  • 번지점프를 하다

  •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 변호인

  • 비명을 찾아서 ▼

  • 빌리 엘리어트 - 1980년대 마가렛 대처 시절 영국 탄광촌이 배경이다.

  • 빛과 그림자 - 초반부는 아니고 64회중 40회정도부터 1980년대로 넘어간다.

  • 보스 1999

  • 보헤미안 랩소디

  •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에피소드

  • 백야행 - 중후반부 기준.

  • 베이퍼웨이브 뮤직비디오들[25]

  • 살인의 추억

  • 식물 vs 좀비 2 네온 믹스테이프 투어

  • 서울대작전 - 88 올림픽 당시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 설강화

  • 써니

  • 스카우트: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직전의 이야기.

  • 슈퍼스타 감사용

  • 쓰르라미 울 적에 - 1983년의 일본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

  • 썸머 85

  • 아메리칸 사이코

  • 아토믹 블론드 - 1989년의 독일이 배경이다.

  • 이웃사촌

  • 이중간첩

  • 응답하라 1988

  • 용과 같이 제로[26]

  • 에덴의 동쪽 ▼ - 전반기 (어쩌다 고증이 엉망이 되었다)

  • 엑스맨: 아포칼립스 ▼

  • 월드 인 컨플릭트▼

  • 위험한 상견례

  • 원더우먼 1984 ▼

  • 자이언트

  • 재벌집 막내아들 - 초반부 기준.

  • 젊은이의 양지

  • 조커

  • 좋은 친구들 - 극후반부 기준.

  • 죠죠의 기묘한 모험 - 스타더스트 크루세이더즈 ▼

  • 제빵왕 김탁구

  • 제4공화국[27]

  • 제5공화국

  • 첨밀밀(2번 항목) - 1986년에서 1995년도까지의 일을 다루고 있다.

  • 첫사랑

  • 친구 - 소년시절 및 현재 제외.

  • 체르노빌

  • 카지노 - 중후반부 한정.

  • 카미츄!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1983년의 북부 이탈리아가 배경이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 - 과거 파트 한정.[28]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 쿵 퓨리 ▼ - 스웨덴에서 제작된 복고풍 권격영화. 동명의 게임도 출시되었다.

  • 크리스는 괴로워

  • 트루 디텍티브 - 시즌 3의 1980년 파트 한정.

  • 텐 - 천화거리의 쾌남아

  • 파친코(드라마) - 1980년대 장면들 한정.

  • 품행제로 - 류승범의 양아치 연기가 일품인 한국영화, 교복자율화 시기인 1983~1986년이 배경.

  • 페이퍼 플리즈▼

  • 퍼펙트 게임 - 80년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최동원과 선동렬의 맞대결.

  • 피끓는 청춘

  • 핫라인 마이애미 - 1989년의 마이애미가 배경이다.

  • 핫라인 마이애미 2 - 일부 1980년대 챕터들 한정.

  • 헌트

  • 화이트 앨범 - 애니판과 리메이크판은 1986년~1987년 배경.

  • 행복을 찾아서

7.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편집]

※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는 것들을 적을 것.

  • BC카드

  • CNN, MTV 등 케이블 방송

  • CTS: 1975년 3월 코리아헤럴드가 먼저 도입했으나, 본격적으로 도입한 신문사는 1985년 1월 서울신문이었다.

  • KBO 리그

  • K리그

  • Microsoft Windows

  • 가이낙스

  • 강수확률예보: 1987년에 도입됨.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 국회 청문회제도: 1988년 국회법 개정 시 도입됨.

  •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1987년 제정 당시의 명칭은 '남녀고용평등법'.

  • 컬러TV: 1980년 8월부터 시판하여 12월 1일부터 방송 시작함.

  • 뉴코아백화점

  • 닌자 거북이

  • 롯데면세점

  • 롯데월드

    •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장 당시 18종의 어트랙션이 있었으나, 알라딘보트 등 일부 어트랙션은 사라졌다.

    • 롯데호텔 월드

  • 마리오 시리즈

  • 맥도날드 등 해외 패스트푸드점 한국점포들

  • 무인경비시스템: 1981년 한국안전시스템이 일본 세콤 브랜드를 국내에 진출시킨 게 시초이다.

  • 문자발생기: 방송업계에선 1981년 1월 KBS가 처음 도입했다.

  • 여성 운전자

  • 외국영화 직배: 1986년 영화법 개정 이후 허용됐으며, 1988년에 UIP코리아가 <위험한 정사>를 먼저 들여왔다.

  • 민자역사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복합상영관: 1986년 서울 영동예식장 내에 개점한 '다모아극장'이 최초이다.

  • 시사저널

  • 한겨레

  • 안성탕면

  • 서울대공원

    • 서울동물원: 조성 당시엔 '서울대공원 동물원'이었다.

    • 서울랜드

  • 신라면

  • 심슨 가족

  • 웅진씽크빅: 창립 당시엔 '헤임인터내셔널'이며, 1983년부터 '웅진출판'이 됐다.

  • 장애인복지법

  • 재능교육: 법인 설립은 1981년이다.

    • 재능수학: 출시 당시에는 '재능산수'였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 전국노래자랑

  • 중형택시: 첫 도입 당시 대표적인 차종은 현대 스텔라다.

  • 철거용역업체: 1986년에 최초로 생겨났으나, 일반화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 치료감호제도: 1980년 사회보호법 제정으로 도입됨.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 공익광고협의회

  • 뮤직비디오

  • 코스프레[29]

  • 프로월드컵

  • 아티스

  • 월드컵

  • 슈퍼카미트

  • 액티브

  • 프로스펙스

  • 르까프

  • 아시아나항공

  •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서울 올림픽이후 1989년부터 전면 자유화되었다.

  • 화려한 무늬나 그림이 많이 새겨진 외국형 패션들

  • 저출산

8.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편집]

※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 언론통폐합으로 폐사된 언론사들

    • 합동통신, 동양통신 등 5개 뉴스통신사: 연합통신으로 통폐합됨.

    • 신아일보: 1980년 폐간 후 사원과 기자재 등이 경향신문으로 넘어감.

    • 경남일보: 1980년 폐간 후 1989년부터 '신경남일보'로 복간됐다가, 2000년부터 본래 제호를 되찾았다.

    • 전남매일신문: 1980년 전남일보에 합병됨.

    • 제남신문: 1980년 제주신문에 통폐합됨.

    • 동아방송: 1980년 KBS에 흡수돼 KBS 라디오서울이 됨.

    • 동양방송: 1980년에 KBS에 합병되어 KBS 2TV로 바뀌었다. 물론 2011년에 JTBC로 부활했지만...

      • 전일방송 등 3개 제휴사: 1980년 KBS로 흡수됨.

  • 흑백 TV

  • 석유풍로(곤로) - 1980년대 후반까지 사용된 조리도구. 도시가스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가스렌지로 점점 대체되기 시작한다.

  • 버스 안내양 -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으로 제도 자체가 없어졌으며, 대신 여성 버스 운전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동마장터미널

  • 가쿠란 교복: 교복 자율화 조치에 따라 1983학년도부터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폐지된다.

  • 남자 어린이들의 삭발: 위생상태의 개선과 함께 1982년 중고교생 두발자유화 조치가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들에게도 파급되어 사라진다.

  • 민간에서의 국기하강식: 자율이 아닌 의무적 애국심 고취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어 1989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 6.25 전쟁이 일어날 때 쓰였던 자동차들: 1983년까지 폐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970년대까지 쓰였던 전통적인 패션들

  • 공연물 사전검열: 1989년 공연법 개정으로 폐지.

  •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7년 3월 폐지.

  • 보안감호제도: 1989년 사회안전법이 '보안관찰법'으로 바뀌면서 폐지.

  • 유언비어 유포죄: 1989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폐지.

  • 자택장: 1980년대 들어 병원에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영안실에서 치르는 빈도가 늘어 쇠퇴했다.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제도: 1980년 이후 사문화됐다가 1989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으로 폐지됨.

  • 프레스카드 제도: 1987년 정간법 제정으로 폐지됨.

  • 한국 섬유/방직/신발업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후 노동운동 활성화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해 개발도상국으로 생산설비를 이전했다.

  • 한국 해외건설업계: 1980년대 초반 제2차 오일쇼크와 중동 건설 붐의 침체로 쇠퇴한 바 있었다.

  • 국제그룹, 명성그룹, 동명그룹, 화신그룹, 광명그룹, 삼호그룹 등 일제강점기와 6~70년대를 호령하던 재벌들: 화신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그룹들은 거의 전두환의 산업합리화 조치 등에 의해 해체되었는데 특히 국제그룹과 명성그룹이 전두환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 해체되었다.

  • 기계식 시계 - 손목시계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쿼츠 시계와 디지털 시계로 대체되었고 더 이상 기계식으로 돌아가는 다른 종류의 시계가 생산되지 않고 있다.심지어 손목시계 마저도 실용성에서 멀어진 고가의 명품 내지 사치품목이 되었다.

  • 1종 소형면허 제도: 1984년 폐지.

  • 3륜 화물자동차: 1972년 고속도로 진입금지 시행 후 1984년 1종 소형면허 폐지에 따라 사라졌다.

  • 다산풍조: 최대한 늦게 잡아도 1980년대 초반이 마지막이다.

9. 1980년대에 들어가는 해[편집]

1980년 - 1981년 - 1982년 - 1983년 - 1984년 -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1989년

10. 관련 문서[편집]

  •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 북한의 80년대 3대 실정

  • 베이퍼웨이브

  • 사이버펑크 장르

  • 신스웨이브

  • 샤바 샤바 아이샤바

11. 참고/관련 문헌[편집]

  • 강좌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저. 풀빛. 1995.

  • 고쳐 쓴 한국현대사 -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1994.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권 - 박세길 저. 돌베개. 1992(초판)/2015(재판).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 교과서포럼 저. 기파랑. 2008.

  •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 정인(황광우) 저. 거름. 1985(초판)/1991(개정판).

  • 바로보는 우리역사 2권 -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저. 거름. 1990.

  • 불의 기록, 피의 기록, 죽음의 기록 - 김종찬 저. 실천문학사. 1988.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20권(완결) - 서중석/김덕련 저. 오월의봄. 2019~2020.

  •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재벌과 빈곤의 경제 - 정인(황광우) 저. 거름. 1985(초판)/1989(개정판).

  • 우리역사 이야기 3권: 8.15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 조성오 저. 돌베개. 1993.

  •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한국 현대사 - 윤대원 저. 거름. 1990.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박현채 저. 소나무. 1992.

  • 한국현대사 4권 - 한국역사연구회 저. 풀빛. 1991.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전 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권 - 한국정치연구회 저. 녹두. 1993.

  •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저. 서해문집. 2003(초판)/2016(개정판).

  • 80년대 한국사회 대논쟁집(월간중앙 1990년 신년호 부록) - 월간중앙 편집부 저. 중앙일보사. 1990.

  •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 한용 외 저. 청년사. 1989.


[1] 다만 이들 나라 중에서도 루마니아는 그 비싼 이자율에도 어떻게든 빚을 다 갚기는 했고, 덕택에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다.[2] 대표적으로 1983년 핵미사일 오발 직전까지 간 사건.[3] 3저호황[4] 빠른 1983년생 포함.[5] 고등학생 1962년생~1973년생, 중학생 1965년생~1976년생, 국민학생 1968년생~1982년생[6] 플라자 합의를 서방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굴복시킨 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본 경제의 실력을 인정한 미국의 인증 선언에 더 가깝다. 플라자 합의는 근본적으로 환율의 현실화에 불과했고 실제로 그 효과가 나타날지도 당시에는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당시에도 환율에 대한 결정권은 이미 정부가 아닌 민간으로 넘어간 상황이었고 때문에 5개국 정부가 합의했다고 하더라고 과연 환율이 정상화 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플라자 합의가 장래에 일본의 거품경제를 만들어내고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어 내는 간접적인 한 원인이 될 거라는 걸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7] 당시 블록버스터는 1000만 달러 이상이었다. 1991년 개봉한 터미네이터 2 이후에 들어서서 1억 달러 기준으로 올랐다.[8] 지브리 창립 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했다.[9] 드래곤볼도 초기에는 닥터 슬럼프의 개그 노선을 따르다가 점차 능력자 배틀물로 변화했다.[10] 다만 아놀드 피터슨은 800명 사망,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측은 2,000여 명 사망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계엄군이 학살당한 시민들을 암매장하는 바람에 정확한 수는 아직 모른다.[11] 다만 이때 호황의 여파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부동산값이 급속히 올라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12] 물론 당시 대학진학률이 20%대에 불과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된다.[13] 사실 이때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견기업 정도만 되어도 평생직장은 보장해주는 분위기였기에 공무원이 그리 메리트 있는 직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물론 공장다니는 것이나 농사짓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지던 수준.[14] 하지만 그마저도 1996년부터 다시 60만대로 떨어졌다.[15] 세 번째 아이브로우 광고에서 나오는 여성이 기무라 타쿠야의 부인 쿠도 시즈카.[16]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명목 GDP 흐름[17]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0[18] 관련 기사[19] (1980~1989)일본과 주요국가의 1인당 명목 GDP 흐름[20] 북유럽 국가 1인당 gdp[21]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11817&t__nil_main_synopsis=more[22] 미국의 정의를 상징하는 로보캅이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닌자에게 팔이 잘리고 얻어맞아 쓰러지는 등의 장면에서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느끼던 공포와 불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3] 소련 -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콩고 내전등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이지만 워낙에 시리즈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물론 현재에도) 오버테크놀로지나 초능력자등을 묘사하기에 SF 물이나 다름없다.[24] 타임슬립물로,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풍자한 일본 영화.[25] 이 시기의 TV 영상물들을 짜집기해서 해당 소재가 90년대 초까지 커버하는 경우도 있지만, 80년대 영상클립들이 압도적이다.[26] 1988년 일본 거품경제 절정시기를 다루는데 이를 게임내 반영해서인지 거의 모든걸 돈으로 해결한다. 기존에 경험치를 삭제하고 돈으로 해결하는데 오죽하면 조무래기 적을 패기만 해도 10만엔 단위 돈이 쏟아져나온다. 각 챕터가 끝날 때도 벌어들인 게임내 소지금이 당시 기준으로 얼마만큼의 가치인지도 나타내준다. 이는 버블 시대를 경험한 나이든 유저에겐 당시 향수를 느끼게 하고 거품경제 이후 세대에겐 당시 시대상 대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27] 대개는 유신을 다루고 있지만 전두환의 집권 과정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5.17 쿠데타가 터진 80년도 4공은 4공이었다. 5공은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이은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1년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