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순사한
조선 전기의 여섯 명의 충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다. 이들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했고,
명 사신의 환송연 때 거사하기로 했으나 계획이 좌절되어서 김질 등의 밀고로 잡혀 고문을 받은 끝에 죽었다. Show 덧붙여서 사육신처럼 세조를 몰아내려고 하진 않았으나, 평생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들로 생육신이 있다. 사육신에는 김문기가 포함되기도 하여 논란이 있다. 1.2.사육신은 누구인가?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서 나이가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원래는 생육신 중 한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처형당한 70여 명이다.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명 중에서 주요 인물 6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본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선정한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 아래와 같은 인물을 수록하였다.
1.3.단종 복위운동과 그 실패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 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3][4]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 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 [5]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 연루 사실 [6]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 [7]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신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배경이 되는 기록이
남효온의 전기소설 육신전이므로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전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그나마도 왕이 직접 국문한건 첫 국문 정도로 이후로는 구치관이 국문한다. 실록은 기록 자체가 짧고 별게 없다. 기사 자체가
두어편 있는데다가, 사육신의 반항이 묵비권 정도에 그치는지라 의외로 순순히 다 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나마도 곤장을 치게 하면 다 분다. 거꾸로 말하면 그닥 불 것도 없었기도 했다. 아래는 신문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현대의 사육신의 이미지는 아래 소설 속 이미지가 거의 전부 다이다. 역사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없어서 소설속 등장인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실질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1.4.심문과정 ¶폭력적 요소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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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사형과 후일담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을 당한 후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아내와 함께 음독 자살하였다. 이후 유성원의 시신은 들이닥친 군사들에 의해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4명의 시신은 사형장인 새남터에 버려져 있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개박살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되게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 [10]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 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조카 하원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나갔다. 특히 박일산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로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위지는 세조와 친했던 관계로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 [11]은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훗날 하원은 하위지의 양자가 되어 대를 이어나갔는데 가령 성삼문의 경우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당해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공신의 한사람인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사육신은 절개를 지키다 죽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공신들에게 겁탈당했거나, 공신의 첩이 되거나 아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겁탈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그 중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봉석주의 첩이 되기를 자처한 것 등만 문제시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5.1.육신사(六臣祠)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4(구 묘리 640)에 있는 사당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초기에는 박팽년 후손에 의해 박팽년만 배향되었으나, 그의 현손 박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낙빈서원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다. 사우건물인 숭정사에는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숭절당, 외삼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1979년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한 육각기념비가
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용산역이나 문양역에서
성서2번을 타면 갈 수 있다. 하루 13회 운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편수는 많지만 성서2번이 모두 육신사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전면 LED에 하빈육신사 방면라고 적혀 있거나 행선판에 묘리 or 묘골 or 육신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잘 보고 타야 된다. 아니면 성서2번 항목에 있는 시간표를 참조하고 가는 것도 좋다. 낙빈서원의 경우 달성삼가헌 [13] 뒷편에 있는데 마을 입구에 버스가 있긴 있지만 하루에 2번 다니며 왜관북부정류장~문양역 구간을 운행하는 칠곡 20번 버스가 전부이며 그나마 환승도 안 되는 버스다. 차라리 성서2번을 타고 묘1리 정거장에서 내려 1.5km 정도 걷는게 낫다. 아니면 애초에 자가용을 이용하는게 가장 현실적이다. 1.6.1.역사성 논란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도 않고 연구도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 육신전의 영향이다. 그런데 이 육신전 문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굉장히 복합적을 진행되었다. 사림의 일파인 김종직, 김굉필, 남효온 등으로 이어지는 학파적 정당성 문제 [14], 왕권과 신권의 대립관계 [15],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통성의 문제 [16], 관련된 인사들이 소속된 가문의 지위 문제 [17] 등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육신전은 성리학적 명분론 관점에서 긍정되어서 조선후기를 풍미하였고 이 이데올로기는 민간까지 퍼져서 특정인물이 지은 소설이 야사처럼 전해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볼 때는 굉장히 조심해서 봐야 한다. 배경이 소설이고 이게 이미지화 된 경우에는 이들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느 작업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실제 생애는 '당에서 인정받은 천재가 국가적
한계에 의해서 좌절하게 되는' 최고운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임경업전 속의 조선후기 최대의 명장은 역사인물 임경업과는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다. 임진록에 등장하는 소설속 인물 사명당이 실제 조선승려 유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전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고저소설 운영전에서 묘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적 인물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육신전 속 안평대군과도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육신전 속 사육신은 어떨까 고민할 대목이다. 1.6.2.조선 전기의 미복권 ¶사육신은 단종과 마찬가지로 사육신의 난 이래 수백년간 신원이 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여겨졌다. 남효온의 육신전은 위에 언급된 심문과정 등이 모두 실려 있어서 사육신의 행장에 연결될 정도이나, 생육신으로 1454년생인 남효온은 성삼문이
죽은 1456년에는 겨우 3살이었으니 이를 직접 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전기문학으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런 책은 임금이 유학자들과 토론하는 경연에서 강의가 될 수가 없다. 헌데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연관 판서 박계현이 [18]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선조에게 남효온의 육신전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문제는 애초에 경연은 책 구절 하나 하나를 국왕과 경연관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이지 책 추천하는 자리가 아니다. 아무튼 선조는 책의 이름이 나왔으니 호기심을 느꼈는지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그 반응은 매우 격렬했다. 성삼문 등의 행적이 말도 안 된다고 깠다. # 주 내용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된 것이 말이 안되면 그 때 바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거나 자결을 하거나 했어야지 세조를 국왕으로 두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말도 안된다는 논리였다. [19] 이런 논리로 선조를 모욕하고 있으니 책을 찾아서 모조리 불사르고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까지 치죄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선조는 노산군(단종)묘에 망주석과 상석,표석 등을 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무조건 세조만을 옹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사육신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공이 들어서서 반대하는데, 이 때 논리가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 차이가 있다. 자세한 건 육신전 항목
참조. 1.6.3.사육신의 신원 ¶효종대에 노론의 핵심인사인
송준길이나 은퇴하는 판사 조경 등이 사육신의 충성을 기리려 했다. 효종은 이에 대해서 대신들과 의논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긴 하였으나 결국 실제로 배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추증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현종의 적자로 태자가 되어 순탄하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면에서는 탄탄하며 무엇보다 기반이 약한 후계자(경종)를 둔 숙종에겐 어리고 힘없는 단종의 충신으로 이미 여론이 조성된 사육신이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였다. [20] 1691년 숙종 주도로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사육신묘 아래 민절서원을 세워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숙종조가 되면 육신전이 사실상 정식 사서처럼 다뤄진다.) 김문기의 문중인 김녕 김씨는 이들보다 40년 뒤인 1731년에 복관되었다. 숙종 이전까지 노산군으로 불리던 단종도 노산대군을 거쳐 단종으로 신원되고 묘가 정비되었다. 1.6.4.사칠신, 박심문 ¶1804년, 순조대에 사육신이 사형당한 당시 질정관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박심문이 본래 사육신과 동지로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귀국 당시 사육신이 이미 사망한 사실을 알고 음독자살한 사실이 새로이 발견되어, '가선대부이조참판'을 추서하고 1828년에는 영월 창절사(현 창절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에도 철종 때인 1856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871년 고종이 '충정' 시호를 내리는 등 조선 시대에는 사육신의 동지로 인정받았지만 어쩐지 현대에 들어서서 인지도는 없다(후손 중에 권력자도 없고 드라마도 없어서 그런가…). 현재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에 배향되어 있다. 1.6.5.김문기의 포함 여부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결국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조판서이자 삼군도진무 김문기가 새롭게 헌창되었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헌창'하고, 사육신 묘에도 김문기의 자리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의 사칠신 문제가 된 것은 이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를 높이려는 생각에 학계에 압력을 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삼중신 항목에 김문기가 있었으므로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공로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탓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김문기의 경우 조선 정부에서도 인정할 만큼 사료 자체는 충분히 뒷받침되니,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니지만 사육신 항목에 들어가기에는 논란이
있다. 그래서 헌창이라는 방식으로 추가한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벌어졌는데, 사단법인 한국학 연구회가 아래의 합작드라마 사육신(드라마)의 상영회에서 김문기가 군 동원을 맡았고, 또 문초에 불복했음을 집어넣지 않은 왜곡드라마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아무튼 문중이 개입한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거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김문기의 사육신 포함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에 정리가 잘 되어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굉장히 길기 때문에 Ctrl+F의 사용을 추천한다. 2.남한과 북한의 전 합작 사극 ¶ KBS의 자본과 장비 등의 하드웨어와 조선중앙방송의 배우, 극본 등의 소프트웨어로 제작된 작품. 제작 의도는 사육신의 충절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남한에서는 KBS 2TV에서 방영되었고 북한에선 조선중앙방송에서 방영되었다 [21]. 기획부터 3년, 이후 총 제작기간 2년에 제작비 20억여원(210만 달러)이 소요되었다. 제작비의 3분의 2 가량은 발전차나 조명차 등의 현물로 지급되었다. 즉위식 묘사
등을 위해 1만여 명이 동원됐으며, 전투장면에서는 300여필의 말이 등장했다.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스케일의 드라마인 셈이다. 제작사가 북한 측이며 연출, 각본, 배우 등의 제작자들이 전부 북측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껍데기만 남북합작이지 내용물은 실질적으로 북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발연기가 없다고 하여 훌륭한 평가를 받지만, 엑스트라 배우들의 연기는 그와는 반대로 극악을 달린다.(…) 북한 드라마라 그런지 화면이 KBS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매우 다르며, 특히 한국에서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사라진 후시녹음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질감이 꽤 컸다는
반응. [JPG 그림 (Unknown)]
이런 때문에 시청률이 매우 부진하였다. 첫 화 시청률은 7.3%로 시작했지만 2화 시청률은 4.7%로 떨어졌다. 이후 시청률은 더 떨어져 애국가(3%)만도 못한 1.9% [22]를 기록하여 역대 최저 시청률 드라마 2위에 올랐다. [23]. # 콩라인. 오프닝. 여하간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에 KBS 연기대상 특별상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이게 북한 최초로 조선시대의 (림꺽정이나 민란 등을 다룬게 아닌) 정사를 다룬 TV 드라마이자
조선중앙TV가 만든 첫 사극이란 의미가 있다. # 제작비 문제로 유일한 사극이 될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아기씨" 등 그 전에는 북한 사극에서 나오지 않았던 남한 말투가 등장했다는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선 극단적으로 재미없는 사극이 북한에선 컬쳐 쇼크가 되는 셈. [JPG 그림 (Unknown)]
새터민들에게는 "저기 조맹원 [24]이다. 저 배우는 정말 명배우야.”, “막봉 [25]이도 나오더라, 여전히 막봉이 답다.”, “붉은 흙의 도위원장도 나왔어. [26]”, “배우들은 배급을 주는 모양이지, 전에 보다 얼굴이 보기 좋은 걸 보니.” 등의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3. 온라인게임 사육신 ¶홈페이지 깜놀닷컴이라는 곳에서 서비스 예정인 온라인 액션RPG게임. 12월 26일부터 클로즈 베타 테스트에 돌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