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야인시대》제45회: 신영균 VS 문영철(스샷)지금은 TV에서 보기 힘든 중견 배우들은 뭘 하고 있을까? 지난 해 한여름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린 〔제12회 대한민국 환경대상〕에 뜻밖의 '깜짝 게스타'가 나타났다. 나도 평소 환경을 가꾸는데 관심이 많은 소시민이지만 애시당초 이 분이 온다는 정보를 온·오프라인으로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무척 놀랐다. 바로 대한용무도협회 홍보위원을 역임하고 있는 중견배우 윤용현 씨다. 참고로 용무도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경호실, 육군 등의 정식 무예이며 미국 버클리대학의 정식 교과과목으로 선정되어 있다.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지 모를테지만 예전 시대극 《야인시대》에서 신영균 역으로 나와서 김두한의 심복인 문영철을 상대로 끝내주는 맷집을 보여준 모습도 전혀 근거 없는 연출은 아니란 대목 ㅋㅋ 원래 윤용현 씨는 권력자나 악역 보스들의 충성스러운 심복으로 브라운관에 자주 나오곤 했었는데 워낙 우직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존재감이 대중들에게 잘 각인이 안 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치만 윤용현 씨는 지난 해 〔제12회 대한민국 환경대상〕에서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하며 이 날 시상식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했다. 사실 이 분은 평소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묵묵히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용현 씨는 일찍부터 환경사랑의 선두에 서서 환경보호 실천도 해 왔다. 히말리야 아일랜드피크 환경원정대 대원을 기점으로 문화체육인 환경지킴이단 홍보대사를 맡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을 정도. 특히 그는 무의탁 어르신과 시설의 어린이 등을 방문해 식사봉사를 하는 '사랑의 밥차' 대표와 주방장을 맡아 사랑을 베풀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사비를 털어 소외받은 이웃들에게 매주 한 번 이상 온정을 선사하고 있다는데 정말 이미지 대반전이랄까. 이래서 사람은 대외적인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평소 잘 신경 못 쓰는 대내적인 내용도 잘 살펴봐야 하는 것 같다. 야쿠자가 있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다. 야쿠자가 없는 사회를 상상한다면 북한 등 독재 군사국가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따위도 야쿠자가 당당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깡패는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조선에 수출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의 조직 범죄 집단은 크게 나누면 이하 세 부류다.
일본처럼 와카가시라(若頭)가 있고, 직계가 있으며, 직참(直参)까지 두는 까다로운 족보는 없다. 두목이 죽으면 부두목이 자연스레
물려받는데일반 기업과 같다. 서열은 나이로 결정되는 싸움의 강도가 가미 된 정도. 일본처럼 자신의 연하가의 관계로 '부모'가 될 만한 일은
없다.일본처럼 뚜렷한 계보는 만들 수 없다고해도, 조직 간의 힘 관계와 학창 시절, 병역, 선후배 관계에서 거대 조직의 산하에 예속된 지방 조직이 많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지금도 유교적 예절이 사회 규범화 되어 있기 때문에 나이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유한다.한국에서 깡패는 '양아치 군집'이라는 의미로 그
전까지는 주먹을 사용하는 건달 집단을 나타내는 왈패라고 불렀다.그럼 한국판 야쿠자인 깡패가 등장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일본 통치 하의 1930~40년대. 경성(서울) 최대의 번화가인 명동에 하야시구미(林組)라는 일본의 야쿠자 조직이 진출했다. 메이지부터 쇼와에 걸쳐 우익의 원류로 불리는 민족주의자·도야마 미쓰루의 옹호를받은 주한 야쿠자 조직이다. 하야시는 일본 이름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실은 선우영빈이라는 재일 조선인이었다. 그와 관련된 유명인사가 바로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이다. 김두한은 젊은 왈패들을 정리해 깡패 예비군의 보스로 명동에 군림한 한국 조폭 사상 최대의 카리스마 리더였다. 당연히 김두한은 당시 경성의 패권을 두고 하야시와 대립한다. 김두한은 한국 유파의 결착을 지정하는 방법으로서 무기 없이 맨손으로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둬 하야시에게 그 협기(俠氣)를 인정 받았다. 이 때부터 하야시의 사제 격이 된 김두한은 경성 안의 얼굴이 되었다. 김두한은 이렇게 일제 통치하에서 첫 한국인 깡패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친위 활동을 실시했다. 또한 그 때 검은 교제에서 군과 일본 정부와의 인맥을 구축해낸다. 조선 독립 후 일본으로 철수한 하야시에게서 권리를 전부 양도 받은 김두한은 이후 최대 세력을 가진 대두목이 된다. 나중에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나서는 국회의원의 자리까지 오르는데 '한국판 하마코(ハマコ)'이다. 김두한은 사실 한국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깡패였다는 소문이 있다. 정치활동을 하기 전에는 운송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도요타라는 일본 이름 때문에 자칭 조폭 보스였다는 소문이 뿌리 깊을 정도다. 그러고보니이케다 다이사쿠도 재일조선인의 고리에서 암약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런데 김두한이 은퇴한 후 세력을 나눠 가진 두 사람의 우두머리가 있었다.우선 명동을 주무대로 삼고서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지닌 이성순(李聖淳)을 들 수 있다. 그 때가 「한국전쟁」이 휴전을 맞이한 1953년으로 서울 명동에서 이정재의 부하들 30여 명이 예고 없이 시라소니를 공격하는데서부터 시작됐다. 장권(掌拳)의 달인이었던 시라소니는 무적의 몸이어서 제대로 맞붙었다가는 격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시라소니는 중상 진단을 받게 된다. 이정재의 부하들은 회복한 시라소니의 보복이 두려워 다시 시라소니가 입원한 병원을 덮쳤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나 싶던 이승만 대통령도 1960년 4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들고 일어난 시민 혁명으로 하야해 하와이로 망명하고 만다. 이듬해 1961년의 군사 쿠데타로 원래
만주국 육군중위를 역임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으면서 비로소 이정재의 운명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시라소니는 깡패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기독교인으로 귀의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한국 깡패는 다시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은 일본의 재일 조선인 출신 깡패에 의해 전파되었다. 야마구치
구미(山口組)·살인의 군단도 떨게 만든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郎), 동성회(東聲會)의 마치이 히사스케(町井久之)였다. 이 시대에 한국 야쿠자가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한 무기가 있는데 일단 권총은 아니다. 권총은 「한국 전쟁」의 폐기품으로 오히려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인의 없는 싸움이 펼쳐지게 된다. 사실 한국 깡패가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한 것은 회칼이었다.일본에서는 모두가 총기를 취급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병역이 있기 때문에 그 의무가 끝나면 보통의 샐러리맨도 전문가 수준으로 총기를 다룰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권총 소지는 어렵다. 그래서 일본도의 흐름을 이어 받은 회칼이 중용된 것이다.1972 년 11월21일, 한국인 최초의 깡패 두목이며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죽었다. 향년 54세로 사인은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로 알려져 있지만 타살이라는 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이렇게 한국 깡패의 순결(?)을 상징하는 낭만파 협객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75년 서울 명동의 사보이 호텔에서 군인 출신의 깡패 신 소령을 3대 조직이 덮쳤다. 그 항쟁은 한국 조폭 역사상 가장 처참한 항쟁이었다. 당시 일본산 회칼은 신 소령의 다리 아킬레스 건을 갈라버린다! 절대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도 1979년에 측근 김재규 KCIA 부장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대적인 깡패 단속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군사 정권에 의해 약화 된 한국 깡패들 이었지만
현재도 잔존해 조직 숫자가 약 300개에 이를 정도다.
구성원 숫자는 공식적으로 약 7,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