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4~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 임나일본부(일본어: 任那日本府 미마나니혼후[*])를 세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는 폐기된 학설이다. 흔히 근거로 들어지는 사료로는 크게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히고 있다.[1] 다만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2] 관련 사료[편집]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비판[편집]
현대의 학설[편집]임나일본부설 및 관련 사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이들 학설 가운데 몇 가지를 뽑아 보면,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참고 문헌 및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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