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대 한반도 - samgugji sidae hanbando

삼국지 시대 한반도 - samgugji sidae hanbando
조선판 '삼국지'(사진=인민화보 제공)

서진(西晉)시대 사학자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 경전이다. 220년에서 280년까지 삼국 시기의 위(魏), 촉(蜀), 오(吳)의 역사를 기록한, 유가에서 추앙하는 사학 경전 중 하나다. 고증에 따르면 6-7세기 '삼국지'가 조선반도(한반도)에 전해졌고 이때부터 조선반도의 통치자들은 중국 삼국 시기의 역사 문화를 잘 알게 됐다.

'고려사'에 따르면 북송 철종 황제가 고려에 진귀한 서적이 많다는 말을 듣고 목록을 작성하고 구했다고 한다. 목록 중에는 '제갈량집(諸葛亮集)' 24권도 있다.

이로써 당시 고려 통치계층이 삼국의 역사와 문화를 중요시했을 뿐 아니라 송나라 시기의 절판된 고서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문신 윤소종은 공민왕에게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등장하는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親賢臣, 遠小人)'는 말을 인용해 간언했다.

그는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군주가 총애하는 사람의 좋고 나쁨에 달려있다고 봤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립됐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 왕실은 중국 역사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를 교훈으로 삼았고 '삼국지'의 역사적, 정치적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개국 원년 공조전서 이민도가 조선 태조에게 올린 상서에서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는 구절을 다시 한 번 인용해 태조에게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고 정무에 힘쓰며 백성을 사랑하도록 권했다.

1400년 조선 정종은 경연(제왕에게 역사를 강론하기 위해 특별히 설치된 어전 강의)에서 '삼국지·제갈량전'에 등장하는 '순명책실(循名責實)'이라는 말을 놓고 여러 대신들과 심도있게 토론하고 국가 관리는 실사구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1413년 조선 태종은 왕실에서 보기 위해 명나라 사신으로 간 진준에게 '삼국지' 등 역사서를 구입해 돌아오도록 했다. 1422년 조선 세종은 금천부원군 박은에게 내린 제문에서 "박은은 제갈량 같은 어진 신하다"라고 칭찬했다. 이로써 조선 통치자들이 '삼국지'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예종은 '이동잡어(異同雜語)'에 기록된 동한 말기의 명사 허소(許劭)가 삼국 위나라 건국의 기초를 다진 조조(曹操)에 대해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평화로울 때는 유능한 신하,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라고 평가한 것을 토론 제목으로 삼고 문인과 유생들에게 시를 지어 대결하도록 했다. 이후 조선왕조는 삼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책론과 과거의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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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 '삼국지' 조선 번역본(사진=인민화보 제공)

이후 명나라 소설가 나관중이 쓴 '삼국연의(三國演義)'가 유입되면서 조선반도에 다시 한 번 '삼국 붐'이 불었다. 또한 '삼국지'는 조선왕조가 중국 등 한자문화권 국가와 소통과 교류를 하는데 중요한 외교 도구로 사용됐다. 1634년 후금 대신 정명수(鄭命壽)는 조선 사신에게 몰래 서신을 보내 '삼국지' 등 서적을 구해달라고 했다. 1672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은 역관에게 ''삼국지'를 잘 이해한 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1676년 숙종은 '삼국지'를 잘 이해한 관리 류승원에게 청나라 사신 접대를 맡겼다. 1683년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조선 역관은 만주어를 몰라 매우 불편해 청나라에서 만주어로 된 서적과 번역본을 대량 구입했다. 이 가운데 '삼국지' 만주어 사본도 10권도 있었다.

지금도 한국인은 '삼국지'로 대표되는 중국 삼국의 역사와 문화를 좋아하고 '삼국지' 관련 영화와 드라마, 게임 등 문화상품도 인기를 얻고 있다.

※본 기사는 중국 인민화보사에서 제공했습니다.

이 시각 주요뉴스

    <삼국지三國志>. 중국 삼국시대에 나타난 위, 촉, 오 세 나라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의 이름이다.

    우리에게는 이를 번안한 고전 소설 <삼국지연의>가 예로부터 인기를 끌며 잘 알려져왔다. 당장 정확한 줄거리는 몰라도 삼고초려, 도원결의, 계륵, 괄목상대, 파죽지세 등의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등 유명한 등장인물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두 시간에 걸쳐 <삼국지>와 우리 역사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볼텐데, 소설 <삼국지연의>와 우리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으로 넘기도록 하자. 오늘은 우선 서진의 학자, 진수가 편찬한 '정사 역사서' <삼국지>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삼국지 시대 한반도 - samgugji sidae hanbando

    조선시대의 정사 <삼국지> 판본. (출처: e뮤지엄)

    <삼국지>의 구성 중 《위서》 <동이전>은 우리들에게 정말 귀중한 사서가 아닐 수 없다. 눈물 날 만큼 부족한 한국 고대사 사료들 중 사마천의 <사기>를 제외한다면(위만조선의 멸망사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나머지 부분은 다소 부실함) 가장 오래되고 실제 한반도 역사와 가장 근접한 시대에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도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백제, 신라, 가야 등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들의 정치사와 문화를 담으며 상당히 충실하다. 물론 중국인의 관점에서 한번 거쳐서 쓰였기에 객관적이지 못하고, 아무래도 바다 건너 정보인지라 불확실한 정보가 많다는 점에서 한계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삼국지>가 다루는 연대는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진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280년까지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의 100년에 이르는 긴 시간인데, 사실 184년으로부터 50년이 지난 234년에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사망하기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삼국지>의 내용은 그 반타작밖에 안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100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우선 백제에 조명을 비춰보자. 이럴 때에는 대개 고구려를 가장 먼저 다루지만 고구려의 역사가 가장 <삼국지>의 배경과 연관성이 깊기에 마지막으로 보류해두도록 하겠다.

    이 시기 백제의 임금은 5대 초고왕부터 8대 고이왕까지 재위했다. 초고왕은 백제가 자리잡도록 한 사실상의 시조라고 추측되는 인물이고, 그 사이의 구수왕과 사반왕은 별 존재감이 없다. 그러나 사반왕을 내쫓고 즉위한 고이왕?~286, 재위 234~286은 율령 반포, 6좌평 제도 정비, 공복 제도 시행, 한강 유역 지배권 확보 등등 여러 업적을 남기며 백제의 기틀을 다진 임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출생 신분과 과연 그가 정말로 이 모든 업적을 남겼는가? 하는 의혹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신라와 가야는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이 두 나라는 일찍이 나라의 기틀을 다진 고구려, 백제와 달리 아직도 진한과 변한에 소속된 소국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 체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신라의 경우에는 세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차지했고, 가야의 경우에는 6개 이상의 나라들이 일종의 연합체를 이룬 형식의 국가로 유지되었다.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삼국지>의 배경 시간대 동안 신라에서는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3대 미추 이사금까지 재위했다. 별다른 큰 사건은 없었지만, 석우로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주변의 진한 소속 소국들을 정복하며 신라의 몸뚱아리를 키워나갔다고 한다.

    가야, 그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하던 금관가야에서는 초대 수로왕부터 3대 마품왕까지 걸쳐 있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의 초기 왕계보가 불확실하다고 공인받은 상황이기에 이를 신뢰하기는 어렵다.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정리하자면 백제는 기틀을 다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신라와 가야는 아직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중국 영토와 인접하지 않아 그다지 연관이랄 것이 없었던 백제, 신라, 가야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시기 고구려에서는 진대법과 장자상속제를 마련한 9대 고국천왕, 왕위 계승이 험난했던 10대 산상왕,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을 거쳐 13대 서천왕까지 재위하고 있었다. 이들 중 삼국시대의 중국 왕조와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한 인물은 다름아닌 동천왕209~248, 재위 227~248이었다.

    이 당시 중국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위, 촉, 오 삼국이 정립된 와중에 위나라에서는 어린 황제 조방(조조의 손자인 조예의 양자) 대신 실권자 조상이, 촉나라에서는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재상들이 유선(유비의 아들)에게 권력을 위임받아서, 오나라에서는 슬슬 노망이 들기 시작한 손권이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이 떠나고 정치 싸움이 주가 되던 시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한편 중국 왕조들 입장에선 동쪽 변방인 요동에서는 공손씨가 대대로 점거하며 지방 정권을 세워둔 상황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에게로 돌아간다. 손권은 끊임없이 위협해오는 북쪽의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요동의 공손씨 정권에 동맹을 제안했다. 그런데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연?~238은 어떤 판단에서인지 오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목 베고 동맹을 거절해버렸다. 이에 고구려의 임금, 동천왕은 살아남은 오나라의 사신 몇몇을 받아들였고, 종래에는 오나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게 된다.

    몇 년 뒤인 234년, 오나라에게 든든한 인물이었을 동천왕은 공손씨를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겨 오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기에 이르렀다. 손권은 안습하게도 두 번이나 통수를 맞은 셈이지만(...), 위나라는 4년 뒤 공손씨 정권을 공격해 그들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라고 했다. 바로 앞의 공손씨 정권이 사라지자 고구려는 위나라와 국경을 맞댄 셈이 되었다. 안 그래도 땅이 비옥하고 중요한 요충지가 될 요동반도를 노리고 있던 동천왕은 먼저 위나라에게 선빵을 가하는 전략을 택했다. 242년 요동의 서안평 지역을 먼저 공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위나라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되고 말았다.

    삼국지 시대 한반도 - samgugji sidae hanbando

    동천왕 11년명 벽비. 고구려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위 여부가 확실치는 않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246년(동천왕 20), 전쟁의 서막이 밝았다.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검?~255이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었다.

    동천왕은 보병+기병으로 이루어진 2만여 명의 병력으로 위군을 맞았다. 그들이 만난 곳은 비류수 강가, 압록강의 한 지류로 고구려의 발상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동천왕은 비류수 강가와 양맥 골짜기에서 각각 적병 3천여 명을 사살해 총 6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동천왕은 5천 철갑기병대를 이끌고 위군의 본진을 공격했지만, 관구검이 친 방진에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1만 8천여 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말았다. 이 전투가 비류수 전투인데, 그 피해가 어마어마해 전시 수도인 환도성까지 잃고 동천왕이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밀우의 분전과 유우의 계책으로 위군의 적장을 죽이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고작 1천 명의 군사만 남아 남옥저로 도주한 씁쓸한 패배였다.

    다행히도 이후 전세를 가다듬은 동천왕의 반격 시도가 성공했다. 환도성에 주둔해 있던 현도 태수 왕기를 죽이고 환도성을 되찾은 것이었다. 비록 환도성이 폐허가 되어 임시 도읍 평양성(장수왕이 천도하는 그 장안성은 아닌 것으로 보임)으로 천도해야 했지만, 망국의 위기에서 고구려를 되살린 동천왕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그 후일담이라면 관구검은 추후 문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가 반란 진압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동천왕은 죽을 때까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 아들인 중천왕은 13년 뒤인 259년, 양맥 전투에서 위나라 장수 울지해를 죽이고 8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면서 아버지의 원혼을 갚았다.

    이후 삼국 통일이 될 때까지 고구려와 중국 왕조의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큰 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른 나라들은 중국의 <삼국지>와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고구려만은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와 관련 깊은 전쟁을 이끌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왜인지 오늘 글은 정사 삼국지와 한국사의 연관성보다는 고구려와 위나라의 격돌이 더욱 큰 주제가 되었던 것 같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