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식 전화기 원리 - jaseogsig jeonhwagi wonli

제가 바로 인류 최초로 전화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저는 1876년 2월 14일 미국 특허 사무국에 전화 발명 특허를 신청했고, 다음 달인 3월 7일 ‘전기 진동을 일으켜 목소리나 그 밖의 소리를 전신으로 전달하는 방법과 기구’로 특허(번호 174465)를 받았습니다. 굳이 이런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도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세요, 전화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마 열에 아홉은 바로 이 사람, ‘벨’이라고 답할 게 분명하다니까요.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는 저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최초의 전화 발명가지요. 그레이 : 전화는 제가 먼저 발명했습니다. 저 역시 1876년 2월 14일 미국 특허 사무국에 전화 발명 특허를 신청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착하기 두 시간 전, 벨이라든가 뭐라든가, 아무튼 저보다 덜 유명한 발명가가 먼저 특허 신청을 했다더군요. 결국 특허 사무국은 두 시간 빨리 도착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전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전기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1874년부터 이미 전화를 공개적으로 시연했는데도 말입니다. 단 두 시간 차이로 저는 남은 인생을 억울하게 살았습니다.벨 :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 목소리를 재생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컬 생리학이나 연설 수정, 청각장애인 교육에 전문가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지요. 제가 소리를 전달하는 기기를 개발하는 데 전념한 결과 전화 발명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레이 : 전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정식 교육을 많이 받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 ‘전기’가 등장하면서 꾸준히 관심을 가졌어요. 1868년 33살 때 개량 전신 계전기로 첫 특허를 따내기도 했지요. 처음에는 농사일과 전기 실험을 병행했지만 이 특허를 취득한 후 전신 장비를 제조하는 회사 설립을 도우면서 제조업자 겸 발명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벨이 전화 발명 특허를 신청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그의 전화는 단지 이론에 불과했어요. 실제로 특허를 획득하고 사흘 후에나 전화 통화에 성공했다고요.

전화시스템은 1876년 벨(Bell, A. G)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당시 전신관련 발명가로서 큰 명성을 가졌던 그레이(Gray. E)도 거의 동시에 같은 성과를 냈다. 그레이는 처음으로 소리를 전류로 바꾸는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를 이용해 바이올린의 음을 전기적으로 바꾸는 금속진동판의 전자기수신기를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음악전신기, 다중전신, 음성전신 등에 이 금속진동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통신회사들은 이 발명품들을 ‘장난감’보다는 하나의 전신선으로 동시에 여러 모스신호를 보내는 다중전신개량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그는 통신회사의 요구에 주목했다.

벨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음성 통신 기기를 개발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농아 발성법, 음성학이었다. 기계적 발명에는 문외한이었던 벨은 기계수리공이며 모형 제작자였던 왓슨(Watson. T. A)에게 의뢰해 음성을 전기적으로 전달할 때 필요한 기구를 제작했다. 다중전신개량에 매진한 그레이와 달리 벨은 전화방식 개발에 집중했다. 전화의 개량과 실용화에도 기여해 성공을 거둔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음성학과 농아교육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전화 실용화는 보스턴-뉴욕구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화교환방식은 자석식으로 수화기를 걸어놓고 핸들을 돌려 전화교환수를 호출하고, 상대방의 번호를 교환수에게 알려주어 연결하게 함으로써 통화가 가능했다. 1878년에는 에디슨(Edison. T. A)이 탄소 저항을 이용해 송화기를 개량함으로써 통화 품질 개선에 기여했으며, 1889년에는 스트로저(Strowger. A.)는 자동식 교환기를 발명했고, 1896년에는 다이얼 전화기가 발명되었다. 그리고 1958년 미국 벨연구소에서 전자교환기가 개발되었다. 교환방식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자 전화기 역시 다이얼식에서 전전자식 버튼식 전화기로 전환되었다.

미국에서 발명, 진화된 전화 실물이 조선에 소개된 것은 1882년 4월의 일이다. 1880년 말 청나라 텐진 무기공장에 근대 무기기술 습득을 위해 파견된 군계학조단상운이 조기 귀국하면서 전기 통신기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전화기 사용 여부는 이후 벌어진 임오군란 등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4년 전후 조선정부는 이 통신기기를 중앙정부 내 문서 수발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전 해인 1893년 일본 도쿄에 전화기를 포함한 전신재료들을 주문, 구입했고, 1894년 1월 말 이 기기들이 인천에 도착했으며 3월 1일 전화기를 시험하겠다고 통보한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과 1895년 궐내 전화 사용에 대한 흔적이 없는데, 이 역시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1894년 이래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개혁, 을미사변 등 불안한 정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896년 즈음,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중심으로 중앙부서를 연결하는 전화선과 더불어 서울과 조선의 대표적 개항장 인천 사이에 전화선 가설이 완료되어 공무용으로 이용되었다. 이 전화선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부서로 궁내부 소속의 통신사가 설치되었다.

민간 전화는 1902년 인천해관과 서울사이에 전화선이 가설됨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통신원 관할이었다. 통신원은 1900년 우체 전신을 포함한 선박 운용 등 정보소통을 위해 필요한 업무들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한 정부 부처였다. 이런 사업들은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통신원에서는 전문 전신 기사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를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기통신사업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법제적, 제도적 장치도 정비했다. 이런 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통신사업은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런 발전을 바탕으로 민간 전화사업도 추진할 수 있었다.

1902년 반포된 국문과 영문의 『전화규칙』은 통신원의 전화사업 정착과 지원을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규칙』에 의하면 이를 따르지 않는 전화선은 불법이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이 추진했던 전화사업을 겨냥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일본이 서울에 임의로 설치한 전화선을 철거하기도 했다. 또 전화업무를 통신원 소속 전보사에서 전담하도록 「전보사관제」를 개정해 전화사업 전개를 위한 조직도 구축했다. 전보사 이외에 전화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전화사업소를 전보지사로 규정했다.

1902년 민간 전화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전화가입자수가 크게 늘지는 않았다. 1902년 전화 청원수 4건(인천 2, 서울 2)이 1905년 인천 28, 수원 1, 시흥 1 정도로 늘어났다. 지방의 경우, 외국인이 운영하는 기업이나 외국인 조계내의 외국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의 경우에는 가정집에 설치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설치 사용료 600원(매월 50원으로 분납)은 당시 쌀 한 섬이 8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일반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매우 비쌌다.

당시 전화로 소통되는 내용은 전화소 직원이 간단하게 기록했다. 주로 전화가 정부 기관에 설치되어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통화내용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무상의 보고와 전달 같이 공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통신원이 계획했던 전화사업의 확장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서울평양간 전화선을 강점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에는 강제로 한일통신협정을 체결하게 해 대한제국 정부의 전신전화선을 포함한 모든 통신 수단을 피탈했다. 이후 조선 식민지 구축을 위한 통감부의 통신도구가 되었다.

1905년 이른바 한일통신협정이후 전화사업은 조선내 일본인 사업체와 통감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기존 대한제국 정부의 모든 통신망과 통신시설, 통신전문인력을 장악한 통감부는 특히 전신, 전화 전문인력을 통신사업에서 배제하는 한편 인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1906년, 통신협정에 통신원 존속이 명기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폐지했다.

일제 강점기, 전화사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발전한 듯했다. 인천, 서울, 평양에 머물던 전화선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자동전화교환기술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전화선은 일본-조선-만주 연결에 초점을 맞추거나 반일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경비통신에 치중된 것이어서 한반도를 아우르지 못했다. 도입된 자동전화교환기는 개발된 지 30여 년이 지난 것으로 그나마 경성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1930년대 이룬 양적 성장은 중일전쟁,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북조선 지역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나마 이 시기 전화선 대부분은 일본인에게 공급된 것이었다. 조선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전화 가입자의 80%에 이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고급 통신기술자 양성에서 조선인을 배제해 광복 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전화설비를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이들 50% 이상 고장난 설비를 보수, 정비할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광복으로 전화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기통신은 기본적으로 전신선을 가설해야 하는 설비산업인데,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전신선 가설을 위한 기본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설되었던 전신선마저 파괴, 훼손되었다. 기자재와 기술 부족 상황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과 더불어 통신 분야의 발전은 괄목할 만했다. 통신 관련 차관 도입 규모도 커졌다.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전화선 공급은 이루어지지 않아 전화 적체가 사회적 문제를 초래했다. 이는 경제가 급격하게 팽창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심각해졌다. 이 부족 현상은 전화사용권 매매가 가능한 이른바 백색 전화값의 폭등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전화공급 부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전화선을 대중이 동시에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환기의 도입 및 개발, 지역단위의 교환기 설치, 자동장거리 전화의 설치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전화수급의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런 전화선 부족에 대한 사회적 불만은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 즉 전자식으로의 교환 방식 전환, 광통신선의 개발 및 광통신망의 구축 등을 위한 연구와 기반 조성을 위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연구와 투자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1977년 설립된 한국통신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연인원 1,060여 명의 연구진이 투입돼 진행된 전자교환기의 개발이었다. 1984년 개발된 이 TDX-1은 전세계적으로 10번째의 성공이었다. 이의 상용화와 개량으로 전화적체 현상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현대 한국의 전화기술의 발전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정보산업의 선두가 되기 위한 시설투자와 연구기반과 필요 장치 및 자재 생산을 위한 산업시설도 구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무선통신의 상용화를 위한 준비였다. 1980년대 무선통신은 통신보안의 취약성으로 활용이 미미했다. 1980년대 초 무선호출서비스, 일명 삐삐의 등장, 차량이동전화서비스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관련 기업들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사용하는 전화기에도 무선방식이 도입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일반 대중이 이용하는 이동통신이 등장했다. 개인휴대전화, 휴대폰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 전화방식은 이동통신서비스 지역 안에서 무선구역 안의 기지국을 통해 일반 전화가입자나 다른 이동통신 전화가입자간 통화가 가능한 전화방식을 총칭한다. 우리나라는 코드분할다중 접속(CDMA)방식을 채택해 개발함으로써 1997년 10월 1일 이래 상용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이동통신으로 음성, 문자, 동영상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 현재는 4세대 휴대폰 시대로 단말기를 이용해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 정보 수취의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