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마피아 패밀리 - itallia mapia paemilli

이탈리아 마피아 패밀리 - itallia mapia paemilli

▲ 지난해 1월 시작된 이탈리아 마피아 은드랑게타 조직원 재판에 앞서 중무장한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이탈리아 폭력조직원이 7년을 숨어 지내다 유튜브에 요리 실력을 뽐내는 동영상을 올리는 바람에 체포됐다.

은드랑게타 조직원이었던 마르크 페렝 클로드 비아르트(53)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달아나 보카치카란 조용한 마을에 숨어 있었는데 지난 24일(이하 현지시간) 검거됐다고 영국 BBC가 29일 전했다. 그는 요리 동영상을 촬영하며 얼굴이 나오지 않게 하는 꼼꼼함을 과시했지만 경찰이 그의 몸에 있는 문신을 알아보는 바람에 덜미가 잡혀 곧 이탈리아로 송환될 계획이다.

그는 2014년 은드랑게타 차치올라 패밀리의 중간 두목이었는데 네덜란드로 코카인을 불법 반입한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고 달아났다. 은드랑게타는 유럽에 들어오는 코카인의 대부분을 통제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위력적인 범죄조직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칼라브리아주를 주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데 장화 모양인 이탈리아 영토 가운데 ‘발 부리’에 해당한다.

차치올라 패밀리의 보스는 루이기 만쿠소(66)로 별명 ‘삼촌’으로 유명하며, 다른 조직원들도 하나같이 ‘늑대’, ‘뚱보’, ‘블론디(금발)’ 등 별명으로 통한다. 이들은 지난 1월 시작돼 2년을 끌 것으로 예상되는 재판을 받고 있다. 30여년 만에 최대 규모의 마피아 재판이다. 일년 동안 대대적인 수사 끝에 기소된 조직원과 뇌물 먹은 공무원 숫자만 355명에 이르러 인정 신문 과정에 피고인 이름만 열거하는 데 3시간 이상 걸렸다고 AFP 통신이 보도한 적이 있다. 살인, 마약 거래, 고문, 돈세탁 등의 혐의이며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사람만 900명이 넘는다.

할리우드 영화 ‘올 더 머니’는 미국의 석유재벌이자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인 진 폴 게티가 손자가 납치돼 몸값을 요구했는데 돈을 내지 않아 귀가 잘리지만 끄떡도 하지 않아 기어이 몸값을 깎는 내용을 다룬다. 이 손자를 납치한 조직이 바로 은드랑게타였다. 손자가 아들 내외(특히 며느리)와 짜고 자작극을 벌인다고 오해한 탓도 있지만 집에 유료 공중전화기를 설치해 손님에게 쓰라고 할 정도로 구두쇠였기 때문이었다. 또 워낙 이 조직이 1970년대 납치를 일삼아 쉽게 돈을 건네면 다른 사람들도 유괴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게티이미지 것인데, 맞다, 그가 소유한 회사다.

칼라브리아의 동굴에 갇혀있다 5개월 만에 풀려난 손자는 술과 마약에 빠졌다가 마약 과용으로 폐인이 돼 2014년 54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인색하게 살았던 할아버지는 1976년 영국 서리주의 작은 집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캘리포니아주 대저택을 게티미술관으로 기증하며 당시 미술관 중 가장 많은 기부금을 물려줬다.

원래 이탈리아 범죄조직은 나폴리에 기반을 둔 카모라(고모라), 바리를 근거지로 한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삼은 마피아(코사 노스트라), 칼라브리아에 기반을 둔 은드랑게타로 분류된다. 강한 규율로 세력을 확장해 시칠리아 마피아를 제친 것은 오래 전이며 최근에는 카모라보다 더 활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말리아에 쓰레기를 불법 투기하고 2017년 제노바의 모란디 다리가 붕괴된 것도 이들 기업의 부실 공사 탓이란 얘기가 있을 정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6월 이들 조직원을 모두 파문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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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미국 마피아 두목들이 기념 촬영한 사진. 아일랜드·이스라엘 갱들에 치이다 밀주 제조·유통으로 암흑가를 석권하기 시작하던 때다.[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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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주를 방문한 교황. 그는 이곳에서 마피아 조직을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카스트로빌라리 AP=뉴시스]

전 세계가 월드컵으로 들썩이던 지난달 21일, 장화 모양의 앞굽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주의 한 마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3대 마피아 중 하나인 엔드랑게타의 본거지다. 교황은 작심한 듯 “마피아처럼 악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신과 교감하지 않는다”며 “마피아 단원들은 파문됐다”고 선언했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마피아를 파문한 건 초유의 일이다. 199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칠리아에서 “교회가 마피아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후 가장 강도 높은 비판으로 꼽힌다.

자본주의 폐해 등 인류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날 선 비판을 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마피아는 20세기를 지나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탈리아 3대 마피아(엔드랑게타·코사노스트라·카모라)가 마약 밀매, 고리대금업 등으로 지난해 벌어들인 돈은 약 161조원에 달한다. 애플이 올린 매출(약 174조원)에 버금가는 돈이다.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8%를 차지한다.

기존 마피아뿐만 아니라 그들이 심어놓은 조직범죄의 씨앗들이 만개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이스라엘 마피아, 아일랜드 마피아, 알바니아 마피아, 인도 마피아, 그리스 마피아 등 ‘마피아’는 폭력조직의 대명사가 됐다.

마피아(Mafia)는 ‘아름다움’이나 ‘자랑’을 뜻하는 시칠리아 말로 사라센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1282년 프랑스에 대항한 시칠리아 기사들의 구호 ‘프랑스인들의 죽음을 이탈리아는 열망한다(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의 이니셜이란 설도 있으나 마피아의 정통성을 포장하기 위한 주장을 이후 드라마 등에서 끌어다 썼다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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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직계와 뉴욕 토착 마피아 간 카스텔라마레세 전쟁(1930~31) 후 미 동부는 찰스 루치아노(가장 왼쪽)가, 시카고는 알 카포네(가운데)가 장악했다. 이후 이탈리아 정부의 대대적 소탕전으로 43년간 도피 중이던 ‘두목 중의 두목’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가장 오른쪽)가 2006년 체포됐다.[중앙포토]

마피아의 기원은 19세기 시칠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부분이 농경지였던 이곳은 부재지주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가벨로티’란 마름들이 득세했다. 소작농을 착취해 부를 쌓고 폭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장악했다. 이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서나 보복에 대비해 사병 조직을 키웠는데, 이것이 마피아의 기원이란 것이 정설이다.

마피아란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 기록된 건 1865년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불법 장물아비 공판 기록에서다. 점차 마피아는 시칠리아의 토착 권력으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고문하며 마피아의 씨를 말리려 했다. 상당수 조직원들은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고, 이는 마피아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마피아의 구세주는 미국이었다. 그들은 미군과 비밀조약을 맺어 시칠리아 진공을 도왔다. 이후 조직을 총동원해 미 군정의 손발 노릇을 했다. 그 결과 상당 부분의 지역 권력을 나눠 받았고 연합군의 잉여물자를 착복해 전쟁 전보다 더 큰 부를 축적한다.

한편 바다 건너 미국에선 20세기 초까지 100만여 명의 시칠리아 주민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우리의 것’이란 뜻)’라 불리는 시칠리아 전통의 마피아 조직을 형성했다. 당시 미국의 암흑가는 유대계·아일랜드계가 주름잡고 있었다. 전세가 뒤집힌 계기는 금주법(1920~33)이었다. 마피아는 발 빠르게 밀주 제조와 유통이란 거대 시장을 장악해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며 조직을 눈덩이처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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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마피아는 독재 정권과 결탁해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마피아와 전쟁을 벌이던 조반니 팔코네 치안판사를 자동차 폭발로 살해하기도 했다.[중앙포토]

이 시기 미국을 양분한 두 명의 마피아 두목이 있었다. 뉴욕의 찰스 ‘러키(lucky)’ 루치아노와 시카고의 ‘스카페이스(scarface)’ 알 카포네였다. 루치아노는 30, 31년 이른바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을 통해 경쟁 조직과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두목을 잇따라 제거하고 뉴욕을 통일했다. 이후 이탈리아 순혈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선진적인 기업형 범죄 조직을 건설했다. 뉴욕 마피아를 5대 패밀리(감비노·제노비스·콜롬보·보난노·루케스)로 정리한 것도 루치아노였다. 그는 30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46년 풀려나 이탈리아로 추방됐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마피아가 미군에 협조토록 중재한 대가라는 설이 파다했다.

카포네는 일찌감치 밀주업에 뛰어들어 27년 한 해에만 1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29년 경쟁 조직인 벅스 모런 갱단 간부 7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밸런타인데이 학살’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그가 감옥에 가게 된 혐의는 어이없게도 탈세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부흥기를 거치며 마피아는 쿠바에서 전국위원회를 열고 그곳을 새로운 시장으로 키우려 하는 등 더욱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당시 미국 내 26개 도시에 코사 노스트라 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57년 뉴욕주 어팰러친에서 열린 두목들의 회합이 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된 후 조직의 거대한 실체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는 연방수사국(FBI)의 마피아 소탕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마피아가 조직과 범죄를 은밀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메르타(omerta)’란 묵계 규칙 덕분이었다. 불법 행위에 대해 조직원은 물론 목격자 등 관련자 모두에게 당국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피의자는 거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60년대 중반부터 수사 당국은 감시와 도청, 세무사찰, 수사관 잠입 등을 통해 조직원들을 속속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수십 년 형량을 매기겠다는 협박과 증인보호법이란 회유책을 통해 오메르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각 조직의 두목들은 자신의 부하나 경쟁 조직 두목의 증언에 의해 하나씩 감옥으로 향하며 미국의 코사 노스트라는 자멸의 길을 걸었다. 현재 조직은 뉴욕과 시카고 일대로 위축됐고, 중국 출신 삼합회나 러시아 마피아 등에 암흑가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반면 이탈리아 마피아는 꾸준히 세력을 키워갔다. 전후 집권 기독교민주당과 손잡아 노조와 공산당 탄압에 앞장섰고, 선거 때 표를 몰아주는 대신 특혜를 얻었다. 건설 붐을 타고 건축 허가를 독점했고 일부는 공직에 진출했다. 60년대엔 이란·아프가니스탄에서 마약을 제조해 미국으로 밀수출해 뉴욕 마약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검사와 경찰관, 기자 등을 본보기로 살해하는 등 70년대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커져갔다. 마침내 이탈리아 의회는 80년대 말 반마피아법을 제정했다. 이후 조반니 팔코네 치안판사의 기소로 87년 두목급 19명에게 종신형을 비롯해 338명에게 유죄 선고가 내려졌다. 마피아는 92년 팔코네와 그의 후임 파올로 보셀리노를 잇따라 암살하며 맞섰고, 정부는 군대를 시칠리아로 보내 마피아 소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2006년엔 두목 중의 두목으로 불리던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와 두목급 24명이 체포됐고 이후로도 마피아 소탕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2010년에도 고속도로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바주카포까지 동원하는 등 이탈리아에서 마피아의 위세는 여전하다.

이충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