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노년 - sokeulateseu igseupeuleseu nonyeon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노년 - sokeulateseu igseupeuleseu nonyeon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세네카는 인생이라는 화살이 어디로 날아갈지를
예상해보라고 말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유배, 고문, 전쟁, 난파 사고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 하라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한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중략)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대재앙이 닥쳤을 때 스토아주의자들은 무화과나무에 무화가가
열리거나 조타수가 맞바람을 만났 때처럼 태연하다고, 에픽 테토스는 말한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최소한 스토아철학은 그렇다고 말한다.

- 12장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中 _page 417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의 이 책은 흔들리는 특급열차를 타고 철학자의 흔적을 쫓는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답게 어려운 철학자의 논지들을 무겁고 지겹지
않는 유머코드와 접목하여 독자들에게 실생활에서 철학을 어떻게 적용할지 전달하고 있다.

책 속에는 열 네명의 철학자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왜 책제목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시중에 나와있는 철학책들과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철학이라는 지식 체계만 배운다.
그러니까 정말 인생이라는 삶 속에서 꼭 필요한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법이 빠져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봉착하는 난관, 의문, 사유를 철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는 그 시작을 소크라테스라고 생각했고 질문의 대화로 시작되는 철학자들의 흔적을 찾아 열차에
탑승했다. 저자는 철학자들이 실제로 머물며 사색했던 장소로 향하며 동일한 의문을 경험한다.

저자는 제이컵 니들먼의 <철학의 마음>이란 책에서 생각을 정지시키는 문장을 발견한다.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질문을 경험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은 유명하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생각들을 질문을통해 교착 상태로 문제를 더욱
야기시키며 결론을 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공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아래 인용문 참조)

보통 들은 질문을 그대로 다시 물어보면 사람들은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제니퍼는
아니었다. 내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질문의 프레임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중요하다.
(중략)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page 70~71)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물인가?
그냥 외부나 타인들의 시선에서 결정된 판단에 따르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봐야 한다.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처럼 내가 쓰고 있지만 책에서는 가볍게 터치하고 있다. 아침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피식 웃다가 심각해지는 철학자 이야기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마 제국 제16대 황제)이며, 그의 저서 <명상록>의 이야기다.
<명상록>에는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이 검열없이 써내려간 책이라고 한다. 내면의 갈등이 실시간으로
쓰여져 있는데, 이불 안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불면증환자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그는 햄릿처럼 갈등하다 '해야 할 중요한 일들과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사상들이 이불 밖에'
있음을 알고 일어난다. 이로써 철학은 철저한 자기계발서가 분명하다.

에릭 와이너가 소개하는 열네 명의 철학자들의 철학은 철저히 저자 개인의 추천부분만 발췌한 것이라
아쉬운 부분이 없잖지만 최소한 우리가 삶 속에서 쉽게 와닿는 부분이 많아 부담없이 읽힌다.
또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자의 삶도 러프하게 이야기해준다. 철학자의 인생전반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고통과 쾌락과 사유들은 짧은 단락임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염세적인 철학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와 제대로 즐기며 살 방법을 제시한 에피쿠로스,
어떠한 삶의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의지력을 알려준 에픽테토스, 그리고 보부아르가 말하는
늙어가는 관점이 맘에 든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나처럼 열네 명의 철학자 중에서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철학자를 맘 속으로 찾아내고 흡족한 마음으로 삶의 지침으로 삼지 않을까.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자였다. 철학적 의미에서 관념론자는 이상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란 뜻이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철학자들이 외부세계를 설명하려 들때 내면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두운 곳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 얘기는 다른 철학자들의 쉬운 시도를 빚대는 말이다.

또한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대한 얘기는 이 책에서 건진 소득이다. 스토아학파인
에픽테토스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상반되는 철학자이긴 하지만 쾌락의 본질적인 의미를 말한 것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외부에 위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만족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주장은
합리적이다. (아래 인용문 참조)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이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page 197

에피쿠로스는 호화로운 생활이 주는 쾌락은 지지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갖지 못한 고통으로(분수에
맞지않는)힘들 것이며 불필요한 욕망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호사스런 일회성 쾌락(파티)은
좋다고 했다. 이런 융통성이 있는 자유로운 철학자라니.. 좀 숨통이 트이지 않나?

자신의 의지(생각)을 굳건히 지키는 철학자라면 단연코 '에픽테토스'를 꼽지 않을까. 아우렐리우스나
간디도 스토아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실천자였다. 힘으로 나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나의 허락없이
나를 해칠 수 없다고 말했던 간디처럼 이타주의의 선봉자들은 대부분 스토아철학을 추구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많은 영웅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현실적으로 지지하고 따르고 싶은 철학자라면 '보부아르'가 될 것 같다. 물론
저자가 보부아르의 <노년>이란 책에서 나름대로 추려서 목차를 만든 것이겠지만 10가지 지침은
너무 괜찮아 보인다. 보부아르의 '잘 늙어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 목차를 적어본다.


1. 과거를 받아들일 것
2. 친구를 사귈 것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7. 아무것도 하지 말 것
8. 부조리를 받아들일 것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10.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노년은 절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라는 보부아르의 코웃음은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과거를 받아
드리면서 자신의 노년을 수용하라는 그의 지적은 마땅히 당연하다고 본다. 그것을 거부하고 역행하는
행동은 일곱 살짜리 늙은이로밖에 안보이는 것이다.

두고두고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젊은이들이 읽어도 좋겠지만 내 생각엔 중년의 서재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꺼내 볼 책이란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노년 - sokeulateseu igseupeuleseu non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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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어크로스출판그룹()

들어가는 말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가 아니라 어떻게.

소크라테스처럼 궁굼해하는 법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 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잘몬된 양육을 비롯한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무지에서 나온다. 만약 우리의 실수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자동적으로. 좋은 아빠가 무슨 뜻인지 아는 것, 참으로 아는 것은 곧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같다.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루소처럼 걷는 법

루소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훈연한 브리치즈와 인스타그램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문화적인 것이다. 어쨌거나 1970년대 사람들은 활주로만큼 넓디 넓은 털 카펫과 넥타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오늘날에야 우리는 그것들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경치처럼 자연스러운 것조차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일 때가 많다. 대부분의 유럽 역사에서 사람들은 산맥을 야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자원해서 산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산이 경외의 대상이 된 것은 18세기 이후였다. 루소는 우리가 그 실체를 알아보기만 한다면 사회적 관습을 바꿀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사회의 인위적 기교는 오래된 나팔 청바지만큼이나 쉽게 갖다 버릴 수 있다.

루소의 야만인은 스스로를 향한 사랑을 자주 경험하는데, 루소는 이를 자기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런 건강한 감정은 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랑과는 다르며, 루소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을 자기 편애라고 부른다. 전자는 인간 본성에서, 후자는 사회에서 비롯된다. 자기 사랑은 혼자 새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자기 편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있는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샤워실에서 노래를 더럽게 못 부를 수도 있다. 하자만 그 기쁨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며 타인의 의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루소는 이것이 진실한 기쁨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루소가 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 가축도, 사륜마차도, 길도 필요 없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의지는 끝없는 노력이다. 만족 없는 욕망이다. 영화 없는 시사회, 절정 없는 섹스다. 의지는 스카치위스키 두 잔으로 충분할 때 세 번째 잔을 주문하게 만든다. 의지는 머릿속을 긁어대는 소음이다. 가끔 약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보통은 스카치위스키 네 잔을 마신 후에도 절대 침묵하지 않는 소음이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의지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친다.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예술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 예술은 한낱 개념을 넘어서는 지식이며, 그러므로 말의 표현 범위를 넘어선다.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운다. 욕망을,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 포르노는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체리 한 그릇을 그린 정물화 앞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배고픔뿐이라면 그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감정에서 추출한 정수라고 표현한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언가에 관한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극적인 사건에 덜 몰입하면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감정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있으며, 슬픔 안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싸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은 짧고 강렬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뭉근하게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을, 또 어떤 사람 사람은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만, 어쨌거나 고통은 고통이다. 만족에 도달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그는 그저 쾌락을 찬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쾌락을 분석해서 욕망의 분류 체계를 만들었다.

쾌락의 사다리 맨 위에는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욕망이 있다. 예를 들면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마시는 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 밑에는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욕망이 있다. 사막을 통과한 후에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 마시는 소박한 테이블 와인 한 잔, 마지막으로 피라미드 맨 밑에는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에피쿠로스가 말한 텅 빈욕망이 있다. 사막을 걸어서 통과한 후에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 테이블 와인을 마신 다음 마시는 값비싼 샴페인 한 병이 여기에 해당한다. 에피쿠로스는 이 텅 빈 욕망이 가장 큰 고통을 낳는다고 했다. 이 욕망은 만족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는 종류의 차이도 있지만 작용 속도의 차이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을 구분한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행위는 동적인 쾌락을 준다. 물을 마신 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만족스러운 기분(갈증 없음)은 정적인 쾌락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물을 마시는 행동은 동적인 쾌락이고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에피쿠로스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쾌락은 더 증가할 수 없으며 (눈부시게 밝은 하늘이 그보다 더 밝아질 수 없듯이) 그저 다양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산 신발 한 켤레와 스마트워치는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소비문화 전체는 다양한 쾌락이 곧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잘못된 동일시가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 쾌락의 다양성이 우리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듯이 쾌락의 지속 시간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20분간의 마사지가 10분간의 마사지보다 반드시 두 배 더 즐거운 것은 아니다. 평정심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화로운 상태이거나 평화롭지 못한 상태, 둘 중 하나다.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이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모든 말다툼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범주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양측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양측에게는 각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릇을 비효율적으로 넣어서 고성능 식기세척기의 세척력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핵심 역량, 더 나아가 자신의 남성성이 후려침 당하는 상황일 수 있다. 전쟁과 심술은 바로 이렇게 시작한다.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소셜미디어 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스시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진정한 기쁨에는 놀라움, 예상치 못한 전율이 있다. 또한 진정한 기쁨은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쓰디쓴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진정한 기쁨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기에 사라져도 그립지 않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불확실성이다.” 14세기 승려 요시다 겐코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만개한 꽃보다 막 꽃이 피어나려는 나뭇가지, 시든 꽃잎이 떨어진 정원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말한다. 벚꽃은 그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수명 때문에 사랑스럽다. 일본 연구자인 도널드 리치는 아름다움은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붙잡으면 부서져버린다.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깊은 밤 한 악마가 찾아와 내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온다. 이 거미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이 순간도, 나 자신도 전부 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끝없이 다시 뒤집힐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 중 하나인 너 자신도!”

니체가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이라 칭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원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만약 모든 것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인생에 가벼운 순간이나 사소한 순간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와 질량을 갖는다. “모든 행동은 똑같이 크고 작다.”

영원회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한 학자가 말한 결혼 테스트를 해보는 것이다. 긴 결혼 생활 끝에 막 이혼을 마쳤다고 상상해보라. 지금 아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전 파트너의 청혼에 다시 라고 답할 것인가?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감정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ㅏ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틀린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보자. 먼저 외부 사건(스토아식 표현으로는 인상”)에 대한 반사 반응(감정 또는 최초 정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발가락을 찧으면 소리를 지른다. 도로가 막히면 욕을 한다. 자연스럽다. 어쨌거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이 최초의 충격은 감정이 아니라 당황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같은 반사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고, 스토아학파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하지만 이 중 그 무엇도 우리의 허락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부정적인 최초의 정념을 존중하고 증폭시키기를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불행하기를 선택한고 있는 것이다.

인상에서 동의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식 멈춤이 도움이 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선명한 인상에 빠져들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인상이여, 잠시 기다리게.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해주게. 너를 따져보게 해주게.”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무인도에서 홀로 나이 먹는 여성을 상상해보자. 이 여성은 늙을까? 언젠가는 주름이 생길 것이고, 건강 문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노쇠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늙는 걸까? 보부아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 사회적 판결이었다. 배심원이 없으면 판결도 없다. 무인도의 여성은 생물학적 노쇠를 경험하겠지만 나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노인은 인생의 꼭대기 가까이에 서 있기에 더 멀리 내려다볼 수 있다. 이들은 과거의 희미한 윤곽과 어렸을 때는 파악하지 못했던 인생의 흐름을 분간하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조망한다. 또한 이들은 상서로운 우연을 알아채기 시작한다. 보부아르는 이를 여러 선이 한곳에서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아흔일곱 살까지 살았던 버트런드 러셀은 관심사의 원을 확장시켜서 더 넓고 덜 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아의 벽이 조금씩 약해지도록, 자신의 삶을 점점 더 보편적인 삶에 어우러지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인생을 강이라고 생각해보자. 둑 사이에서 가늘게 흐르기 시작한 강물은 돌 위와 다리 아래를 지나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강은 점점 더 폭이 넓어지고 둑은 점점 낮아진다. 물은 갈수록 더 잔잔히 흐르다 눈에 띄는 커다란 변화 없이 결국 바다와 어우러지고 고통 없이 독자성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