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김정은 - geugeo eotteohge haneungeonde gimjeong-eun

  • 로라 비커
  • BBC 뉴스, 서울

2021년 12월 17일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김정은 - geugeo eotteohge haneungeonde gimjeong-eun

북한에서 검증되지 않았던 당시 27세 지도자가 집권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이만큼 헤드라인을 많이 장식한 지도자는 없었다. 김정은 치하에서 살아가는 건 어떤 것일까?

10년 전, 통곡 소리가 평양 거리를 가득 메웠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절망감에 가슴을 움켜쥐고 통곡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엄격하게 통제된 북한 관영 매체는 그들의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2011년 12월 19일이었다.

전 세계 한반도 분석가들이 한 남자에 주목했다.

바로 김정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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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27세이던 김정은은 소위 후계자였다. 그러나 그가 뭐든지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와 경험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이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많은 이들이 군사 쿠데타 또는 북한 엘리트로의 권력 이양을 예상했다. 그러나 세상은 젊은 독재자를 과소평가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입지도 다졌을 뿐 아니라 '김정은주의(Kim Jong-unism)'라는 새 시대를 열었다.

그는 라이벌 숙청과 수백 건의 처형으로 시작해 외교에 관심을 돌렸다. 4번의 핵실험, 100번의 탄도미사일 발사,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으로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계속된 핵무기 개발에는 대가가 따랐다. 북한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으며 집권 당시보다 더 가난하고 고립돼 있다.

김정은 통치 아래서 산다는 건 어땠을까? BBC는 북한 전 고위 외교관을 포함해 탈북자 10명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김정은의 10년을 돌아봤다.

새로운 시작

김금혁 군은 김정일이 죽던 날, 총살당할 만한 일을 했다. 파티를 연 것이다.

"그건 너무 위험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당시 매우 행복했습니다."

스키와 농구를 좋아하는 젊은 새 지도자의 존재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다.

그는 김정은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했다.

"김정은은 유럽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 같은 사고방식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김 군은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당시 베이징에서 유학 중이었다. 북한에서는 소수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번영하는 세계에 눈을 뜨게 했다. 그는 고국에 대한 뉴스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서양 사람들이 북한의 모습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어요. 제 머리는 볼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제 마음은 더 보기를 원했어요."

북한 주민 2500만 명은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기에 대부분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 세계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도자가 독특한 재능이 있는 신성한 존재라고 배운다.

김 군에게 김정은의 권력 승계는 부족했던 것을 채워주는 사건이었다.

그건 희망이었다.

의심하는 사람들

하지만 회의적인 사람도 있었다.

평양의 권력층에서는 김정은이 통치하기에 부적합한, 그저 '특권층 어린이'라는 말이 돌았다.

류현우 전 쿠웨이트 북한대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동료들이 권력승계에 분개했다고 말했다.

"첫 반응은 '어휴, 또 세습한다고?'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세습에 지쳐가고 있었어요. 특히 엘리트들은 뭔가 새롭고 참신한 것을 원했는데, '다른 게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 일가는 1948년 북한이 창건된 이래로 북한을 통치해 왔다. 북한 주민들은 혈통이 신성하다고 배운다. 왕조를 정당화하는 방법이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히 가장 소중한 사람을 섬길 수 있지 않겠냐?'"

"27세가 국가 통치 관련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말도 안 돼요."

약속

2012년 연설에서, 새 지도자는 북한 주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1990년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치명적인 기근에 시달렸던 나라였다. 새 지도자는 식량 부족과 고통을 끝내길 원하는 듯 보였다. 엄청난 순간이었다.

외교부 관리들은 국제 투자를 촉진하라는 명을 받았다. 북한 내부에서도 변화가 감지됐다.

동해안 지방에서 운전사로 일했던 유성주는 슈퍼마켓에 새로운 물건들을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놀랍고 자랑스럽게도 북한산 식품은 맛, 포장, 공급 면에서 사실 중국산보다 나았습니다. 실로 자신감이 상승했지요."

숙청

인민에 대한 호의는 그가 위협으로 여겼던 대상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삼촌인 장성택에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평양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중국 국경 근처에서 무역업자로 일하던 최나래 씨는 장성택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중국과의 국경이 개방되고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회상했다.

"장성택이 집권에 성공했다면 북한에 많은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기대는 있었습니다."

이런 루머는 없어져야 했다. 장성택은 '인간쓰레기', '개보다 더 나쁜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 뒤 '당의 일원적 영도'를 훼손한 혐의로 처형됐다.

젊은 지도자는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통제권 장악

수십 명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달아났고, 숙청을 피하려고 한국으로 탈북했다. 김정은은 더 이상의 탈북을 막고자 애썼다. 국경 경비가 예전과는 달리 강화됐다. 땅 밑에서부터 철조망이 높게 쳐졌다.

하진우 씨는 브로커로 일하며 100명 정도를 탈북시켰다.

"이 나라는 별도의 국경 보안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은 누구든 쏴 죽이라고 지시받으며, (누구를 죽이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아주 무서웠지만, 사명감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북한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거든요. 왜 나는 권리도 자유도 없는 동물처럼 살기 위해 태어났을까? 저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제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표적이 됐고 도망쳐야 했다.

어머니는 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그곳에서 겪은 잔인한 처사로 인해 어머니는 사지가 마비됐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하 씨는 여전히 이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인기남

반대자들과 탈북자들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접근하기 쉽고, 더 현대적이고, 더 친근하게 보이려고 했다.

그는 젊은 여성 리설주와 결혼했다.

이들이 여러 마을을 방문 지도한 자리에서 포옹하고 손을 흔들며 웃는 그의 모습이 사진으로 공개됐다. 롤러코스터 타기, 스키 타기,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도 있었다.

김정은 부부는 화장품 공장을 견학하는 자리에서 명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는 현대적인 모습이 금기 사안이다.

윤미소 씨는 밀반입된 한국 DVD에서 본 유행을 따라 하고 싶었다.

귀걸이, 목걸이, 청바지도 너무 착용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은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아 붙잡혀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내가 울 때까지 비난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윤 씨에게 "너는 타락했는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냐"고 비난했다.

현향 씨는 김정은의 아내처럼 가수였다.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노래만 부를 수 있었다. 이를 거스르려 하다가 그는 결국 처벌을 받았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예술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북한 음악에는 규제와 제약이 너무 심해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정부는 외국의 영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합니다. 이러한 엄격한 규제는 그들이 자기 정권에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최근 인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최소 7명이 한국 케이팝 비디오를 보거나 배포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김정은 외국의 영향을 "악성 암"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문제는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째깍째깍, 펑!'

북한의 탄도 미사일 실험은 세계적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의도한 만큼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진 못했다.

한 탈북자는 "사람들은 아직도 인민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 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탈북자는 "우리는 승리한 걸로 보지 않았다"라며 "우리는 '와, 저들은 실험에 돈을 많이 썼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돈은 모두 거기에 쓰인다'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2016년쯤 외교부에서 류 대사에게 새로운 지시가 떨어진다.

더 이상 사업에만 초점이 맞춰지진 않았다.

"우리는 북한에 핵무기가 필요한 이유와 목적,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은 국제사회에서 이 생각이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로켓맨의 큰 도박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에 커지던 위협은 궁극의 외교 쇼로 끝이 났다.

서구 언론이 '버릇없는 뚱뚱한 아기'로 자주 희화화된 독재자 김정은은 미국 대통령과 한 무대에서 자신 있게 걸었다.

북한 매체들도 1면에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악수를 한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사진에 놀라긴 했지만, 막상 평양의 주요 도시 외곽 마을들의 반응은 조용했다.

최나래 씨는 "우리는 그 의미를 분석할 능력이 없었어요. 그 만남이 어떤 개선을 가져올지, 다른 것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요"라고 했다.

제대로 된 합의는 없었다.

류 전 대사는 모든 것이 제재 완화를 얻어내려고 쇼를 한 것이라 생각한다.

"북한은 이 무기들을 체제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위기

더 어려운 상황이 찾아온다.

2020년 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중국을 강타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국경을 폐쇄했다. 사람 통행 뿐 아니라 무역 길도 막았다.

단둥의 주요 진입점에 쌓인 식량과 필수 약품은 통과가 불가했다. 북한 무역의 80% 이상은 중국과의 교역이다.

북한에서 운전 일을 하던 주성 씨는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국경 근처에서 어머니와 힘들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경제가 위축되고 물가가 올랐어요. 살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지요. 부모님은 식량을 구하는 것 같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요. 스트레스가 많고요. 상황이 심각한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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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굶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정은 이를 '중대한 위기'라고 표현하며 연설에서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북한 지도자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북한에서 전직 의사였던 김성희 씨는 약 대부분을 암시장에서 사야 했다고 회상했다.

수술실에는 정기적으로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며, 외과 의사는 장갑이 없어 맨손으로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한반도의 두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를 봤다"며 "북한에서도 환자와 의사 모두의 인권이 보장되는 미래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은 전염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코로나19로 인한 공중 보건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

자국민들에게 상당한 해를 끼치지 않고는 스스로 자초한 현재의 고립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김씨 일가에 대한 숭배

인터뷰한 탈북자 중 일부는 북한의 현 상황에 대해 감정이 격해져 쿠데타를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미하더라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김씨 일가에 대한 숭배는 널리 퍼져 있고 매우 안정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정권 붕괴에 대한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북한은 70년 넘게 세계와 단절된 채 이어져 왔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은 북한이 국경을 개방하고, 주민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허락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가족과의 재회를 꿈꿨다.

이들은 이제 자유롭게 목소리를 높이고 김정은 치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가수 현항은 "나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려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라며 "북한에 남겨진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것을 가슴에 묻어두어야 한다"고 했다.

집권 10주년을 맞은 김정은은 위기의 국가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새로운 핵무기 수십 개가 있지만 그의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

사진 설명,

BBC 인터뷰에 응해 준 탈북자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직후 서울 한복판에는 거대한 포스터가 붙었던 적이 있다.

K-팝에서 유행이 된 손가락 하트를 김정은이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그 당시 나는 김정은이 그 손을 이용해서 국민의 행로를 바꿀 수 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힘이 있다.

하지만 지금도 25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세상과 고립된 채 살고 있다.

기사에 나오는 취재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북한을 떠나 현재 한국과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가족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일러스트: 게리 플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