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엑스트라 완결 - soseol sog egseuteula wang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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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연재 가다가 후반부~엔딩 무너지는 작품이 널리고 널렸습니다만, 최근 용두사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웹소설은 소엑입니다. 문피아와 카카페를 통틀어 아직도 큐브를 넘어서는 아카데미물이 안 나왔다는 평가를 듣는 초중반과, 플롯 다 무너지고 떡밥의 수습은 저 멀리 가버린데다 캐붕까지 보이는 엔딩은 도저히 같은 작가의 한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본편 완결되고 한동안 관심 끊고 살다가 웹툰 망한 게 이슈가 된 무렵에 듣자하니 그동안 나온 줄도 몰랐던 외전이 진엔딩 소리를 듣고 있더군요. 솔직히 선뜻 안 믿겼습니다. 그 엔딩 뒷이야기가 좋다고? 진짜로? 조회수도 얼마 안 되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해서 속는 셈치고 한번 봤습니다.


와, 이게 되네.


참 신기하기도 하고 뜻밖이기도 해서 언젠가 리뷰를 써봐야지 하다가 미루고 미룬 끝에 오늘에야 올립니다.




외전은 3편으로, 큐브 3 히로인들에게 하나씩 분배되어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몽중화(레이첼/총 45화) : 본편 중반 이후 존재감이 사라졌던 레이첼을 히로인 레이스 트랙에 되돌려놓는 이야기.

채나윤(채나윤/총 40화) : 큐브 1학년으로 돌아간 회귀자 채나윤의 김하진 공략기.

만약의 이야기(유연하/총 16화) : 유연하가 채나윤 뺨때리고 김하진을 캐치하는 if 세계선.


몽중화와 채나윤은 본편 엔딩으로부터 쭉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대장이 이겼다 하나만 알고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본편부터 순서대로 전부 읽어야 극대화되는 순간순간들이 있지만 진행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채나윤과 만약의 이야기는 제 리뷰 같은 것보다도 먼저 원본을 직접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요즘 당 떨어져서 달달한 게 당긴다 싶으시면 고민 않으셔도 됩니다.


몽중화는, 개인적으로는 꽤 인상깊게 읽었지만 여러분들께 추천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이 외전들이 왜 반갑고, 어디가 좋고, 어떤 면에서 아쉽거나 아리송한지 살피려면 우선 본편이 히로인 레이스 측면에서 어떻게 흥했고 어떻게 망했는가를 되짚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견 가득한 글입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하는 놈도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인물 조형


큐브 3 히로인의 구도는 채나윤과 레이첼을 양극으로 삼으면서 유연하를 중간점이자 제 3의 꼭짓점으로 확립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채나윤과 레이첼은 단순한 성격부터 구원과 성장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거울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 채나윤의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사와 기호에 쏠려 있습니다. 자기가 좋고 싫은 게 첫번째입니다.

- 레이첼의 목표는 장차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겁니다. 웬만한 감정은 의무 앞에 접어둘 수 있습니다.



 - 채나윤은 자기 표현이 분명합니다. 꽤 까칠하고, 제멋대로이며, 주변인 휘두르고, 감정 격해지면 비속어도 곧잘 씁니다. 미묘한 급식체까지 사용합니다.

- 레이첼은 스스로를 억누르다 보니 반대급부로 문자 이모티콘 보내는 능력이 발달했습니다.



 - 김하진과 서로 반말.

- 김하진과 상호 존대.



 - 채나윤은 머리가 꽤 나쁩니다. 이론은 항상 망하고, 그 밖에도 지능이 필요한 일은 젬병입니다. 나쁜 머리와 분명한 자기주장이 결합되면 타인과 충돌하기 좋은 성격이 됩니다.

- 레이첼은 작가특전 얻은 김하진만 없었다면 침착하게 이론 1등을 유지했을 겁니다.



 - 채나윤은 오빠드립을 듣기 전부터 김하진을 싫어했습니다. 총잡이는 사수도 아니라고. 멸시로 시작된 관심은 오빠드립 이후 분노로 전이됩니다.

- 레이첼은 김하진에게 쪽지시험 등수로 연속 패배한 것을 계기로 그를 의식하게 됐습니다. 아니? 나보다 필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고?



- 채나윤은 밥때면 고급 식당만 가고 학식은 세 숟가락 뜨는 게 한계인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입니다.

- 레이첼은 식성이 참 좋습니다. 특히 좋아하는 건 한식이네요.



- 채나윤은 평소엔 패션에 전혀 신경을 안 씁니다만 크리스마스 데이트처럼 각잡을 땐 제대로 꾸미고 나옵니다.

- 레이첼은 평소에는 비서가 골라준 옷을 잘 입고 다니지만 그 자신의 패션 센스는 괴멸적입니다.



- 채나윤은 사적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수업 조원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자신이 호감 가진 남자와 일방적으로 저 좋아하는 남자가 붙어 있습니다. 김수호는 선의로 똘똘 뭉쳐서는 야밤에 채나윤에게 검을 가르쳐주는 등 활발히 접촉하고, 신종학은 항상 질투를 불태웁니다.

- 레이첼은 조원들과 괜찮게 지내지만 그 밖에 사적인 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 관계는 그냥 없습니다.



- 채나윤은, 비록 나중에 후회를 한다지만, 신종학 패거리로 하여금 김하진을 괴롭히도록 만들었습니다. 집단괴롭힘 이슈는 인성논란 중에서도 상당히 셉니다.

- 레이첼은 인성 이슈가 그냥 없습니다.



- 채나윤은 캐묻는 자입니다. 사이가 험악했던 극초반엔 김하진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기분 나빠했고, 나중에 관계가 좋아진 뒤에도 채나윤은 김하진이 뭔가 신기한 짓을 할 때마다 그거 뭐냐,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보죠. 미행이나 엿듣기도 여러 번 합니다. 채진윤 사망 후 김하진의 옷을 찢어 성흔을 확인해버린 뒤로는 대답 안 하고 도망친 놈 붙잡는 데 인생을 걸게 됩니다.

- 레이첼은 김하진의 비밀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초기에 노트 필기를 훔쳐보거나 클랜시 아일렛에서 뒤를 밟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김하진의 과거나 능력 출처 같은 본격적인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밝힐 때까지 기다릴 뿐.



- 채나윤은 김하진과 쌍방 집안 원수 관계입니다. 김하진은 채진윤을 암살했고, 채주철은 김춘동의 부모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김하진과 김춘동은 별개이긴 하지만 채나윤은 그걸 끝까지 몰랐습니다.

- 레이첼은 어느 각도에서든 주인공과 원한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검.

- 속도와 기교를 중시하는 세검.



- 채나윤은 활에서 검으로 전공을 완전히 틀었고, 그 과정은 김하진과의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덕분에 원작보다 빨리 검을 잡았습니다.

- 레이첼은 원래 쓰던 검에 정령술을 더하게 되었고, 배리어 좀 가르쳐 달라고 스스로 김하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원작보다 정령술을 늦게 각성했습니다.



- 채나윤과 공투할 때 김하진은 서포터가 됩니다. 이때 김하진의 도움은 경직을 넣거나 보스몹 팔 하나 날리는 정도가 한계이며, 더러 유효타 한 발 넣고는 뻗어버립니다. 막타는 박물관에서는 김수호가, 이후에는 채나윤이 직접 넣게 됩니다. 예외로 완전 처리해준 상대는 진사혁 정도인데 이건 채나윤의 위기라기보다는 김수호의 위기였죠. 때문에 채나윤은 김하진에게 목숨 구해받은 직후에 감사하면서도 티격태격 할 수 있는 신기한 위치를 점하고, 경험치를 꼬박꼬박 챙겨먹어 급성장합니다.

- 위기에 빠진 레이첼을 구할 때 김하진은 완전한 구원자가 됩니다. 첫 자객은 샷건 몇 발로 날려버렸고, 이후에도 꾸준히 마무리까지 책임져 줍니다. 그게 반드시 사살로 끝나지도 않아요. 척준경은 그냥 물러나줬고 두 번째로 마주친 흑전은 전화 한 통에 박살났습니다. 레이첼은 김하진에게 매번 큰 빚을 지게 되고, 반대급부로 경험치를 덜 먹게 됩니다.



- 채나윤은 스스로의 감정이 혼란스러운 동안엔 미적거렸지만, 결정을 내린 뒤에는 누구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좋은 티를 내며 접근해 김하진을 당황시킵니다.

- 레이첼은 아직 자신의 목표와 의무를 우선하며 김하진에게 어떤 직접적인 어필을 꺼립니다. 김하진이 자신을 좋아한다 생각하고 스스로도 호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 채나윤 최대 떡밥인 채진윤 문제는, 직전까지 아무리 화기애애한 상황이었더라도 그걸 떠올리는 즉시 김하진의 기분을 바닥으로 내리꽂을 수 있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채진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한 채나윤과 잘 되는 건 잘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 채나윤은 갈등을 빚어도, 사이가 좋아져도 김하진에게 떨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 레이첼 최대 떡밥인 에반젤은 직전까지 김하진이 무슨 고생을 했더라도 귀가 즉시 분위기를 발랄하게 풀어버립니다. 에반젤로 감당이 안 된 스트레스는 채진윤 살해 전후 상태 정도입니다.



종합적으로 호불호 갈리고 거슬리기까지 한 대신 좌충우돌로 스토리 진행시키기 편하게 만들어서 갈등서사 중심축으로 때려박은 게 채나윤이고, 그 반대항으로 자기 억제가 강한 대신 주인공과 독자가 한결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인물이 레이첼입니다. 


채나윤의 성질은 긴장과 갈등을 기반으로 한 성장물 담당으로 요약되고, 레이첼은 그 반대편에서 이완을 담당하며 구원물의 히로인이 됩니다.


패션 센스 같은 부분은 얼핏 긴장과 관계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채나윤이 제대로 차려입고 나오는 데이트가 채진윤 암살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극성을 높이는 긴장요소로 활용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레이첼의 패션센스가 드러나는 부분은 꽤 오랫동안 과거에 진입했다가 돌아온 김하진이 긴장 풀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이었죠. 방에는 에반젤이 기다리고 있었구요.


큐브에서 저 둘은 반복적으로 교차되면서 텐션을 쥐었다 풀었다 하는 한편 강렬한 대비로 서로가 서로의 특징을 선명히 했습니다.




유연하는 어떨까요?


다양한 측면에서 유연하는 채나윤과 레이첼의 중간맛이면서, 직접적인 애정전선에서 한 발 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물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적 측면에서 유연하의 목표는 집안 사업을 일으키는 거지만 그 근본은 사욕에 있습니다. 언어습관은 동급생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디폴트지만 아주 가까운 친구들과는 반말을 쓰지요. 김하진과는 자기는 존댓말 쓰고 반말을 듣습니다.


구원, 성장서사 측면에선 어떨까요? 유연하가 김하진에게 도움받는 유형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사업적인 측면을 도울 때 김하진은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나 단서를 제공하고, 유연하는 그걸 토대로 직접 위기를 넘기거나 사업을 확장합니다. 채나윤처럼요.


반면 빌런을 상대로 목숨을 구해질 때 유연하는 뻗은 채로 김하진의 총질에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됩니다. 윤현을 상대로 그랬고 아수라를 상대로 그랬습니다. 레이첼처럼요. 결과적으로 유연하는 사업적인 측면에선 끝모를 성장을, 전투력 측면에선 답보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중간으로 설명할 수 없고 삼각형의 마지막 꼭지점으로 자리잡게 하는 독특한 방향성이 유연하에게는 존재합니다.



- 패스트푸드와 서민음식을 좋아하지만 스스로 그 취향을 감추려 합니다.


- 사적인 친구들과 친한 듯 지내면서 그 뒤에 타산을 감추고 있습니다. 큐브 초반 채나윤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 신종학을 짝사랑하지만 정작 상대는 채나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연하를 연모하는 진세찬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짝사랑인데다 극초반 사막의 독수리를 김하진에게 전달한 뒤 존재감이 소멸했습니다.


- 집에서 유연하는 딸바보 아버지를 자기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엄격한 어머니에게는 거역하지 못합니다.


- 김하진의 비밀에 접근할 때 유연하는 길드와 인맥을 이용해 뒷조사를 진행합니다. 간혹 직접 물을 때도 있지만 유연하의 물음은 많은 경우 정말 묻는 게 아니라 답정입니다. 이미 멋대로 결론 내려놓고 꺼내는 말이예요.


- 유연하가 김하진에게 원한을 품을 이유는 전혀 없지만, 유연하의 아버지는 채주철의 명령에 따라 김춘동의 부모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유연하는 이 사실을 알아낸 뒤 오랫동안 혼자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연하의 특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일방성입니다. 뭐든지 몰래 숨기고, 드러내지 않고, 저 혼자 지레짐작하고, 쌍방으로 기능하지 않는. 그게 유연하입니다. 그렇기에 유연하는 전반적으로 착각물인 이 작품 안에서도 독보적인 착각의 여왕으로 등극하며 가장 놀리는 맛이 좋은 히로인이 됩니다. 놀림의 정수는 상대가 꺼내기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거니까요.


김하진과의 관계가 특별해지는 것도 이런 속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김하진은 유연하를 동료로 취급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김하진과의 거래는 제대로 된 쌍방관계입니다. 또 김하진은 유연하가 감추는 입맛을 거침없이 침범해 오는 한편, 유연하가 가장 꺼내기 주저하는 광오의 비밀에 대해선 힘들면 말 안해도 된다고 자비를 베풀면서 유연하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연하가 보이는 모습들은 채나윤과 레이첼 사이에서 자칫 희미해질 수도 있었던 유연하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그 둘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지지층을 확보하게 했습니다.



먼저 채나윤과 유연하의 인성질을 보여줘서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첫인상을 각인시킨 다음, 분위기가 약간 풀어지긴 했지만 아직 둘과의 관계가 완전히 좋아지기 전에 레이첼을 투입해서 빛빛빛으로 보이게 한 배치는 무척 정석적이면서 효과적이었습니다(정석은 정석인 이유가 있습니다). 김하진과 직접 갈등 요소가 없어서 얼핏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레이첼을 독자들이 가장 기꺼워할 타이밍에 밀어넣은 겁니다.




그리고 유연하와 반대로 김하진에게 반말하고 존댓말 듣는 대장이 나타남으로서 히로인별 경어 분배가 완료됩니다.


채나윤과 레이첼이 니세코이의 치토게와 오노데라 같은 대조군이었다면 대장은 우공못의 키리스 마후유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동급생 셋이 메인을 형성하는 바깥에서 홀로 차별화되는 성인 여성. 일터에서는 칼같고 무뚝뚝한 능력자인데 한 겹 까보면 허당이죠. 유독 캐릭터 디자인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던 센세처럼 대장 또한 미녀 아닌 자 없는 히로인들 중에서도 외모를 칭찬하는 서술이 특히나 눈에 띕니다.


여기다 항상 수요가 있는 그림자 능력+범죄자 신분이 조합되자 그 자체로 지지층 웬만큼 먹고 들어가는 조형이 나왔습니다.





2. 처지에서 비롯되는 공략법의 차이


히로인 레이스는 주인공이 이 여캐 저 여캐에게 플래그 꽂고 다니다가 마지막에 누구를 선택하느냐로 결정됩니다.


각도를 조금 달리하면, 히로인 레이스는 주인공이 히로인들을 공략하는 걸로 시작해서 어떤 히로인이 주인공을 함락시켰느냐로 끝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구조를 오랫동안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하렘물 주인공은 둔감하게 설정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인공이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로 결판이 나는 거니까요.


김하진에게는 일반적인 둔감보다 강고한 의식적 철벽이 붙어있습니다.



자신이 조형한 인물과 사랑에 빠져도 되는가.

자신은 모든 일이 끝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없어질 사람이니 관계가 깊어지면 서로 상처만 남고 끝날 것이다.



이러한 고민 때문에 김하진은 히로인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감정이 일어도 자신이 끊으려고 합니다.


그럼 히로인들이 이놈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요? 물론 연애문제는 그냥 반했다 한 마디면 계기야 뭐든 상관없는 거긴 한데, 창작물에 요구되는 개연성 빌드업 전략을 짜자면 우선 다음의 두 유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1: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두드려서 철벽을 부숴버리거나.

2: 오래 깊이 정들어서 떨어질 수 없게 만들어 버리거나.



작품이 오래 진행되면 어느 히로인이든 1과 2의 복합전개가 가능해집니다만 작품의 플롯이 기능하고 있던 초반~중반까지는 채나윤과 레이첼 모두 선택지가 제한됩니다.


채나윤은 후자가 불가능합니다. 오빠를 죽이고 도망다닐 상대에게 2번은 어불성설입니다.

레이첼은 전자가 불가능합니다. 그 자신도 의무가 사감에 우선해서 벽 치고 있는 레이첼에게 일찍 적극성을 기대할 수는 없어요. 중반 이후 각성을 시키면 몰라도.


그렇기에 김하진의 방에 에반젤이 들어앉고, 그가 큐브를 탈주하기 전 채나윤의 대시에 어쩔 줄 몰라하는 전개가 유효했습니다.


큐브 막바지의 채나윤은 특유의 적극성과 선명함으로 1부의 다른 누구보다도 강하게 김하진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채나윤에게 김하진이 원래 품었던 감정의 중핵은 연민과 죄책감으로 풀이되곤 합니다만, 만약 채나윤이 그토록 애틋하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김하진이 그 정도로 돌아버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반젤은 리틀 레이첼입니다. 투입 자체는 주인공이 애든 애완동물이든 작고 귀여운 거 하나 주워서 키우곤 했던 당시 웹소설 업계의 유행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이 작품 안에서 에반젤의 지위는 조금 독특합니다.


김하진과 에반젤은 부녀 관계나 마찬가지지만 에반젤에게 김하진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재탄생 전 김하진이 쓰러뜨린 던전 몬스터 에반젤에게서는 어떤 인격적 형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에반젤의 모든 인간적인 특성은 레이첼의 유전자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레이첼은 말은 잘 들으나 식탐 있는 말괄량이였다고 회고되는데 이거 에반젤 그 자체입니다. 레이첼을 같은 방에 데리고 살 수 없으니 대신 작은 에반젤을 키우면서 간접적으로 정들게 만든 거죠.


랭커스터가 중요한 빌런이었던 이유는 그를 레이첼의 아치에너미로 만든 사건이 바로 에반젤과 레이첼 사이의 어마어마한 갭을 해명하는 미싱링크이기 때문입니다. 햄프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괄량이 공주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한 걸까요?


큐브에서 레이첼이 연쇄적으로 겪는 위기와, 그녀가 김하진에게 선뜻 연심을 표출하지 못하는 심리적 장벽의 근원이 같은 빌런입니다. 따라서 놈의 떡밥과 의문에 대한 해소가 레이첼이 본격적으로 진도를 빼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첼이 스스로 억누름을 해제해 마침내 김하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면서, 김하진은 에반젤과 쌓은 정이 레이첼에게로 번지면서요.



그런데 대장이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이 구도는 대단히 미묘해져 버립니다.





3. 정체와 위협


앞에서 정리한 큐브 3 히로인들의 특성은 2부에서도 여전합니다.



- 채나윤은 김하진에게 누구보다 무거운 마음을 품은 채 그를 추적합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김하진의 심장을 철렁하게 합니다.

- 레이첼은 다시 만난 김하진과 서로 호감만 가지고 대할 수 있는 상대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뿐 뭘 따져묻지 않습니다.

- 유연하는 광오에 대한 비밀을 숨기고 한 발 물러난 채로 뒷조사를 일삼으며 마랑과 위색단, 검은 연꽃에 대해 헛다리를 짚습니다.



위기와 극복의 방식도 1부와 거의 달라진 게 없습니다.



- 밴시의 저주에 걸려 죽어가던 채나윤은 김하진이 가져온 중화제를 바르자 처치가 다 끝나기도 전에 자기 마력으로 저주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 해수의 위협으로 결딴날 지경이던 영국은 김하진이 척준경을 불러다 해수 둥지를 다 박살내 살아났습니다.



- 어머니 원수와 싸우다 불의의 일격에 당해 죽어가던 채나윤은 김하진이 몰래 쏴준 치유의 화살에 맞고 벌떡 일어나 원수를 자기 손으로 잡았습니다.

- 탑 2층에서 설인에게 공격당해 죽을 뻔한 레이첼은 갑자기 나타난 김하진이 설인을 총으로 사살해줬습니다.



- 프레스티지 식량난 이슈는 어떻습니까? 채나윤은 3층 올라가기 전에 먹을것을 많이 준비해 두라는 조언만 전달받고 스스로 사냥을 해서 인벤토리를 채웁니다. 같은 팀원들한테 시간 낭비한다고 욕먹어 가면서.

- 레이첼은 김하진이 완벽 도축해서 양념까지 재워둔 사슴고기를 박스로 받아 고맙게 먹습니다.



1부에서 정립된 채나윤 서폿 - 레이첼 구원 컨셉 그대로입니다. 채나윤은 김하진이 어떤 계기나 전환점을 만들어주면 문제를 직접 마무리하고, 레이첼은 김하진이 전부 다 떠먹여 줍니다. 이 패턴은 2부 막바지에 각 히로인별 최대 떡밥이 해소 혹은 진전되는 그 순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 채나윤은 김하진을 붙잡고도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하자 직접 히말라야를 기어올라서 채진윤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자신을 성장시켜줄 하인케스도 발견했습니다.

- 레이첼은 드디어 에반젤과 상봉했습니다. 김하진이 데려와서. 김하진은 유연하를 통해 에반젤 가르칠 스승도 구해왔습니다.

- 유연하는 김하진이 죽은 줄 알고 멘탈 털려하다가 오랜만에 나타난 김하진을 헛것이라 착각하고 그동안 숨겨왔던 광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털어놔 버립니다.



무척 일관됩니다 다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비원의 탑에 진입하면서 재미가 덜하고 루즈해졌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히로인들의 캐릭터나 작품의 장르가 달라졌다고까지 합니다. 뭐가 바뀐 걸까요?




잠시 판무 진행의 핵심인 주인공의 능력 성장과 인정투쟁적 측면으로 포커스를 돌려보겠습니다.


소엑은 이쪽 측면에서 꽤 기승전결이 뚜렷한 편입니다.


치트가 있을지언정 기본능력은 형편없었던 주인공이 비록 착각이 섞였더라도 학교 최상위권 동기들에게 인정받게 되는 큐브.

학교 밖의 강자들을 포함한 모두가 능력이 제한된 공간에서 주인공이 혼자 앞서나가며 성장하는 탑.

주인공이 탑 밖에서도 진짜 강자들에게 통하는 조커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오르덴전.

지금까지 획득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최종보스에게 결정타를 먹이게 되는 바알편.


이 구성에서 1부와 3부의 사이인 2부를 탑으로 설정한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엔딩까지 예고된 10년 중 학창시절은 3년에 불과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창시절이 끝나고 사회인이 되어 보내는 기간이 더 길 거라고 초반에 이미 제시된 겁니다. 그리고 탑은 아카데미 밖에서 가장 아카데미와 비슷한 공간입니다. 학교에서 시험과 과제를 해결하며 학기와 학년을 넘기는 일과, 탑에서 제시되는 퀘스트를 해결하며 층을 오르는 일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학생이기 때문에 부과된 과제를 감당해야 하며, 탑에 들어간 사람들은 탑에 진입했기 때문에 층을 올라야 합니다. 보상은 성장이구요. 학교만큼 오밀조밀하지는 않지만 탑에서도 같은 층에 있다 보면 돌아다니다 부딪힐 수도 있죠. 말하자면 탑은 공간, 인물적으로 확장되어 능력에 따라 빠른 월반이 가능한 아카데미이며 학교와 사회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는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탑은 수평으로 아무리 넓다한들 수직적인 방향성이 확고하기 때문에(무조건 위층으로!) 채나윤이 김하진에 대한 단서를 잡지 못하는 와중에도 장기적인 추격전이 성립하게 만드는 기이한 효과도 제공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이 체감하는 큐브와 탑의 차이는 그 이상으로 급격합니다.


큐브편의 핵심 감성은 언더독입니다. 현실에선 작가였다지만 여기선 고아 설정에다가 능력치도 바닥인 주인공이 트리키한 치트 들고 아득바득 고생하며 실제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재벌가/로열블러드 히로인들 사로잡아가는 재미가 중점이었죠. 핵심인물들이 결국 다 김하진을 고평가하게 되긴 하는데 큐브 안에서 김하진의 평판은 꽤 오랫동안 좋지 않았습니다.


탑에서 엑스트라 7의 지위는 어떻습니까? 스펙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엇비슷해지도록 인공적으로 세팅된 출발점에서 원작자 지식빨로 압도적인 스타팅. 튜토리얼 1등한 거 바로 전광판에 뜨고. 7층 게임 센터에서 기계마다 1위 찍은거 혹시 들킬라 닉네임 바꿔서 박아넣고.


검은 연꽃은 탑내 절대강자 취급. 1부에서 제시된 최대 위험인물이었던 벨 진사혁 다 줘패고, 계속 꾸준히 스노우볼 굴리면서 층별 최초 진입보상 독식 후 마계왕한테 김수호 올려보낼 때까지 쭉 랭킹 1위 유지. 능력은 원래 SP만 많이 쌓으면 만능이었는데 무슨 템이다 스킬이다 필살기다 이거저거 막 더 붙고. 


최후반까지 정면에선 에일린, 척준경이 더 강하다는 식으로 서술해서 아직 먼치킨 아니라는 인상을 조금이나마 남기려곤 합니다만 종합적으로 1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공담입니다.


그럼 2부에서 안 되는 게 뭘까요? 긴장이요. 너무 잘 나가니까 전반적으로 긴장이 안 됩니다.


그러니 채나윤 파트가 탑에서 유독 튀어 보입니다. 다른 파트는 거의 다 김하진의 심리상태가 평탄하게 가는데 유독 채나윤만 나오면 긴장을 타고 아찔해 하잖아요. 채진윤 사건 가지고 100편 내리 질질 끌고. 채나윤 감정묘사도 괜히 힘줘서 쓴 것 같고. 얘만 이상하게 밀어준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스케일을 키워놓고 계속 긴장을 캐릭터 한 명에게 맡겨놓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큐브를 그런 식으로 마무리한 이상 채나윤을 너무 가볍게 다루면 캐붕이고요.


레이첼에게는 더 심각한 존재감의 위기가 닥칩니다. 김하진이 너무 승승장구하는데, 위색단에선 뭐든지 척척 알아서 하는 유능한 막내로 이쁨받고 검은 연꽃에 대한 경외가 사방에서 터져나오는데 이완 담당이 뭘 합니까. 또 에반젤, 랭커스터는 탑편 내내 빠져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탑편 레이첼 파트는 중고장비 개그 정도밖에 기억에 안 남습니다. 레이첼 취급 왜 이러냐는 소리 나옵니다. 조연인 에일린, 진세연보다도 비중도 임팩트도 부족하잖아요.


에일린과 진세연이 자꾸 나오는 원인은 명확합니다. 그 둘은 김하진의 비교대상입니다. 정확히 김하진의 성공의 비교대상이자 새로이 인정받을 대상입니다. 큐브 동기들을 상대로 한 인정투쟁은 이미 끝났고, 탑에서 김하진이 그들보다 앞서나가는 건 당연하니까 추가소환된 학교 바깥의 최상위 티어들.


그 둘이 세트로 붙어다니는 이유는 둘이 합쳐 포지션 하나이기 때문이죠. 에일린이 포인트 쪼들려서 개고생하고, 사냥감 잡아놓고도 도축 못 해서 못 먹고, 소매치기 당하면서 고통받을수록 같은 구간을 쾌적하게 답파하는 김하진의 능력이 부각됩니다.


검은 연꽃과 같은 궁수의 정점인 진세연은 더욱 직접적인 성취도 측정기입니다. 작가는 입탑 전 에일린 시점으로 김하진이 성흔을 다 털어서 쏜 화살의 마력량과 진세연의 최대출력을 비교시키고, 탑 안에서 진세연이 검은 연꽃을 의식하는 순간을 여러 차례 집어넣더니, 2부 종반 들어 검은 연꽃이 한방승부로 진세연을 발라버리는 장면을 그려냄으로서 처지가 역전되었음을 확인시켰습니다.


(그렇기에 에일린이 최후반까지 최고전력 중 하나로 계속 카운트되도록 파워업함에도 함께 탑을 오른 진세연의 성취는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김하진보다 세 보이면 안 되니까)


그러니 둘이 계속 나옵니다. 김하진이 승승장구하는 걸 계속 보여주려니 그 둘도 쉴 틈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포지션 애매해진 레이첼이 조연인 둘보다 못해보이는 사태가 일어나버린 거죠.




하지만 2부 레이첼에게 진짜 중대한 위협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대장입니다.


에반젤처럼 한 다리 건너 정들게 만드는 편법 없이 정말 김하진이랑 계속 붙어다니는 히로인이 튀어나와 버린 거거든요…


적극적인 전략을 못 취하는 처지로 대장이 레이첼보다 훨씬 심합니다. 대장이 여러모로 보통이 아니라지만 부모를 죽여놓고 먼저 구애하는건 또 다른 차원이죠. 김하진이 채나윤한테 먼저 못 다가가는 거랑 똑같습니다.


김하진이 위색단의 레귤러 멤버가 되면서 팀플 같이 하는 관계도 대장에게 넘어갔죠. 수련 같이 하던 관계도 김하진이 레이첼을 수련시키던 것이 이제는 대장이 김하진을 훈련을 돕는 식으로 역전 양도되었습니다. 아니 탑에선 김하진이 TP 벌어오는 동안 대장 혼자 수련하고 스탯 빠르게 복구하기도 했군요.


대장은 레이첼로부터 채나윤 대항마 역할도 빼앗다시피 했습니다.


큐브에서 김하진이 채나윤, 레이첼과 어떻게 교차되었는지 되짚어 봅시다.


채나윤 활 쏘는 거 보면서 평가보고서 작성한 다음 랭커스터 쫄따구 쏴죽이고. 생존과제 기말고사장에서 배고픈 채나윤 먹이고 재워서 헤어지곤 레이첼 공격하는 놈 저격해주고.


클랜시 아일렛에서 채나윤하고 카지노 즐긴 뒤 왠지 척준경에게 붙잡힌 레이첼 받아오고. 채나윤하고 같이 모의탑 오르다 레이첼 노리는 자객하고 1대 1 뜨고. 큐브 뜨기 직전 깨진 거울 현상이 터지자 채나윤 손잡고 달리다가 공간 비틀려 놓치니 눈앞에 레이첼이 또 웬 놈이랑 싸우고 있고.


구원서사 이어나간다고 레이첼에게 생명의 위기를 꾸준하게 던지는데 그 장면들이 거의 항상 채나윤 파트 직후에 바톤 터치하듯 김하진을 받아가며 이어져 있었습니다. 일상 파트에서도 꾸준하게 채나윤과 얽히구요.


탑에서는?


판 자체가 커지다 보니까 큐브만큼 꽉 짜여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수정 창 사간 채나윤이 숙소에서 정신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대장과 김하진이 느긋이 보내는 장면으로 전환하고. 김하진이 엑스트라 7로서 나윤짜장맨하고 메시지 주고받은 직후에 대장이랑 문자하고. 김하진이 밴시의 저주 치료한 다음 장면에서 대장이 유진혁한테 김하진 과거 털고 있고.


크레본에서 위색단과 팀플하며 피우넬 털던 김하진이 채나윤 기절시키고 작업 완수. 중앙아시아 유물 쟁탈전에서 채나윤을 살려주고 나서는 오지 말랬는데 왜 왔냐며 대장한테 혼나고. 미스테리 셔플에서 채나윤에게 죽도록 얻어맞아 쓰러진 김하진을 대장이 주워가고.


2부에서 채나윤과 김하진이 마주치는 장면 대부분이 대장과 교차됩니다. 2부 대장이 비중 면에서 독보적이라 채나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가장 심하게 당한 건 역시 채나윤입니다. 이 구도가 반복될수록 채나윤은 불쌍해지고 레이첼은 잊혀져 갑니다.


또 오빠를 죽였냐는 물음에 대답 없이 도망친 김하진을 추적하는 채나윤과, 전대장 죽인 벨을 잡으려 김하진을 영입한 대장은 복수를 테마로 또다른 거울상을 이룹니다. 채나윤이 김하진에게 보이는 애증이나, 벨 만난 대장이 마력탈진 일어날 때까지 날뛰며 분출한 분노는 격렬하기로 수위를 다투죠.


그 밖에 2부에서 자잘한 소품들을 통해 보여진 대우 차이를 살피면 큐브 히로인들, 특히 채나윤이 잃거나 못 누린 걸 대장이 누리도록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연하는 여기도 살짝 중간맛입니다.



- 2부에서 김하진은 큐브 히로인들에게 중고품을 뿌립니다. 무기는 채나윤에게, 방어구는 레이첼에게. 그나마 유연하는 신품 의자를 선물로 받았지만 침대는 김하진이 쓰던 것을 돈 주고 사야 했습니다.

- 대장과 위색단은 김하진이 새로 만들거나 인챈트한 신품 장비와 가구들을 맘껏 씁니다. 입탑한 위색단 멤버들이 착용하는 장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김하진의 작품 혹은 김하진이 구해온 물건으로 도배되다시피 했고, 위색단의 아지트는 김하진 혼자 재창조한 수준입니다.



- 레이첼은 큐브에서 김하진 노래를 녹음해 자장가로 썼던 전력이 있었죠. 2부 유연하는 김하진표 중고침대를 받은 뒤로 잠 하나는 잘 잤네요. 반면 채나윤은 오빠 죽고부터 수면제 약빨로 겨우 잤으며, 김하진이 도망가고 2부에선 수면장애에 환각까지 추가된 중증을 보입니다.

- 대장은 반복되는 악몽을 피하기 위해 일주일에 몇 시간만 자는 극한생활을 이어오다 김하진표 침대를 쓰고서부터 숙면을 즐깁니다.



- 채나윤은 입맛 이슈에도 불구하고 김하진이 해준 요리를 맛없게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정작 김하진이 손재주를 얻어 요리의 달인이 된 뒤에는 그가 만든 밥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먹는다 한들 미각 다 없어져서 맛도 몰랐을 겁니다. 2부 레이첼은 골든 모빌의 대가로 양념 사슴고기를 한 박스 받은 것이 전부. 유연하는 어쩌다 한번 만나면 수제 햄버거나 라면 같은 것을 얻어먹습니다.

- 대장은 김하진이 어린 드워프의 손재주로 차려주는 특급요리를 매일 먹습니다.



- 그동안 채나윤은 김하진과의 사건이 계기가 되어 헤어스타일을 스스로 바꾸어 왔습니다. 원래 장발이었다가 궁술 내기에서 패배한 후 어깨까지 오는 단발로 바꾸고,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부터 웨이브를 넣더니, 시간의 탑 공략 실패 후폭풍으로부터 김하진을 보호하다 머리카락을 태워먹어 숏컷이 되었죠. 김하진이 직접 만져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레이첼은 큐브에서 손재주 얻은 김하진이 단 한번 충동으로 정돈해 줬습니다.

- 대장은 심심하면 김하진이 머리를 빗겨줍니다. 하루 일과에 포함된 것 같더군요. 자기 쪽에서 요구도 곧잘 합니다.



- 선머슴 속성의 일환으로 겜덕 기질이 충만했던 채나윤은 오랫동안 백두산에서 수련하느라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엑스트라 7과의 추억이 어린 그 게임은 재접한 날 섭종했습니다. 탑에는 게임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나중엔 탑이 웬만한 게임보다 재미있다 나오긴 했습니다만 그건 또 다른 얘기고…

- 물욕은 충만하나 아지트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고, 집에서 여가를 즐길 줄 몰랐던 듯한 대장은 김하진이 TV와 소파를 대령하자 비로소 엔터테인먼트를 만끽하기 시작합니다. 탑에 들어가선 웹소설로 취미를 확장합니다.



- 작가 김하진 공인 조금 모자란 여자 채나윤은 원래 호메로스의 반지로 지능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원작대로라면 아직도 활 쓰던 채나윤이 어머니 원수에게 패배하고 한계를 느껴 검사로 전향하면서 아버지 찬스로 받았어야 할 템이건만, 어느 망할 놈이 먼저 먹고 날라버리는 바람에 작품 후반까지 계속 자기 머리 탓을 하게 됩니다.

- 그 반지는 마침 스스로 머리가 좋지 못하다 평하고 있던 대장에게 돌아갔습니다. 원작보다 훨씬 일찍 검 잡은 채나윤이 원수를 패잡으며 성장했음을 확인한 김하진이 대장에게 줘버렸습니다. 자신이 이 반지를 채나윤에게 넘겨줄 방법은 없다는 생각에.



- 큐브편에 나오길 채나윤의 손은 어릴 때부터의 훈련으로 굳은살이 배겨 투박합니다. 백두산으로 떠나는 포탈 앞에서 김하진의 손을 잡아보곤 부드럽다며 부러워하는 장면이 있었죠. 이후 채나윤의 행적으로 보건대 1부 말미에서 2부로 넘어가는 동안 손의 굳은살은 늘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탑에서 공개된 바 대장 역시 실전에서 얻은 상처로 만만치 않게 투박한 손을 갖고 있었지만, 그 흔적들은 김하진이 성흔의 마력으로 깨끗하게 전부 지워주었습니다. 미스테리 셔플에서 채나윤에게 반 죽은 직후에 대장한테 광오사태 얘기 꺼낸 거 수습하려고. 더 이상 자기가 쌓은 인연 잃고 싶지 않다면서.



레이첼이 생명의 위기를 구원받았다면 대장은 일상을 구원받은 셈이고, 김하진 때문에 망가진 채나윤과 순간순간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한편 대장은 유연하 다음으로 광오학살과 김하진의 연관성에 도달한 히로인이기도 합니다. 대장은 이때부터 뒷조사 속성과 죄책감 이슈를 빨아들입니다. 유연하는 그나마 아버지 잘못이지 대장은 자기 손으로 춘동이 부모 죽인 장본인이죠. 돋보기로 김하진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13층에서 김하진이 잠꼬대로 엄마 아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대장의 오해와 어림짐작은 깊어갔습니다.


심지어 대장은 유연하보다도 먼저 김하진 회귀자 설을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해당 가설의 최초 발안자는 토메르긴 했지만서도. 나중엔 웹소설 읽으며 키운 로맨스뇌를 가동해 혹 진사혁이 김하진의 옛 애인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합니다…(이건 유연하의 아침드라마뇌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김하진에게 김춘동 동화율이 발생해 대장에 대한 불안요소가 떠오르자마자 작가는 기존의 긴장 담당이었던 채나윤을 탑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정리하면 2부 대장은 레이첼의 비중을 빼앗아 채나윤과 대립하지 않은 채 대립하고, 유연하의 속성에 다리를 걸치다가 긴장요소까지 먹어치운 포지션 포식자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히로인들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일절 없습니다.


큐브 히로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저걸 다 당했(?)습니다.


1부 채나윤이 레이첼을 크게 의식하고, 또 유연하가 사전 접촉권 문제로 레이첼과 대립각 세우던 것과 무척 다른 양상입니다.


아니 탑에서까지 채나윤은 레이첼이 김하진과 연락되나 물어보고, 레이첼은 잡아떼고, (냄새를 잘 맡는다고 비유되곤 하는) 뒷조사 속성이 진짜 물리적인 냄새까지 잘 맡는 기믹으로 튀어버린 유연하는 김하진표 중고장비 입은 레이첼 몸에서 김하진 냄새가 난다며 미심쩍어합니다. 진짜 위험한 상대는 따로 있는데…




히로인 레이스 측면에서 본 비원의 탑은 챕터 전체가 대장을 위한 빌드업 구간입니다.


대장이 닉값하는 진짜 보스몹으로 성장하고 다시 대장을 날려버릴 수 있는 밑밥이 깔리기 전까지, 앞서 빌드업된 큐브 3 히로인 전원의 진도를 큐브 막바지 상태 그대로 매달아놓은 게 2부에서 느껴지는 정체감의 정체에요.


히로인들이 탑을 오르는 페이스는 2부 히로인 레이스의 형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장은 최선두에서 김하진 버스를 타면서 독보적인 상승세를 타고, 대장의 대립항을 형성하는 채나윤이 그 뒤를 헤매며 오릅니다. 대장에게 자리를 빼앗긴 레이첼은 8층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하는 데 만족하며 멈춰버렸고, 한참동안 채나윤 뒤에 머물러 있다가 뒤늦게 마음 자각하게 되는 유연하는 한참동안 입탑을 미루다가 좀 늦게 들어가 최소 15층까지는 올라갔습니다.


이 구도는 비원의 탑 후반에 동화율이 나오면서 비로소 타파 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동화율은 대장을 위한 시한폭탄입니다. 채나윤과 유연하도 위험성이 없지 않지만 대장은 그 둘과 연관성이 비교 불가능한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김하진이 일시적으로라도 광오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증오에 삼켜져 버리면 바로 관계 박살이고, 김하진에게 자기 통제력이 남아있더라도 이건 내 감정이 아니라면서 해소될 때까지 대장 안 만나거나 하는 전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채진윤 죽인 지 20화도 안 되어 터져버린 채나윤과 달리 동화율은 진사혁과 얽혀 또 한 차례 빌드업 대기 타임을 갖습니다.





4. 변화의 가능성


지갑송은 254화 후기에 엔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며 자신도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고 적었습니다.


뒤이어 연재된 3부는 비교적 몰입도가 떨어지고 뒤로 갈수록 헌터x헌터 키메라 앤트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워 독자들이 본격적으로 이탈하기 시작한 구간입니다.


여러모로 단점이 많이 보이는 챕터입니다만 히로인 레이스 측면에선 정말 이제부터 어떻게 될지 모르는 듯도 했습니다.


히로인들이 기존의 엄정한 패턴에서 벗어날 듯한 징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채나윤은 레이첼처럼 김하진에게 순수하게 구원받는 상황을 맞기 시작합니다. 2차 오르덴 섬멸전에서는 겐켈리온의 구조가, 3차 작전에서는 위기상황에 초대권으로 소환된 김하진이 박한호와 티그리스를 연이어 처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반면 레이첼은 마침내 김하진 없이 국토방위에 성공합니다.


오랫동안 한 발 뒤로 빠져있던 유연하는 연락 연락 연락을 기점으로 김하진이 뭔가 느낄 정도의 감정을 표출하게 되었으며, 중요하지만 위험한 임무에 직접 나섰다가 김하진이 검은 연꽃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알아버립니다.


김하진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은 이제 특정 히로인 한둘의 이슈를 넘어 레이첼을 제외한 모든 히로인들의 공통속성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격렬한 변화는 3부 메인으로 떠오른 진사혁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현된 과거의 아카트리나로 넘어가며 김춘동과의 접점이 밝혀진 진사혁은 지금껏 여러 히로인들이 오랫동안 쌓아올린 감정의 수위를 단숨에 따라잡습니다.


대장이 나머지 모든 히로인들의 벽이라면 그동안 진사혁은 나머지 모든 히로인들의 안티테제였습니다.


지금껏 김하진은 다른 히로인들을 어떻게든 도우면서 진사혁만큼은 어떻게든 밟아놓으려 했습니다.


탑에서 쏴죽이고, 저주 묻히고, 탑 밖에서 만나면 운명 걸고 패고… 3부 전에 안 죽은 게 플롯아머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 진사혁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더니 동화율을 인위적으로 올릴 유인을 갖습니다.


느닷없이 돌출한 다크호스가 대장을 저격하는 포지션을 취한 거죠. 그런 것치고 정작 실제로 대장 만나면 맞기만 합니다만 어쨌든.




이 즈음 진사혁의 인물관계도를 확인하면 의외로 레이첼의 포지션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3부 진사혁은 2부 최대 대조군이었던 대장과 채나윤 양자 모두와 직접 대립합니다. 채나윤에게선 적개심과 경계를 사며, 대장과는 진짜 싸우죠.


반면 레이첼과는 크레본에서 신자혁이라는 이름으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쌓았습니다.


대장과 채나윤이 동화율 올라가면 위험해지는 그룹이라면 레이첼은 가장 큰 수혜를 받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김춘동과의 연결고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 김하진에게 동화율로 인한 자아혼란이 올 경우 순수한 자신으로서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히로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동화율과 호감도가 정비례할 진사혁보다도 더 나은 포지션이에요 이건. 그냥 적당히 호감 생기는 정도까지는 괜찮아도, 남의 감정에 거의 먹히는 수준이 되어 누군가에게 강렬한 감정을 품게 된다면 자아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공포로 다가올 테니까.


사방이 긴장투성이가 되면 레이첼의 본래 역할이었던 이완 담당이 의미를 되찾았을 것입니다.


그전까지 일방적이었던 구원서사를 쌍방 구원으로 끌어올리는 결말,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크레본에 눌러앉은 또다른 김하진 인맥인 토메르도 아버지가 김춘동 지인이니 동화율 올랐을 때 나쁜 관계는 안 됩니다. 마이너스는 아닌데 깊은 감정이 분출될 정도는 아니니까. 마침 레이첼과도 큐브에서 팀플 같이 하던 조원이겠다 공통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겠지요.




레이첼과 김하진이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요인 하나 더.


2부->3부 전환 구간에서 김하진이 목숨 한번 잃었던 사건. 그때 다른 히로인들 반응이 어땠습니까?


대장 눈앞에서 통곡하고, 유연하 후회 속에 쓰러지고, 채나윤 발광하며 오열하고, 아직 김하진에게 맞기만 했던 진사혁마저 내 원수를 누가 죽였냐며 당황해서 사실 확인차 날아오고.


오직 홀로 레이첼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소외된 탓에 오히려 언제 만나도 대단한 감정소모 없이 대할 수 있는 상태로 남은 겁니다.




후반의 레이첼은 동화율 때문에 주인공과 대장, 어쩌면 유연하와 채나윤까지 죄다 관계 혼파망되고 여기저기서 눈물 뽑는 동안 여유롭게 웃으며 에반젤 데리고 김하진과 진도 뽑을 수도 있는 포텐셜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3부->4부 전환 구간인 304화 도입부에 김하진이 잠든 에반젤을 보다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처음으로 떠나기 싫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메인스토리 3/4이 지나가고 이세계 생활 9년차를 바라보도록 히로인 생각보다 에반젤이 먼저인 겁니다. 랭커스터를 여태 묵혀두었으니 아직 레이첼의 진정한 메인 에피소드는 시작조차 안 한 셈이죠.


작가가 큰 의도 없이 던진, 혹은 그냥 결과적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뿐인 요소들을 제가 억지로 엮어서 유연하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지갑송이 뿌려놓고 폐기하거나 잊어먹은 게 하도 많다보니 저도 이 글 쓰면서 취사선택 꽤나 하고 있구요. 따져보면 레이첼이 혼자 소외된 것도 탑 8층에서 멈추던 순간부터, 중앙아시아 유물 쟁탈전에 못 끼면서 계속 그랬고…


그렇더라도 이때는 아직 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대장에게 빼앗겼던 자리를 레이첼이 도로 빼앗아가는 전개가 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적어도 행복회로는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5. 실제로 본 것


지금까지 각 부마다 서로 다른 히로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양상을 살펴보셨습니다.


레채유 3인을 독자들에게 메인으로 각인시킨 큐브.


대장을 보스몹으로 끌어올린 탑.


진사혁을 히로인 레이스에 본격적으로 밀어넣으며 판 흔들려는 조짐이 보인 오르덴.


이제 빌드업 다 끝났으니까 터뜨리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든지 수라장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대장의 승리를 확정시키는 굳히기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구도에서 대장을 우승시키려면 마무리 전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가장 간단하게는, 떡밥을 전부 다 묻어버리면 됩니다. 동화율 안 터뜨리고, 레이첼은 뒤로 밀어둔 사건을 잘라버리고, 채나윤은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김하진한테 적극적으로 못 다가가게 하고, 유연하는 계속 마음만 졸이게 냅두는 겁니다. 진사혁은 악우 정도의 관계로 스톱시킵니다. 그럼 소거법으로 대장이 이깁니다.


이 수법은 간단한 만큼 위험합니다. 중반부터 전개의 혜택을 독식한 히로인 한 명을 위하여 작품의 전성기에 메인 히로인으로 인식되었던 경쟁자 전원을 불완전 연소시키는 이런 전개는, 루트가 분기되어 다른 히로인들의 서사가 보장되는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지만 한 줄기로 이야기를 완결해야 하는 소설에선 불만을 사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쯤되면 채나윤 지지자는 분통이 터지고, 유연하 지지자는 위가 아파오고, 레이첼 지지자는 아예 할 말이 없어지는 지경이 됩니다. 엔딩 부근까지 하차를 안 했다면요.


본편 끝나면 패배한 히로인들 외전 내겠다고 선언할 만 했죠.




사실 앞서 말한 변화의 전조라는 것들도 뭐가 바뀌는 척 오히려 퇴보해버린 요소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순서 좀 바꿔서 레이첼부터 봅시다.


김하진 없이 영국 구한 거 좋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이제 사실상 비전투요원 취급인 유연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오르덴 잡으러 몰려가 있는 동안 영국은 아예 카메라를 비춰주지도 않고 다 끝난 뒤 결과만 통보됩니다.


활약씬 통편집.


그 전에 나온 중간보스전은 김하진 대신 진사혁에게 1차로 도움받고 하인케스가 막타 쳤지요.


출연이 너무 적다 보니 성장 장면도 안 나와서 얘가 파워인플레는 어떻게 따라오고 있는 건가 싶어지고. 같이 큐브에서 1~4등 붙박이였던 김수호, 신종학, 채나윤 다 에필로그에서 최상격 찍었는데 레이첼 혼자 상격이고.


에반젤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된 채로 작품 2/3지점까지 상봉도 못 하다가 겨우 같이 지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영역 만든다는 핑계로 도로 떼어놔버리고.


4부 메인 멤버들이 마계의 문에 들어가 있는 동안 에반젤은 그냥 영국에 남아서 다시 갈라지고. 김하진하고 셋이 같이 있을 기회를 주지를 않고.


김하진이 찾아와야만 만날 수 있는 신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구원 기다리는 공주님 역할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그냥 화면 바깥으로 튕겨난 거였습니다...


심지어 마계의 문 진입 이후 대장과 김하진이 키스 직전까지 가고 난 이후에까지 레이첼에게 대장을 공개 안 하고(알아버리면 질투심 각성제 되니까), 오히려 레이첼과 김하진이 잠깐 같이 있는 모습을 대장이 훔쳐보고 경계하는 장면에 이르러선 탄식이 다 나오더군요.


레이첼의 입을 통해 랭커스터가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며 밑밥 까는 척하더니 아무 일 없이 랭커스터 생존엔딩을 때려버리는 게 어우… 이 시점에선 이미 본편 구현은 포기하고 외전에서 해소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겠지만.


결국 레이첼은 기다리는 히로인은 망하기 쉽다는 업계 징크스를 회피하지 못하고 중심서사에서 밀려난 채 약만 올리고 방치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남은 건 에반젤뿐이었죠.




유연하는 검은 연꽃의 정체를 알고도 원래 하던 오해만 심화시켰습니다. 이후에도 물주, 서포터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위색단과 직접 접촉한 이후에는 순순히 포기하는 전개를 보였습니다.


레이첼이나 채나윤보다 김하진과 훨씬 자주 만나고 도움은 히로인 그 누구보다 많이 됐지만 이어놓을 떡밥은 오히려 없었고.


바알전 종료 직후 유연하가 대장에게 내린 평가, 그 여자가 누구보다 더 김하진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인정해버린 장면은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김하진 죽은 줄 알았을 때 채나윤 오열하는 거 봤으면서, 아니 남말할 거 없이 자기도 앓아눕고 기절하고 다 했으면서 뭔…


전 그거 유연하로 인정 못 합니다. 에반젤 보고 그럼 채나윤은 뭐였냐고 배신감에 떨던 유연하 어디 갔어. 대장과 김하진이 무슨 관계인지 머릿속으로 대하소설 몇 질 휘갈기고 끙끙 앓다 폭발했어야지 여기까지 왔으면…


히로인 중에서 자기 꿈은 가장 잘 이루긴 했는데, 신종학부터 김하진까지 약 20년간 연애전선에서 단 한번도 채나윤을 제껴보지 못했다 스스로 느끼다가 최종 에피소드 전까지 본 적도 없는 여자한테 패배하고는 그걸 그냥 받아들여버리는 결말은 너무하지 않은가...




진사혁은 후반 비중이 폭발했음에도 결국 마지막까지 김하진의 히로인이 아닌 김춘동의 히로인으로 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진사혁은 김하진 관계자들에게 단 한번도 질투나 경계를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대장이 진사혁을 김하진의 옛 애인인가 경계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진사혁에게 대장은 강하고 껄끄러운 상대일 뿐이고, 레이첼이 진사혁과 김하진의 관계가 무엇인가 속을 태워도 진사혁은 레이첼을 놀려먹을 뿐이고, 채나윤이 진사혁과 벨의 통화를 엿들으며 혼란스러워 하더라도 진사혁은 채나윤을 그저 덜떨어진 것 취급할 뿐입니다. 유연하요? 본 적도 없어요.


작품 전체를 통틀어 진사혁이 질투한 대상은 구현된 과거의 자기 자신뿐입니다.


김하진=카인스프링이라고 확신하던 때.


(+진사혁이 벨에게서 동화율에 대한 내용을 전해듣기 전 잠깐 채나윤을 의식하긴 했네요. 동화율에 대해 알게 되자마자 접어버렸지만)




마지막으로 채나윤. 


얜 각 부마다 누가 메인으로 올라오든 반대항에서 대립하는 담당이었기 때문에 카메라 바깥으로 이탈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장하고 서로 모르는 채 대비되는 구도를 얼마나 공들여서 짰는데 그걸 버립니까. 꼭 대장이 아니라도 결승전에 누구를 올리든 채나윤은 마지막까지 경쟁구도 만들기 가장 좋은 카드에요.


대신 딱 한 발만 내딛으면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그 한 발을 못 내딛게 만들어 버렸죠.


적극성이 가장 큰 어필 포인트인 애가 머뭇거리는 상황 자체가 적신호였습니다.


백두산과 히말라야를 번갈아 입산하며 수련과 성장에 관해 작중 누구보다 강조를 받았건만 정작 그렇게 얻은 전투력을 어필할 기회를 주지도 않아요.


1:1로 누굴 이기는 장면이 나온 적이 없고, 큐브 초기부터 채나윤이 최강이라고 기대감 불어넣은 대규모 전쟁마저 진정한 잡몹 학살머신인 마랑의 총과 더 치트인 겐켈리온이 다 해먹음.


함께 싸우던 자에서 그냥 구해지는 신세로 바뀌는 건 진보가 아니라 전락입니다.


최종전에서 바알에게 눈에 띄는 일격을 먹이며 김수호와 함께 차기 구성 후보에 올라가긴 합니다만 그 전까지 전적이 너무 뭐가 없던 터라 실감이 안 되고요. 아니 독자 상당수가 마지막에 채나윤 전투력이 고평가된 줄 기억 못 합니다... 애초에 대장한테 패배 확정된 시점이지 그때는.


또 미스테리 셔플에서 무지의 베일을 벗어버리던 연출이 무색하게도 채나윤과 김하진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김하진은 채나윤이 자기 때문에 미각을 잃고 담배까지 피우게 된 사실을 모릅니다.


채나윤은 김하진이 채진윤 때문에 위색단에 투신해 검은 연꽃이 되었으며, 탑에서 자신에게 적수정 창을 헐값에 팔았던 인물이, 자신이 고전할 때 화살 한 대씩 땡겨주고 간 사람이, 중앙아시아에서 치유의 화살로 힐 넣어준 장본인이 전부 김하진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릅니다.


서로 모르니 반응도 없습니다.


이건 단순히 어떤 캐릭터가 활약을 못 하고, 화해할 여건을 조성해 놓고도 관계 진전이 지지부진한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남성향 웹소설 재미의 중핵인 주인공의 행동-성취-보상 체계가 작동정지해 버려서 독자들이 후반 채나윤 파트로부터 즐거움을 못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표현을 좀 세게 하면 후반 채나윤은 (최종전 전까지는) 키워준 보람도 잘 모르겠는데 주인공이 해준 걸 제대로 알아주지도 못하고 저 혼자 갈팡질팡하는 앱니다.


이래놓고 꼬인 관계와 내면묘사, 바보같은 모습만 연속해서 강조하니까 원래 채나윤을 안 좋아했던 독자들은 뒤로 갈수록 채나윤 파트의 존재의의를 의심하며 짜증을 내고, 채나윤을 지지하는 독자들은 못 버티고 하차해 버리죠.


이래놓고 마지막이 채나윤이 회귀하느냐 안 하느냐를 놓고 하필 벨이랑 바알이 내기하는 장면이라고? 장난하나?




대장엔딩을 급발진이라고 평하는 분도 적잖이 계시지만 저는 본편의 결말이 다른 히로인 루트의 개방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기본엔딩 같은 형상이 되었다 보고 있습니다.


오르덴 척살 직후 김하진이 이 세계 8~9년차가 되었다고 나오는데 그 중 큐브는 고작 14개월이 될까 말까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위색단으로서 살아왔습니다. 자신을 아끼는, 세계관에서 손꼽히는 미녀하고 그 정도 같이 지냈으면 정드는 데 무슨 대사건을 갖다붙일 필요가 없어요. 연출 제하고 개연성만 따지면 말입니다. 대장이 김하진에게 빠져들 계기는 충분하고도 남았고, 김하진도 대장을 신경쓰는 모습은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대장과 다른 히로인들과의 대우 차이를 보여주는 소품을 더 볼까요? 미스테리 셔플에서 울다 잠든 채나윤에게 입고 입던 로브를 덮어준 것을 마지막으로 김하진은 히로인들에게 물건을 빌려주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주는 것조차 아님…


유연하에게는 골든 모빌을 빌려주고, 진사혁에게는 알렉산더의 망토를 빌려주고, 채나윤에게는 유연하 경유해서 발뭉을 빌려줬다가, 진짜 최종전에 돌입하기 직전 호메로스의 반지 대신으로 직접 만든 목걸이를 빌려줍니다(여기까지 와서는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어떻게 써먹었는지는 알지만 작중인물 김하진의 머릿속을 모르겠음).


오직 대장한테만 꾸준하게 신품을 갖다바쳐요. 어 잠깐 또 레이첼만 뭐 없나? 이젠 그나마 빌려준 것도 없나?


이걸 그대로 대장 굳히기로 완결해 버리니까 나머지 히로인 지지자들이 맥이 빠지죠.


대장엔딩이 반발을 산 이유는 다른 히로인들의 떡밥을 도마뱀 꼬리자르듯 묻어버린 게 첫 번째고, 전체 379화 중 140여 화가 큐브편이라 그 압도적인 동반기간이 독자들에게 와닿지 않는 점이 그 다음. 대충 마계의 문 진입 전후해서 루트가 거의 확정되었다고 보는데 탑하고 오르덴을 합쳐봐야 큐브보다 겨우 몇 화 더 많죠.


그리고 이 둘이 선을 넘기까지 심리적 장벽이 서로 꽤 두터운 편인데 그걸 넘어가는 연출이 조금 약했던 것. 특히 상대가 레이첼이 됐든 채나윤이 됐든 거의 자기최면 레벨로 저항(?)해온 김하진이 대장을 상대로는 자기 감정을 꽤 순순히 인정해 버렸는데 그 세 가지가 가장 컸다고 봅니다.


대장 지지자들 중에서도 이런 것보단 더 극적인 진행을 원하는 독자가 많았을 테고...


3부->4부 넘어가는 구간에 대장이 극적인 상황설정을 하나 받기는 했지만 이 사건도 복기하기 좀 고통스러운 종류입니다.





6. 이연준 죽이기


이연준 죽이기가 바알편의 메인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대장은 마침내 채나윤의 핵심 서사를 완식해 버립니다.


이거 채진윤 죽이기 시즌 2 잖아요.


- 현재 가장 공략도가 높은 히로인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는데

- 그 사람이 악마의 화신이 될 예정이라 죽여야 하는 상황.


차이는 전투력과 선악 반전 정도입니다.


이번에 김하진의 대응은 채진윤 때와 사뭇 다릅니다.


김하진은 목표를 몰래 저격할 생각을 접고 말을 걸어 이연준이 이별을 얻기 위해 스스로 망가뜨렸음을 자기 입으로 인정하게 합니다.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채진윤 사건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시도였죠. 대장이 그 대화를 듣게 되어 진실을 깨닫고 이연준을 적대하게 됨으로서 김하진은 성공합니다. 


이 미션에 채나윤이 투입되면서 무척 잔인한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이연준은 채나윤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채진윤 머리에 악마의 씨앗을 심은 원흉이 이놈입니다. 채나윤도 그 가설에 닿고요. 채나윤 어머니 피살사건 사주범도 이놈으로 추정됩니다. 채나윤은 과거를 구현한 가상세계에서 구현된 이연준과 싸워본 경험도 있습니다.


또 과거의 이연준을 이용해먹다 폐기한 장본인이 채나윤 할부지 채주철이었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서로를 모르는 채 대립해온 두 히로인이 드디어 직접 깊이 얽히면서 여러모로 터져나가는 이야기로 발전할 포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하진과 이연준이 1:1로 붙은 상황에서 이번에야말로 김하진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채나윤이 끼어들었을 때 윗 문단에 언급한 내용들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채나윤과 김하진이 무척 오랜만에 팀먹고 싸우게 된 것만 강조되고 이연준과의 원수관계는 전혀 부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둘이 이연준을 이겼나? 성공했다면 지금까지 김하진에게 빚져온 거 제대로 보답할 기회였고, 지금까지의 고생은 이 순간을 위한 빌드업이었다고 뒤집을 수조차 있었고, 그냥 계속 싸우면 이겼을 것 같기도 한데, 이연준의 자폭 시도를 막지 못해서 다같이 죽을 뻔하죠. 진짜 구원, 이연준 킬은 갑자기 날아온 대장이 했습니다. 채나윤은 이 때 대장을 처음 보고 누군지 설명 제대로 못 듣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김하진 붙잡고 씩씩거리던 채나윤은 유연하에게 토스되고, 풀려난 김하진은 자기 손으로 이연준 죽인 충격에 넋나간 대장을 위로하더니, 그대로 바알전 돌입해서 채나윤은 최전방으로, 김하진은 후방에 저격포인트 잡고 대장이랑 꼭 붙어있는 마무리.


결국 이 에피소드는 채나윤에게 품은 후회를 대장한테 푸는 하이라이트에 채나윤 소환해서 들러리 세운 그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연준 과거편부터 패배 플래그 세게 꼽아놓고 이연준을 죽이면서 채나윤도 같이 확인사살한 거지 이건...


대장 묘사라도 인상적으로 뽑혔다면 부분점수라도 주겠는데 그것도 부족하고. 한때 대장이 벨에게 보였던 분노의 정도와, 진사혁이나 쿠르쿠르처럼 김하진을 노리던 상대에게 대장이 뿜어냈던 적대감을 생각하면, 대장이 이연준에게 품은 애증과 복잡함이 한때 채나윤이 김하진에게 품었던 것에 못하지 않은 강도를 자랑할 텐데 그에 비해서는 얼렁뚱땅 넘어갔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죠.


주인공인 김하진은 이번엔 활약하는 주체라기보다는 히로인들에게 도움받는 역할이고.


에피소드 메인빌런 이연준은 역할에 비해 캐릭터가 영 허접합니다. 빌런이 된 동기나 성격보다 더 문제되는 부분이 행적인데,


분명 세계관에서 가장 악랄한 범죄단체를 꾸린 최악의 범죄자건만 가만 보면 전과는 죄다 부활 전 옛날 일들뿐이고, 부활 후에는 이별과 김하진에게 찌질댄 것 외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


오르덴 시체를 줍겠다 욕심부리더니 김수호가 쿠르쿠르를 살려 보내주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먹고. 김하진 말이라면 다 듣게 된 위색단을 다시 장악하지도 못했고. 자기를 죽여놨던 채주철에게 무슨 복수를 하지도 않았고, 채주철 손녀이자 채진윤 동생인 채나윤과 악연을 이어나간 것도 아니고, 랭커스터가 이연준에게 영국 왕실 좀 터뜨려달라고 의뢰하던 떡밥은 레이첼이 탈락하며 그냥 소멸.


대장엔딩 내려고 동화율 봉인하고 김하진이 위색단과 계속 같이 가게 만들면서 이연준과 채나윤/레이첼 사이의 접점을 끊었더니 대장 스토리 핵심인물이 뭣도 아니게 되어버렸어요. 뭐여 이게?


대체 누가 행복한거야 이 전개?





7. 몽중화


결국 뒷수습 조로 큐브 히로인별 외전이 나왔는데...


다른 두 외전이 대체로 호평인 데 비해 레이첼 외전은 원성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몽중화가 맨 앞이 아니었더라면 나머지 두 히로인 외전의 구매수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거라는 평마저 있습니다.


빼어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여러 의미로 꼬인 편이라 지금 이 글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도 조심스럽습니다.


저 리뷰 나머지 부분 다 쓸 때까지 레이첼 외전만 뒤로 빼뒀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붙잡은 겁니다.


아 잠깐 눈물좀 닦고...



아니 정말 뭐부터 적어야 될지 모르겠네 이거. 어디까지 까야 할지도 판단이 안 서고.



주 배경은 일종의 본편 파생 세계선입니다.


이 세계선은 채진윤이 없어서 김하진이 채나윤과 드라마 찍다가 도망칠 일이 없지만 여기서도 김하진은 중퇴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비원의 탑이고 뭐고 다 사라졌고 에피소드 전부 완료됐으니 너는 여기서 계속 살면 된다는 메시지가 떠서 멘탈 터졌거든요.


좌절에서 비롯된 마음의 공허를 에반젤 키우는 재미와 돈 모으는 맛으로 때우는 하루하루.


덕분에 이 세계선의 김하진은 다른 건 몰라도 재산만큼은 본편의 김하진보다 많습니다.


기묘한 세팅입니다.



기본 스토리는 본편에 나왔고 또 나와야 했던 레이첼 서사 전반의 압축판입니다.


초반은 큐브 시절 레이첼 에피소드의 변주로 진행됩니다.


빌런 저격, 팀플 길잡이, 공주님 구출, 뒤쳐진 성장을 돕기 위한 수련.


학교와 상관없는 배경이건만 느닷없이 이론문제를 풀게 되기도 하는데 큐브에서의 둘을 돌이켜보기 위해선 필기시험의 추억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죠.


그 뒤로 과거와 랭커스터 떡밥이 전개되며 본편에서 미처 다 풀리지 못했던 레이첼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위색단의 등장이 없는 이 외전은 본편에서 대장에게 자리를 빼앗겼던 레이첼을 위한 한풀이적 성격도 있습니다.


주 배경이 되는 무대는 마치 비원의 탑을 수평으로 펼쳐놓은 듯하며, 그곳에서 레이첼은 본편 2부 대장이 받던 캐리를 대신 받습니다.


토메르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김하진이 에반젤과 똑 닮은 과거의 어린 레이첼을 구하거나, 레이첼의 먹성을 최대한 고조시키는 환경을 만나 에반젤과 겹쳐 보게 되기도 합니다.


서로 꿈으로 과거의 편린을 체험하는 대목은 약간 페이트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레이첼이 잘 먹는 영국 공주님이라 더...


김하진의 꿈 속에서, 그 장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레이첼은 작가 김하진이 원작을 쓰던 작업실에 들어가보기도 했습니다.


레이첼은 본편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급성장을 이뤄내고, 클라이맥스에는 한때 채나윤에게나 있었던 난관 돌파 패턴, 즉 김하진에게서 최소한의 서포트를 받아 스스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극복의 순간을 성취해냅니다.


사건이 끝난 이후 김하진은 지금까지 모아온 재산을 영국에 투자해 레이첼의 숨통을 틔워주고, 에반젤도 함께 셋이서 거의 애 딸린 신혼부부 분위기를 내며, 그 자신은 이 세계에 강제로 머물며 충족하지 못했던 허무감을 레이첼로 채우면서 그전까지 쭉 일방적이었던 구원서사가 쌍방 구원으로 확장·완성됩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참 좋은데 왜 불만이 나오는가...




일단 주인공 김하진이 첫 3화 동안 등장을 안 합니다. 4화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1,2화를 하나로 합쳐서 올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화 스타팅).


한참 정체를 숨기고 레이첼을 도와주기 때문에 히로인이 주인공 얼굴 보는 타이밍은 한참 더 늦습니다.


전체적으로 진행이 썩 빠른 편은 아니고, 레이첼 특성상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른 히로인들에 비해 차분합니다. 달리 말해 자극이 덜합니다.


김하진은 기승전결 중 전에 해당하는 구간 거의 내내 잠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전체 45화 중 10화 동안 주인공이 퍼질러 잡니다.


누운 채로도 상황에 개입을 하긴 합니다만 결국 그 구간은 레채유 3인에 의해 진행됩니다.


글솜씨나 완성도를 논하기 전에 2020년 현재 웹소설 독자 다수에게 선호받는 전개는 분명 아닙니다.


주인공 리타이어 구간 동안 레이첼이 제대로 된 메인이 되어 사건을 힘있게 끌고 갔다면 그래도 레이첼 외전으로서 높은 점수를 주었을 테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비중과 존재감도 그렇게 밀리는 느낌이 아니더군요. 일반적으로 마이너스가 될 요인은 아니겠지만 히로인 개인 외전으로선 아쉬워집니다.


특히 작가는 본편에서 제대로 어필되지 못했던 채나윤의 전투력까지 이 외전에서 해방해 버렸습니다.


위색단이나 진사혁이 안 나오니까 완전 여포가 돼서 역상성이고 뭐고 깡스탯빨로 다 패버려요. 심지어 검 든 레이첼이 맨손 채나윤한테 쪽도 못 쓰고 두들겨 맞음... 덕분에 레이첼이 폭렙하는 기폭제가 되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심하게 나느냐면,




이거 꿈입니다.


완전 뒤통수는 아니고 어찌된 건지 꽤 초반부터 부분적으로 풀리는데다 제목부터 꿈 속의 꽃이긴 한데...


대충 본편 채나윤이 회귀템 얻고 놀라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일어난 돌발상황을 랭커스터가 레이첼의 꿈으로 성립시킨 게 이 세계선입니다.


꿈에 먹힌 레이첼은 세계선 따라 비원의 탑을 거치지 않은 스펙으로 보이고, 사고친 뒷수습하러 꿈에 침입한 채나윤은 본편 최종보스전까지 다 거친 만렙상태 그대로 다이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대가 될 리 없죠.


빌런들은 끽해야 랭커스터 쫄따구들인데 이젠 랭커스터 본인과 붙더라도 채나윤이 혼자 패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래서 레이첼 외전에서 레이첼한테 죽빵 먹이고 애가 턱 다쳐서 발음 새니까 비웃는 장면까지 넣어야 했냐면... 너무했지 그건. 레이첼의 안타까운 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큐브 재학기간 중에는 이론과 실전 모두 성취를 이루어 채나윤을 제치고 생도순위 3위를 놓치지 않았던 레이첼입니다만 사회로 나가서는 조금 안타깝게 되었죠.


개인 전투력으로는 채나윤을, 세력과 사업 수완으로는 유연하를 이기지 못하며,


그 둘이 한팀인 이상 거의 소녀가장 급으로 영국을 캐리해야 하는 레이첼로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김하진이 레이첼의 편에 서주지 않는다면요.


이 외전에서 원작자 김하진은 레이첼이 정신적으로 너무 억눌려 있음에 안타까워합니다.


그는 레이첼의 원래 컨셉이 극복과 결의였노라 말합니다. 이게 단순히 등장인물 김하진의 대사인지, 지갑송의 자기고백일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본편에서는 결의는 몰라도 극복은 독자들에게 전혀 어필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이 정말이라면 정말 억눌려도 너무 억눌려 있었던 거지요.


여기에 랭커스터라는 아치에너미가 더해져 레이첼은 퍽 구해주기 좋은 처지에 놓여있었던 셈이며, 그 구원은 외전을 통해서야 구현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이야기는 본편에 나왔고 또 나와야 했던 레이첼 서사 전반의 압축판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대장이 승리한 세계에서 한 조각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김하진이 자신을 구해준 이 세계는 달콤한 꿈일 뿐이며, 현실의 그는 거의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채 다른 여자의 곁에 있다는 잔인한 사실을 자각한 레이첼은, 


곧바로 깨어나는 것도, 영원히 꿈 속에 남기로 한 것도 아니요,


아쉬운 마음에 이 꿈의 달콤함을 조금만 더 즐기다가 현실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레이첼은 꿈 속의 세계에서 얻은 성취를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레이첼이 더 이상 김하진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본편엔딩 이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나가기 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했습니다(지루하다는 평이 나오도록 수련과정의 비중이 높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껍질을 깨고 나온 레이첼은 채나윤의 눈에도 이전과 사뭇 달라졌습니다.


이 외전의 끝에서, 공주님은 한때 자신의 거울상이었으며 이제 똑같은 패배자가 되어 꿈 속에 협력관계를 쌓은 채나윤과 마지막으로 교차됩니다.


망가졌던 회귀템을 수복한 채나윤은 이 세계선을 떠나기 전에 레이첼을 만나러 왔습니다.


히로인 레이스는 이미 승자가 정해져 버렸고, 그 채나윤조차도 망한 게임 탈주하고 과거로 돌아가 리트라이 하려는 앞에서,


아직 시간도 기회도 남았다며 포기하지 않겠다 선언하는 레이첼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감이 교차하게 합니다.


작품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두 히로인은 그렇게 최후까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헤어졌습니다.


가장 선명했던 라이벌 관계 하나가 그 끝을 맺었습니다.


회귀한 채나윤은 자신보다 경험이 10년 부족한 과거의 레이첼과 어떤 경쟁을 성립시키지 않을 것이며, 본편 세계선에 남은 레이첼은 두 번 다시 채나윤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김하진을 두고 공공의 적이었던 대장에게 새로이 도전하겠지요. 극복에 대한 결의를 품고서.


꽤 먹먹하고, 기막히게까지 느껴지는 구도입니다.




...하지만, 히로인별 루트를 외전으로 낸다는 말에 다수의 독자들이 기대한 전개와 다소, 아니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련하고 결연하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슬프고 잔혹합니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꿈엔딩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아름다움은 모르겠고 그냥 싫다는 분도 많으실 겁니다.


마지막에 살짝 반전을 걸어두긴 했지만 레이첼이 대장엔딩 세계선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 데 비하면 그 보상은 너무 작게만 느껴집니다.


히로인 개별 외전에서 즐거움보다 안타까움이 더 진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건 이 바닥에선 좀... 위험하죠.


어찌보면 본편 에필로그 상태와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채나윤은 물러나고, 유연하는 지켜보고, 레이첼은 이별과 기싸움하는 구도(아니 지금 보니 유연하는 여기서도 중간맛이네) 자체는 전과 동일하니까요.


레이첼 지지자들이 원했던 것은 레이첼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꿈꾸다 깨어나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레이첼 엔딩을 보고 싶으면 레이첼이 김하진 NTR에 성공하는 팬픽을 기다려야 하겠군요.




그리고 이 외전에는 작지만 꽤 치명적인 설정 오류가 존재합니다.


햄프턴 관련입니다.


레이첼을 괴롭혀온 그 사건의 발단은, 어린 레이첼이 과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장소에 무단으로 가보려다 경호를 벗어나 마인들의 표적이 되었던 거라 합니다.


근데 본편 클랜시 아일렛 에피소드에서 레이첼이 돌출행동 했다가 큰일날 뻔하고 부모님한테 혼나는 대목이 있었잖아요...


아, 망했습니다. 이건 양립 불가능합니다.


어머니는 원래 멀쩡히 살아계셨고, 공주의 죄의식이 그런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면 경매장이 마인들에게 습격받는 위기상황에서 김하진을 뒤쫓으러 혼자 튀어나갔던 행동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꿈이니까, 세계선이 달라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본편 A/S적인 성격을 띠는 이 외전의 의의와 어긋나게 됩니다.


아니 여기서 이걸 에러를 내면 안 되지...





8. 채나윤


채나윤은 김하진과 궁술 내기를 약속한 큐브 1학년 1학기 그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이건 채진윤 사망부터 본편 엔딩까지 약 250화 내리 고구마에 시달린 채나윤과 독자들을 위한 설탕물 폭탄입니다.


작가는 채나윤의 해피엔딩 조건을 달성하는 동시에 본편과 이 외전의 세계선 양자를 모두 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부연을 달아놓았습니다.



- 1회차 세계선에서 최종보스인 바알을 이미 물리친 특전으로, 2회차 세계선에는 처음부터 바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알의 화신체였던 벨도 없으며, 이연준과 벨에 의해 악마의 씨앗이 심겨졌던 채진윤도 여기선 악마와 관계가 없습니다. 여전히 식물인간이긴 합니다.


본편에서는 채진윤을 죽이고 나서야 흡연을 재시작한 김하진이 어쩐지 처음부터 담배를 뻑뻑 피우는 등 그 밖에도 자잘하게 바뀐 부분이 있습니다. 원래 바알이 없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신종학은 무슨 보정을 받았는지 그대로 있습니다. 하긴 채나윤이 회귀한 부작용으로 신종학이 사라져버린다면 스토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겠지요.



- 이 회귀는 세계선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세계선은 독립되어 서로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즉, 본편 엔딩 자체가 덮어써진 건 아닙니다. 원래 세계선의 김하진은 계속 대장과 살아갈 겁니다. 레이첼이 NTR에 성공하지 못했다면요. 채나윤도 회귀가 원래 세계의 모든 것과 작별하여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이라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도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도.



- 그렇다면 이 세계선의 김하진은 조건이 다른 평행세계의 동일한 타인일 뿐인가? 일단 궁술 내기가 약속된 시점에 이 세계선에서도 이미 꽤 여러 사건을 같이 겪은 상태로 시작하는 거고, 진행 도중 의외의 인물이 또다른 단서를 제공합니다. 


분명 회귀는 채나윤이 했건만 진사혁 또한 전회차의 영향으로 김하진에게 뭔가를 느낍니다. 시스템을 통해 제공되는 설명으론 진사혁의 에고가 회귀로도 전부 감기지 않아 희미한 잔영이 남은 거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2회차 세계선은 1회차 세계선을 되감아 만든 거라는 의미가 되므로 2회차 세계선의 김하진도 과거의 그가 맞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앞뒤 맞춰 이해하기보다 삼위일체처럼 각 항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편할 것 같습니다.



채진윤을 죽여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김하진과 본편의 그 모든 고통을 다 견디고 회귀한 채나윤은 무척 강력한 시너지를 냅니다.


2회차 채나윤은 여러모로 증폭되어 있습니다.


끝판 다 깨고 회귀한 짬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본편 이상으로 애 같은 모습도 자주 보이고, 그놈의 철벽이 아직 덜 무너져 마음대로 안 되는 동안 엄청나게 답답해하며, 잘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 껌딱지처럼 달라붙고, 사실 그 전에도 별의별 이유로 달라붙었고, 좋다고 헤실거리다가도 문득문득 이번 회차도 잘못될까봐 공포에 떱니다.


그 모든 면모가 본편을 통해 축적된 서사 아래 일관되며, 더러 만화적으로 표현됩니다.


이 어설픈 회귀자가 아직 대형사고 안 쳐서 마음껏 좋아해도 되는 퓨어한(?) 김하진을 어떻게 함락시켜 가는지 그 과정을 주절주절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불균형하지만 내적으로는 묘하게 균형이 맞는 동반자적 구도입니다.


수저하고 순위가 워낙 심하게 차이나다 보니 사회적으로는 신분차의 극치로 비칩니다만 배경이 큐브인 이상 일단 같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입장이고…


뭐 찾거나 만들거나 머리를 굴리는 등 트리키한 능력이 요구되는 구간은 김하진이 해결하고, 무력이든 재력이든 권력이든 강력한 힘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채나윤이 밀어버리는 상호보완.


서로 숨기고 있는 비밀의 무게는 빙의자나 회귀자나 남한테 공개 못 한다는 면에선 엇비슷하고(원작자 쪽이 훨씬 더 심각하긴 하지요), 서로의 비밀은 각자의 비밀에 의해 지켜집니다.


이 외전은 김하진이 히로인에게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밝히지 않는 유일한 루트입니다.


채나윤은 김하진을 신비의 덩어리로 남겨둔 채 그냥 믿으려 하고, 김하진은 시스템창 덕분에 채나윤이 회귀했다는 건 알게 되지만 그 내막은 전혀 모릅니다. 전회차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김하진이 속으로 헛발질하는 내용을 보고 있으면 실소가 다 나옵니다.


연령대도 얼추 맞게 됐습니다. 실제나이 26세-17세로 나이차가 무척 많이 났던 둘은 채나윤이 본편엔딩을 다 보고 회귀한 덕에 거의 동갑, 아마도 채나윤이 한 살 많은 정도로 맞춰졌습니다. 한때는 김하진이 채나윤을 어린애 취급했건만 이제는 채나윤이 김하진을 어린놈 취급하는 것이나, 20대 중반 둘이서 10대의 연애를 하는 것도 재미있는 점입니다.


김하진은 채나윤이 전회차부터 가져온 고민과 트라우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워내고, 채나윤은 김하진을 그늘과 거리가 먼 인생으로 끌고 갑니다.


이 세계선은 본편과 외전을 통해 제시된 여러 가능성 중 유일하게 김하진이 큐브를 탈주하지 않는 루트이기도 합니다.


위색단의 일원이 되어 아카데미를 뛰쳐나간 본편의 김하진은 거의 마지막까지 집에 갈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에피소드를 깨고 나서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이 세계가 멈춰버릴 것이란 공동저자의 말에 잔류를 택했습니다. 이 세상 멸망하게 놔두고 집에 가기 vs 이 세상에 남아 대장을 포함한 모두에게서 잊혀지기 중 후자를 선택한 것이니 대장엔딩이라도 오직 대장 때문에 남은 건 아니게 되었죠.


다른 외전의 김하진은 뭐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귀환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모든 의욕을 상실해 큐브를 떠났다가 한참 뒤에야 히로인과 정 붙이게 되지요. 좌절과 체념이 선행하고 연애와 만족이 뒤따르는 이 구성은 앞서 본 레이첼 외전 꿈속이나 뒤에 살필 유연하 외전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2회차 채나윤은 미처 2학년에 돌입하기도 전에 아직 돌아갈 가망이 있는 김하진에게서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버려요.


학창시절의 짧은 인연을 잊지 못해 자신의 본래 세계선을 버리고 넘어온 여자가, 상대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남자로 하여금 귀환할 마음을 접게끔 만든 겁니다.


서로 상대 때문에 원래 세계를 포기함으로서 둘은 진정 동급의 바보들이 되었습니다.




뭡니까 이 이민자 로맨스.


회귀하면 바알 없다는 본편 에필로그 기적석 설정부터 뭔가 작위적인 인상인데다 성장서사 담당캐를 굴려먹은 결론이 극복보다 리겜이라는 게 못마땅해서 좀 찝찝하게 읽기 시작한 걸 그래 너네끼리 잘살아라로 손들게 해버리네.


큐브 3 히로인 중 주인공하고 혼자 서로 반말 놓던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완성시켜 버리냐…


원래 동급생인 김하진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던 레이첼 유연하가 특이했던 거니만큼 얘가 이렇게 발전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직한 마력 괴물/지구력 괴물 컨셉이 채나윤 특유의 감정강도/지속성과 상통하듯, 누구 때문에 활을 버리고 검을 들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훨씬 더 강해졌던 경력과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채나윤 외전 마지막 화 댓글창은 본편을 이렇게 썼어야 했다 / 본편이라니 무슨 소리임? 이게 진엔딩인데로 양분되어 있네요.




걸고넘어질 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 바보 커플의 미래에 걸리적거릴 장애물들을 큐브 졸업 전에 다 처리하려니 2회차 고속성장 컨셉을 택한 건 좋은데, 회귀 당사자인 채나윤과 최대 수혜자인 김하진은 당연하다 해도 김수호와 신종학까지 과하게 성장했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건을 조성하긴 했는데 결과가 지나쳤어요. 


차라리 그 놈을 채나윤한테 맡겼다면 자연스러웠을 것 같은데. 날짜 계산도 좀 이상하고.


신종학 떼어놓기나 에반젤 양육 문제는 너무 편하게 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간단히 해결되고, 애완동물 들였다가 역할 없이 잊어버리는 건 하양이 때보다 더합니다.


공포영화 못 보는 건 채나윤보다는 유연하 속성이 아닌가 싶구요. 본편 중후반부터 위험한 일을 즐긴다 나왔고, 몽중화에선 혼자 하수도 괴물 다 때려잡으면서 전진하던 애가 이제 와서? 레이첼 캐릭터는 몽중화에 맞춰놔서 본편 큐브에서 보여준 모습보다 더 굳어 있는 것 같고.


근데 본편에서 가장 답답했던 둘의 서사를 하도 달달하게 이끌어가다 보니까 웬만한 건 지금 그게 문제냐가 되어버리네요. 어떤 부분은 오히려 속전속결로 치워서 반갑게까지 느껴지는 기현상까지.


뭔가 깨달음을 얻은 기분입니다. 히로인 하나 가지고 고구마만 수백편을 끌고 가면 이럴 수도 있구나.


도저히 따라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무척 신기한 사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못내 신경쓰이는 부분은 본편 에필로그부터 쭉 묘했던 위색단과 채주철 취급입니다.


본편 오르덴전 검은 연꽃 의뢰비보다 더 많이 받아처먹어 놓고 도왔으니 빚 갚았다며 유유히 다음 목표 털러 가는 위색단은 아군화된 빌런에게 한없이 관대한 경향이 그대로임을 보여줍니다.


채주철은 그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양심적인 내부자를 암살하는 걸로도 모자라 대규모 학살로 키워서 남의 가족 몰살시켜놓은 장본인 가지고 가족애로 감동장면 연출한 본편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 외전에서도 방향성이 동일한 기출변형.


내부고발자로서 자신이 저지른 일까지 전부 한꺼번에 까버렸던 본편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게 갈 줄이야…


일단 흑막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과 징벌을 집중하는 마무리 부분은 정의구현보다도 앞으로 주인공 커플이 마음놓고 살아갈 터전을 닦는 의미가 더 강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는 여백에 꽤 많은 부분을 맡겨놓은 편이라 더 복잡한 느낌입니다. 각자 믿고 싶은 대로 상상하면 될 듯.




마지막으로 이 외전을 낙장불입의 이민자 이야기로 매듭짓는 진사혁과 김춘동.


주인공 커플이 드디어 결합한 반대편에서 이쪽은 완전히 엇갈려 버렸습니다. 세계를 넘어간 자들은 모두 도달한 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군요.


컨셉 참 확고히 잡았는데 안 그래도 작품에서 가장 불행했던 놈을 기어이 사망 확정시켜야 했는가 싶기도 합니다. 큐브 2학년 시점에 김춘동이 이미 죽어있으면 훨씬 뒤에 아카트리나로 돌아간 본편 진사혁도 산 김춘동은 못 만날 듯...





9. 만약의 이야기


유연하는 외전마저 독자노선을 탑니다.


본편에 남는 것도 본편에서 탈주하는 것도 아닌 처음부터 본편과 유리된 세계선.


제목부터 만약입니다.


얼마나 다르냐면 유연하가 큐브를 졸업한 뒤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월권 스캔들이 터지고, 그 이후에까지 광오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다릅니다. 채진윤은 그냥 멀쩡히 잘 살고 있고, 에반젤은 직접 등장이 없습니다. 아니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신이 안 섭니다.



레이첼의 꿈 속처럼 일찌감치 귀환 불가 판정을 받아 의욕도 한 차례 싹 날려봤습니다.


대신 이번 외전은 언더독 감성과 유연하 고유의 캐릭터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세팅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의 이야기인 이 외전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계층적 격차가 부각됩니다.


레이첼 꿈속의 김하진은 혼자서 나라 하나를 구할만한 재력가가 되었지만 여기 김하진은 그 정도는 못됩니다.


오히려 모든 루트 중 가장 성공 못한 처지.


일개 경호원에 불과한 남자가 여기서도 여전히 특급 경영자인 여자와의 갭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이 외전의 메인 이슈가 됩니다.


해소할 이야기가 잔뜩이었던 다른 두 히로인과 달리 메인으로 삼을 에피소드가 많지 않아 본편 이야기를 아예 해체하고 재구성했는데도 분량이 다른 외전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습니다만 재미는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아예 별도 세계선이다 보니 다른 외전처럼 대전제를 익스큐즈하거나 설정 충돌을 신경쓸 일도 없어 오히려 깔끔하기도 합니다.


캐릭터성은 정말 제대로 밀고 갑니다. 여기의 유연하는 그야말로 유연하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앓는 패턴도 망하는 방식도 터뜨리는 방법도 유연하 그 자체입니다.


드디어 김하진을 획득한 뒤에도 작품에서 놀려먹기 가장 좋은 히로인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발휘됩니다.


채나윤편과 비교하면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갈릴 겁니다. 재미와 당도 면에서 삐까뜨거든요. 스타일과 방향성만 다릅니다.


채나윤 외전이 러브코미디물 소년만화라면 유연하 외전은 조금 더 드라마 맛이 납니다.


아침드라마뇌의 주인이 드라마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 이상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애같은 동급생(사실 회귀한 트라우마 덩어리)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걸 남자 쪽에서 튕기다 받아주며 서로 치유되고 물들어가는 그림이 좋으시다면 채나윤 외전이,


명석하지만 새침한 상류층 여자(저도 좋아하지만 오래 잡아뗌)를 스스로의 지위와 성취에 컴플렉스 있던 남자가 능글맞게 갖고노는 그림이 취향이시라면 유연하 외전이 입에 더 맞으실 겁니다.


고백씬마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막상막하의 연출을 보입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본격적으로 달달하고 유치해지는 장면들은 유연하가 짧은만큼 밀도는 오히려 높습니다.


유연하가 본편 내내 제대로 이겨 본 적이 없었던 채나윤과 모친에게 무슨 폭탄을 던지는지 유연하 지지자라면 정말 반드시 보시기 바랍니다. 해방감이 상당합니다.




만약의 이야기는 큐브 3 히로인 외전간에 묘한 밸런스를 완성합니다.


꿈 속의 레이첼과 김하진이 서로 구원받고, 회귀한 채나윤과 김하진이 서로 세상 하나씩 버렸다면,


이 세계선의 김하진은 유연하로 인하여 살 맛을 되찾았으며, 오직 야망을 향해 내달리던 여자는 남자 때문에 무슨 손해든 감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중간점에서 돌출하는군요.




그리고 유연하는 본편과 외전을 통틀어 그 복장을 입어본 유일한 히로인이 되었습니다.


소품 하나로 방점 제대로 찍었네요.





10. 


요즘 소 잃고 외양간을 정성스럽게 고치는 작품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본편 마무리를 그렇게 해놓고 외전을 이 퀄로 쓰냐…


채나윤편이 진엔딩 포스를 내고 아카데미를 포기한 유연하편까지 맞먹는 폼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몽중화도 속이 쓰릴지언정 못 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각 히로인마다 특별한 요소를 하나씩 받기도 했죠.


레이첼은 비록 꿈 속의 꿈일지라도 웹소설 작가 김하진의 작업실에 다녀온 유일한 히로인이 되었습니다.


채나윤은 세계선을 갈아타서라도 그 김하진이 히로인 한 사람 때문에 스스로 잔류를 선택하게 만드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유연하는 완전한 if 세계선일지언정 작품 전체 마지막화에서 웨딩드레스를 착용한 것만으로도 꿀릴 게 없어졌습니다.


와 진짜 이게 되네.


외전 쓰는 동안 별그프 연중하고 판 크기 적당히 유지하면서 핵심인물 몇 명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니 훨씬 나은 결과가 나오네요.


진사혁은 채나윤 외전에서 대우가 괜찮긴 했지만 정작 자기 외전을 못 받아서 춘동이는 영원히 구제 못 받게 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진사혁은 본편 마지막까지 김춘동의 히로인으로 남았으니 진사혁 외전이 안 나온 게 김춘동에게 다행인가 불행인가...


본편을 망치면 외전을 아무리 잘 써도 구매수가 안 돌아온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교훈도 확인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