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경우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이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 지 묻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17세기 전반 1636년에 있었던 병자호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를 나눌 수 있다. 특히 이 1636년은 중국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 다른 기준으로는 16세기 말에 있었던 임진왜란이 있다. 1592년 국토를 황폐화시킨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15~16 세기), 조선 후기(17~19 세기)로 구분한다. 특히 조선의 군사제도 개편에 있어서는 임진왜란이 큰 기점이다. 마지막으로는 병자호란으로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을 때를 기준으로도 나눌 수 있다. 효종으로 즉위한 해 1649년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도 있다. 가발: 퍼루크라고도 한다. 17-19세기 유행한 남자 가발.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직업군들이 이 가발을 착용하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세대들의 초상화에서 이 가발을 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계몽주의: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주류로 자리잡은 사조로 유럽을 근대사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선박들
로코코: 18세기 미술 양식. 르네상스: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마녀사냥: 보통 중세 기독교의 광신이니 어쩌고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집중된 관료제적 현상은 16세기 중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방, 개신교와 카톨릭 제후국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마녀를 가상의 존재로 취급하거나, 권력당국이 의도적으로 계획 및 집행하지 않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마녀 '폭동'이 잠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머스킷 바로크: 17세기 미술 양식. 사략선 사브르 성형 요새: 캐논의 등장으로 중세식의 공성전이 소용없어지자 이에 대비하여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역병 의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새부리 가면의 역병의사는 중세가 아니라 근세에 등장했다. 전열보병: 18세기 초반에 처음 등장하여 18세기 중후반의 미국 독립전쟁,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등의 주역으로 활약한 병종이다. 종교개혁 증기기관: 증기기관이 사회 전반에 보급되어 산업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은 근대의 일이지만, 이 근대식 증기기관의 기원은 계몽주의 시대인 1705년에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한 증기기관이며, 제임스 와트가 1765년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개량하면서 근대식 증기기관이 등장했다. 콩키스타도르 트리코른(삼각모) 해적 근세의 서양작가들과 문학: 이를테면 작가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문학 걸리버 여행기, 삼총사, 베니스의 상인 등이다. 확장된 세계관으로 인해 시행착오를 겪은 인간들에 대한 풍부한 고찰이 특징이다. 다양한 세계상,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동경과 풍자가 들어가 있다. 담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토마토를 비롯한 신대륙의 작물들 3.2. 한국[편집]한국사에서 근세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부터라고 정의하고 있는 편이다.
3.3. 중국[편집]중국사에서의 근세는 송~청대까지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 시대와는 달리 송대 이르러서부터는 춘추 전국시대나 5호 16국 시대, 5대 10국과 같은 장기적인 권력의 공백이 나타나지 않고 바로바로 통일 왕조로 교체되어 나갔다. 이에 대한 비결은 송나라 때 이룩했던 문치주의와 서민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송원명청 왕조를 거치면서 한족과 이민족들은 번갈아 중원의 주인이 되었고 이는 중국사의 권력 이동 과정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유동적으로 공유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9] 즉 중국 고대사가 열국의 혼란과 통일 왕조의 등장. 중세사가 호한의 대립과 분열과 재통합이라면 근세사는 호한의 통일 왕조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3.4. 일본[편집]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열도는 사실상 열국 시대나 다름 없었다. 일본 원주민들과의 사투, 해적과 도적의 창궐, 다이묘들의 잦은 반란 등으로 성숙한 치안과 중앙 집권이 보장되지 못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시대 이르러 전란이 종결되고 성리학 이념을 내세워 전례없는 태평성대를 완성시킨다. 에도 막부는 중국의 송나라와 더불어 동북아 역사에서 화폐 경제와 서민 문화가 발달된 시기로 꼽히고 있다.[10]
[1] 한국의 경우 조선이 건국한 1392년 8월 5일부터 철종의 재위기간이자 흥선대원군의 집권 전인 1864년 1월 20일까지를 근세로 본다. 교과서에서 이 기간을 근세라고 지칭한다. 세부적으론 조선 건국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를 근세, 이후부터 철종의 재위기간까지를 근대태동기로 부른다.[2]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필두로 한 교토대 계열 학파에서 두드러진 성향이다. 도쿄대 학파는 초기에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 시대 구분 방식에 '생산력'과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4] 특히 일부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장기 중세'라고 하여 18세기까지도 중세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재한다.[5] 대체적으로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을 시점으로 보고 있다.[6] 조선시대의 시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연산군의 재위기간이었다. 연산군은 왕권을 무리하게 남용하다가 신권에 의해 퇴위된 조선시대 첫 사례이다. 현재, 중종반정이 발생한 이후가 조선중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실재로 지방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세는 조선후기 숙종대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숙종 재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으로 다시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게 됐다.[7] 제국 초창기에는 '지배층 = 튀르크인'이라는 공식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는 제국의 지배층에서 튀르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감소하고, 쉴레이만 1세 시대가 되면서 튀르크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다만 이것은 인종적인 이야기지, 공용어는 여전히 페르시아어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오스만 터키어였고, 지금 터키인을 터키에 사는 터키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함을 생각해보면 이들도 어찌보면 터키인으로도 볼수 있다.[8] 이들을 일컬어 키질바시(Qizilbash, '붉은 머리')라 한다.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아바스 1세 때까지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다.[9] 송나라 이전의 중국사를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가지각색의 왕조들과 지방 정권의 할거 등으로 인해 국가명 외우는데도 매우 벅찬 수준이다. 통일 왕조들마저도 단명하거나 장수한 왕조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간에 한번 계통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10]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서 상업경제가 활발한 시기는 아무래도 고려 시대와 조선 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 시대는 당시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는 이웃에 도쿠가와씨가 자리잡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