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1 4 절 - yohanbog-eum 14jang 1 4 jeol

본문 요한복음 14:1-14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지상 사역의 마지막, 곧 죽음으로 나서는 길목에서 전하시는 예수님의 고별메시지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4장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요약하면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됨을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은 다른 사복음서에서는 병행구절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록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메시지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곧 주의 만찬에서 이뤄졌다는데에 지지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이 만찬에 대한 아무런 명시 없이, 예수님의 떠나심(1-14)과 다시 오심(15-31)에 대한 설교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슬픔에 젖어 낙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임을 전달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충격과 절망으로 빠져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고자 이 고별메시지를 전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서언(1-3절)
요한복음 13장 36-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부정적인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모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근심에 싸여 있을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한글 성경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명령문으로 번역했으나, 일부 변역본에는 평서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나를 믿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헬라어는 평서문과 명령문의 형태가 같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해석은 가능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한글 성경과 같이 명령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을 일으키는 것은 임박해오는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떠나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이 땅에 자신들만이 남아 있다고 불안해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떠나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어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할 곳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네’는 통상적으로 대저택, 맨션(mansion)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흠정역이라 불리는 KJV(킹제임스버전)도 이를 맨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영어에서 맨션은 수수한 가옥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더구나 ‘모네'는 요한복음에서 ‘거주하다’, ‘머무르다’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동사인 ‘메네인’의 명사형으로써, 장소적인 '거처'나 '자리' 혹은 '지위'로 해석되는 것이 매끄럽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네’를 장소적인 의미보다는 ‘메네인’ 동사의 행동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거함’으로 보는 것과 이를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거할 곳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하늘에 대궐과 같은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해석은 적어도 이 본문을 예로 들어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로 해석된 헬라어 ‘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 곧 하늘의 거처, 천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이해로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저자들의 사고가 하나님의 거처로 불리는 성전은 교회 공동체와 일치할 뿐 아니라, 하늘의 거처, 곧 천국과도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구절의 의미는 성전의 성취인 교회 공동체와 성전의 원형인 하늘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많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절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신다’는 말에 의미 또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가신다’는 말씀은 이후에 ‘다시 와서 영접하여 데리고 갈 것이다’는 말씀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데에 큰 이견은 없으나, ‘다시 오심’에 대한 해석은 나뉩니다. 먼저, ‘다시오심’은 ‘부활'을 지칭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의 영접함은 부활 이후 교회에서 경험될 예수님과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상호 내주하시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시각은 ‘다시 오심’이 ‘성령의 오심’을 지칭한다는 의견입니다. 또한 이는 14장의 문맥 가운데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23절의 삼위일체의 내주에 대한 약속, 26절의 보혜사와 예수님과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의 교제를 하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의미한다는 3절 후반부의 약속도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다시 오심’은 ‘재림’을 지칭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종합하여, ‘다시 오심’이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오심, 재림을 종합적으로 지칭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록물들 안에서 한 단어를 이중적 혹은 다중적으로 자주 사용을 해왔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마지막 입장은 수용가능해 보이며, 학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전역을 함께 거닐었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과 숱한 식사를 함께 하며 교제하고, 예수님 사역의 현장에서는 신기한 이적들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기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행복을 주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고 싶지 않았던 주님의 손을 이제 놓으라고 주님꼐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만한 절망과 공허함은 이 세상에서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손을 놓아야만 더 큰 주님의 뜻이 펼쳐진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떠나가는 자리가 공허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더 큰 것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고별메시지를 통해 더 큰 소망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감으로써, 부가 더해지고 건강이 더해짐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는 이것이 다 빠진 공허함의 자리에서도 “나와의 교통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겠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리가 이 질문에도 “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신다면, 기꺼이 오늘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빠진 공허함의 자리를 하늘 소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4-14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도마는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고 묻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도 모를 뿐더러, 그곳에 가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었으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한 길이고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전체의 신학을 아우르는 가장 훌륭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 진리, 생명, 이 세 개의 용어들 중에서 강조점은 길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예비히신 곳으로 인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이요 계시자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와 비교가 안될만큼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곧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창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로써, 곧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 되었으며, 예수님을 본 것 또한 아버지를 본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를 자신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말씀한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의 모세도 하나님을 보고 싶었지만, 거절받아 제한적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출 33:18-23). 그런데 사실 빌립은 성육신하신 완전한 하나님을 이미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육신 하신 하니님, 곧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아주 단호한 어조로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 말씀해주셨습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직선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기독론, 곧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유능하고 똑똑한 랍비나 좋은 길로 인도해주는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으로써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10-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중첩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궁극적인 연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정당하게 권위를 부여받은 대사는 그를 보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와 같은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해석은 한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된 인격으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는 완전한 연합의 상태임을 암시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향한 위로에서 출발된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상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이제 제자들이 이어가라고 격려하며 말씀하십니다.
(12-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 안에서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는 제자들 안에서도 그 능력을 행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이라고 할 때, 신유나 축귀와 같은 기적을 생각하지만, 이는 그 의미를 축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행해 오셨던 일은 기적 뿐 아니라, 겸손, 섬김, 사랑까지도 행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것보다도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큰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 거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고 시작되는 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빠지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빠진 자리를 성령님께서 채워주시면 제자들의 사역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그들의 삶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 그들의 구함, 곧 기도 옆에서 그들과 함께 큰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신앙에 더하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뺄 것을 빼야 하고, 놓아야 할 것을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도 주님께서 놓으라는 타이밍에는 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을 요구하고, 어마어마한 용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버겁다고 느껴질 때에는 예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가 한가지 부족한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자 힘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이전과는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작은 변화를 통해 그보다 더 큰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가 더욱 새롭게 세워져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채우고 채우기 위해 주님께로 달려왔던 저희의 인생, 저희들의 목표를 아셨기에, 그토록 아낌없이 채워주셨던 은혜가 참으로 컸음을 고백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채워지고 채워졌던 그 은혜가 이제는 빼고 뺌으로 세상 가운데로 흘려보내야 하는데, 움켜쥔 손이 잘 펴지지가 않습니다.이 손을 펼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펼친 손에 더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주사, 저희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옵소서. 또한 저희의 펼친 손으로부터 흘러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온 땅으로 흘러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교회와 사회를 회복하는데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불안한 상황에도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당신의 삶에 성령의 평안함을 느끼셨던 경험이 있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길이신 주님은 만나 진리와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던 처음 신앙의 마음가짐을 기억하며 묵상해 봅시다.
3.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던 도마와 빌립은 솔직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하며 구하고 답을 얻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막히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이 막힘을 해결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4. 주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이 세대 속에서 ‘그보다 큰 일’을 행하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