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들은 어떻게 메카의 방향을 알았을까 - museullimdeul-eun eotteohge mekaui banghyang-eul al-ass-eulkka

처음으로

Thinking Power Series - World History Collection 10

Fantastic Exploring of World History

: Developing Insights into World Change

Written by Kang Sun-joo.

Published by Sallim Publishing, 2018.




머리말 세계사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자

머리말

세계사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자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할 때이다. 세계사가 좋아서 혼자서 여러 책과 논문을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사학과의 몇몇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가운데 중국 청대사 연구자로서 매우 유명한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그분은 내가 세계사 이론이나 책에 대해 많이 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방학 동안 세계사 공부를 하고 싶으니 내게 아르바이트로 연구 조교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방학 때 도서관에서 그 교수가 세계사와 지구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관련된 논문과 책들을 찾아다 주는 일을 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한국학자가 쓴 백제사를 영어로 번역한 책을 찾았다. 정말 기뻤다. 1990년대 말 당시 한국사 관련 영어 책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사도 그분에게는 세계사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책도 빌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 교수는 책을 보자마자 한국학자들의 글은 너무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역사가들은 다른 지역에서 나온 자료와 자국에서 나온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비교·검토하면서 자국사를 서술하지 않고 편협한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교수가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선입견으로 한국 사학계를 비판하는 것이 싫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어로 번역된 한국사 논문이나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교수가 국내의 다양한 논쟁이나 해석을 잘 알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내가 배운 한국사가 너무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 반성적으로 한국사를 바라보지 않았던 점을 부인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받은 한국사 교육에서는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전쟁 속에서 온 민족이 하나로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했다는 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으로 설명했다. 여전히 초등학교에서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사를 볼 기회를 주지 않고 내가 받았던 한국사 교육과 같은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사 교육은 오늘날과 같은 전 지구화시대에 세계에 나가 외국인과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더 많은 ‘최초의 발명품’,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발명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세계사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아직까지는 한국사 교육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국사가 다르게 보인다. 또 세계사는 한국사와 다른 인류의 경험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 문화가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러한 이야기는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고 또 어떻게 변할지 큰 시각에서 바라볼 안목을 키워준다. 여러분도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세계사의 매력에 빠져보고, 또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각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18년 4월

강선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의미가 있는 사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면 세계사는 여러 나라, 여러 사회의 역사를 병렬적으로 나열해놓은 것이 아니라, 인류를 하나의 종족으로 보면서 오늘날 인류가 어떻게 이렇게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 서술해놓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라고 해서 허구의 소설이나 동화는 아니다. 철처하게 인류가 남겨놓은 기록・유물・유적 등을 탐구하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상상력으로 연결한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가면서 흐른다. 인류에게 중요한 과거의 사건들을 찾아 그 사건들 속 미스터리를 풀어보자.

자, 그럼 지금부터 떠나볼까?


제1장 시간 속의 인류와 만나는 여행


01 시간의 은하수를 타고 지구 여행

01

시간의 은하수를 타고 지구 여행

시간의 은하수를 타고 지구를 여행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과거의 시간으로 가서 지구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었을 만한 일을 만나는 여행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옛사람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만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없는 것은 여러 자료를 연결하여 과거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해야 한다.

언제 어디로 가서 누구의 어떤 경험을 만날까?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퀴즈를 풀어보자. 그리고 어떻게 여행할지 생각해보자.

중국의 4대 발명품은?

중국 지역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된 것은 매우 많다. 교과서나 인터넷 지식백과에 찾아보면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종이·화약·나침반·인쇄술을 꼽는다. 자석으로 된 나침반은 2,000여 년 전 중국의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때에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한 바다를 항해하는 데 사용한 나침반은 중국의 송나라(960~1279) 때에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나라의 나침반 모양

지반 위에 놓고 자유롭게 회전하게 하면 정지되는 점이 있다. 정지되는 점에서 국자 자루가 가리키는 곳이 남쪽이었다.

지금은 거리마다 표지판이 있어서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표지판이 없는 산에 혼자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것도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이라면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 혹시 여러분은 핸드폰을 꺼내 들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어떻게 했을까?

나침반은 사람들이 낯선 곳을 찾아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그런데 나침반이 없던 때에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멀고 먼 지역으로 가서 물건을 교환했다. 그들은 어떻게 방향을 알았을까? 해·달·별을 보며 방향을 파악하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해류나 해풍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 항해했을 것이다. 송나라에서 발명된 항해에 사용할 수 있는 나침반은 후에 서아시아의 이슬람인을 통해서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슬람인은 나침반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여행하면서 이 궁금증을 해결해보자.

중국의 명 제국(1368~1644) 때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들을 무슬림이라고 한다)이었던 정화(鄭和: 본명 마삼보)는 황제의 명을 받아서 수백 척의 거대한 선박을 이끌고 1405년부터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인도양 여러 곳을 누비는 여행에 나섰다(정화의 원정).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동부의 모가디슈와 말린디에 이르는 길고 긴 항해였다. 그는 각 지역에서 명 황제가 주는 선물을 전달하고, 또 그 지역에서 명 황제에게 바치는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항해를 위해서는 나침반만이 아니라 해류나 해풍 등 항해에 필요한 지식, 음식을 상하지 않게 저장하는 비법과 기술, 그 밖에 많은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화의 원정 이후, 중국의 황제들은 더 이상 먼 바다를 건너 다른 지역에 원정을 내보내지 않았다. 대신 15세기 후반, 포르투갈·에스파냐 등 서유럽인이 먼 바다로 나가 아프리카를 돌아 서아시아와 인도・동남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후 서유럽 여러 왕국의 상인들은 배를 타고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와서 교역하자고 요구했다. 마젤란이 이끌었던 함대는 에스파냐를 떠나 대서양과 태평양·인도양을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이렇게 서유럽인은 활발하게 바다를 가로질러 여러 곳으로 나가 교역했다.

그런데 왜 중국 왕조는 정화의 원정 이후에 더는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 지역, 인도나 아메리카 지역과 직접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또 16~17세기 무렵, 서유럽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은, 왜 먼 바다를 돌아 인도・동남아시아・동아시아 지역으로 나가 무역을 하려고 했을까?

• 정화의 원정로

정화는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이자 탐험가・외교관 ・정치가이다.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7차에 걸쳐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 아스트롤라베

정교한 천문 도구로서 태양, 달, 행성, 별의 위치를 예측하는 기능을 했다. 천문학자뿐만 아니라 항해가에게도 널리 사용됐다.

15세기 이후 유럽인은 아스트롤라베라는 천체 관측 기구를 가지고 드넓은 바다를 항해했다. 아스트롤라베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만든 아스트롤라베로는 땅 위에서 자신의 위치만 알 수 있는 정도로 기능이 매우 단순했다. 배 위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인과 유럽인들이 몇백 년 동안 계속 개선해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위치와 시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기구로 발전시켰다. 배 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나침반과 아스트롤라베는 사람들이 더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킨다.

중국에서는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화약을 군사 무기로 사용했다. 언제부터 화약이 군사 무기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8세기, 10세기, 12세기 설 등 다양하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화기(화약을 사용한 무기)가 개발된 것은 10~12세기 사이(송 시대)라고 한다. 화기는 처음에는 화살이나 창끝에 화약통을 달아 발사하는 원시적인 형태의 로켓 같은 모양이었다. 송 정부나 몽골 제국에서는 화약의 제조법을 국가 기밀로 하고 다른 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했다.

• 화승총(15세기 후반)

불이 붙은 화승을 점화구에 갖다 대어 총알을 발사하는 총이다. 개인용 화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화기 작동 방식으로, 서양의 아쿼버스, 일본의 종자도총 등이 이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고려에서도 12세기 초에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발화 무기(화약의 필수 성분인 초석이 들어 있지 않아 폭발성이 적지만, 화약과 비슷하게 불이 일어나게 하는 공격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화약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제조 방법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에 최무선이 원나라의 화약 제조 기술자 이원과 한 마을에 살면서 그에게 정보를 얻어 화약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4세기 후반에는 고려에서도 화약과 화기를 제조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기를 제조해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했다.

유럽에서는 15세기경에 칼·창·활 대신 총과 총포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승총은 15세기경 유럽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이 화승총은 임진왜란(동아시아 7년전쟁, 1592~1598) 때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들고 왔던 무기이다. 화승총은 조총이라고도 부른다. 16세기 유럽에서는 화기 제조술이 크게 발달하여 전쟁에서 소총 같은 화기가 주로 이용되었다. 중국 이외에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유럽에서 화기를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3세기에 몽골 제국이 다른 지역을 정복해나가면서 화약 무기에 대한 정보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몽골과의 전쟁 과정에서 화약 무기를 보게 되었고, 그런 무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제조하려 하면서 화기 제조술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유럽에 퍼졌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발달한 화기를 이용해서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화기가 발명된 곳은 중국인데, 화기가 획기적으로 발달한 곳은 유럽이다.

왜 중국이 아닌 유럽 대륙에서 화기 제조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게 되었을까? 여행하면서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불교가 탄생한 지역은?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어떻게 기원후 4세기경 고구려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불교는 현재 인도보다는 태국·라오스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기도한다. 티베트 불교도 유명하다. 태국의 불교 신앙과 한국의 불교 신앙은 어떻게 비슷하고, 또 어떻게 다를까? 한국·태국·중국·티베트·일본 등 불교가 전파된 곳에는 절과 탑을 지었는데, 어떻게, 그리고 왜 다를까?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슬람교는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완성한 종교이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태어났고, 후에 메디나로 이주하여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것을 헤지라(거룩한 도망)라 하고, 그 날짜인 622년 7월 16일을 헤지라 원년 1월 1일(AH로 표시된 것은 이슬람력을 의미한다)로 삼았다.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에 가면 오늘날 우리와 다른 달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도나 아라비아반도에서 멀린 떨어진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을까? 새로운 종교가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은 쉽게 개종을 할까? 그렇다면 왜 개종하게 되었을까?

중국에서 병마용이 발견된 곳은?

병마용은 진나라(기원전 221~기원전 206)의 시황제가 자신의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중국 시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시안은 이후 당나라(618~907)의 수도가 되었고, 진나라 때보다 당나라 때 더 유명해졌다. 당나라 때는 시안을 장안이라고 불렀다. 장안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교역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유대인·무슬림 상인도 포함돼 있었다.

• 병마용갱

중국 시안 진 시황의 무덤 아래에서 발견된 병마용갱. 1974년 우물을 파던 양취위안이라는 농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당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현재 시안의 박물관에 전시된 당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유물은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바다를 건너 당으로 와서 교류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당의 장안에는 세계 어떤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교역하러 왔을까?

신라에도 혹시 세계 각 지역의 사람들이 왔을까?

9세기(이슬람력으로 3세기) 아라비아인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드비가 편찬한 지리서 『도로와 왕국 총람(도로와 왕국 안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깐수의 맞은편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 여러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들로 나뉘어 있다. 그곳에는 금이 많다. ……이 나라에 온 무슬림들은 여러 가지 좋은 점 때문에 영구 정착하여 떠날 줄을 모른다.

• 당삼채 곱슬머리 인형

이 도자기 인형은 어느 지역에서 온 사람을 묘사한 것일까? 664년 섬서성 정인태묘 출토.

9세기 이후 만들어진 이슬람의 몇몇 문헌들은 자연환경이 좋고 금이 많아서 무슬림들이 신라에 와서 정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에서 비단・사향(천연 동물성 향료・사향노루의 사향선을 건조시켜 얻는다) 등이 났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들이 당시 진짜 신라의 특산품이었을까? 기후와 환경 변화, 사람들의 욕구 변화는 각 지역에서 주로 생산하여 수출하는 농산물・축산물도 달라지게 한다.

다시 지리서로 돌아가자. 이희수라는 학자에 따르면, 『왕국과 도로 총람』 이외에도 17명의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학자가 쓴 20여 권의 책에서 신라 관련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12세기에 알-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명확히 표시돼 있다.

학자들은 고려에도 무슬림이 살았다고 주장한다. 조선 시기에 제작된 고려 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는 고려의 현종 15년(1024)에 대식국(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열리자라는 사람을 포함한 100여 명이 와서 왕에게 토산품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에도 무슬림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회회교도(무슬림)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이니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입게 해서 다르게 보이지 않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4월 4일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중국 지역이나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서아시아(중동)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했을 뿐 아니라 무슬림이 이 지역에 정착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슬림은 어떻게 조선에서 사라지게 됐을까?

15세기 말 에스파냐 왕국의 후원을 받아 우연히 아메리카에 가게 된 이탈리아인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오기 전에 아메리카는 원주민(Native Americans)의 땅이었다. 그러니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에서 서쪽으로 항해해서 인도(그가 생각한 인도가 몽골 제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로 가려고 했다가 우연하게 현재의 바하마 제도, 이어서 쿠바에 도착했다.

16세기 이후 에스파냐·포르투갈·영국·프랑스 등 서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이주해 왔다. 아메리카로 건너가 정착한 서유럽인의 후손들은 18~19세기에 영국·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 등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나라가 미국·캐나다·멕시코·페루·브라질 등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이다. 이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서유럽인의 후손인데 왜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을까?

어떤 시기에는 동아시아인·서아시아인·동남아시아인이 바다의 패권을 장악하고 여러 지역과 교역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시기에는 서유럽인이 지구 전체의 교역을 장악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

아메리카로 건너가 정착한 서유럽인의 후손들은 18~19세기에 영국·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 등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나라가 미국·캐나다·멕시코·페루·브라질 등이다.

세계사 탐험이란 시간을 타고 지구를 여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선사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대로 탐험하지 않을까?’ 하며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한 왕조 시기에서 송 왕조 시기로, 또 15세기 에스파냐에서 18세기 아메리카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기원후 4세기 고구려로, 또 이슬람 세계와 고려・조선으로 왔다 갔다 여행을 하면서 세계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세계사는 국가들의 역사를 단순히 나열해놓은 것이 아니다. 만약 전 세계 국가들의 역사를 빠짐없이 모아놓은 것을 세계사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나라의 역사를 얼마나 오랫동안 읽어야 세계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각국의 역사를 몽땅 읽으면 과연 세계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한 걸까?

1920년대 영국에 『타임머신(The Time Machine)』과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 등의 공상과학 소설을 쓴 웰스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소설만 쓴 게 아니었다. 그는 역사도 많이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 개요(The Outline of History)』라는 책을 썼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그가 방대한 인류사를 집필한 것이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 대학의 역사가들, 즉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개별 국가의 역사를 연구했다.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사, 그리고 자국의 역사만을 가르쳤다. 필요할 경우 몇몇 나라의 역사를 부분적으로 조금씩 가르쳤다. 웰스는 그러한 전문가들의 역사 연구나 역사 교육 풍토를 비판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교양을 위해서는 국가사보다 보편사(오늘날 세계사와 같은 의미의 용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웰스는 “보편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가사들의 총합 이상이면서 이하”라고 말했다. 여러 국가들의 역사를 쓰고 그것을 책으로 묶는다고 해서 무조건 세계사 또는 인류사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웰스는 보편사를 국가사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사는 “특별한 국가나 특별한 시기에 대한 역사보다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양으로서의 인류사, 즉 세계사는 여러 국가의 역사를 나란히 배열해놓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쓴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타고 지구를 돌며 인류의 경험을 탐험하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이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가들의 경계를 가로질러 여행해야 한다.


02 ‘시간 속 지구 여행’의 큰 그림 그리기

02

‘시간 속 지구 여행’의 큰 그림 그리기

시간을 타고 여행하는 곳들은 인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면 어떤 사건들을 찾아야 인류의 경험을 큰 그림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까?

첫째, 과거에 여러 지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

둘째, 오늘날 세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

셋째, 여러 지역에서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과거의 비슷한 사건.

넷째, 여러 집단을 교류하게 하고 갈등을 일으킨 사건.

이 네 가지 종류의 사건들은 사실 겹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첫째 종류의 사건이면서 둘째 종류의 사건이기도 한 경우가 있다. 즉 과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으면서도 오늘날 세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도 있다. 또 셋째 종류의 사건이면서 첫째나 둘째 종류의 사건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구분하는 까닭은 한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측면을 살펴보자는 뜻이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

첫째, 여러 지역에 걸쳐 일어난 사건(현상)에는 어떤 게 있을까?

얼핏 보기에 먼 옛날에 일어나서 오늘날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과거에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기술·사상·제도·문화 등이 있다.

예를 들면 14세기 중엽에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이 질병으로 당시 유럽인의 3분의 1 이상이 죽었다. 질병이 한창일 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는 하루에 500~600명씩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노동력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농민과 노동자의 노동력이 귀해지니까 노동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했고, 이에 따라 식품류나 상품 가격도 올랐다. 비싼 임금 때문에 자신이 가진 많은 농지에서 농사를 지을 농민을 구하기 어려워 망하는 지주(농지의 소유자)도 늘었다. 지주도 형편이 어려워지니까 간혹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겼다. 그런데 농민도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세금이 너무 무겁거나 지주가 정말 너무한다 싶으면 농민이 난을 일으켜 지주를 공격하기도 했다.

흑사병이 많은 사람을 죽게 하면서, 지주・농민이나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전과 확연히 다르게 변화되었다. 또 농사짓는 방식이나 기술도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14세기 흑사병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매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사건이다.

이렇게 유럽의 흑사병처럼, 특정한 시기에 한 나라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걸쳐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획기적으로 변하게 한 사건들이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로마나 당・몽골・오스만 튀르크 등의 제국 건설, 임진왜란, 제1차・제2차 세계대전 등과 같이 그 시기에 그 사건의 영향이 한 나라를 넘어 여러 지역에 미친 사건들이다. 특정한 시기에 많은 사람에게,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 사건이 사람의 생활에, 여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질문해보자.

• 흑사병(페스트)의 확산

14세기 중엽에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이 질병은 당시 유럽인의 3분의 1이상을 죽게 했다. 그런데 흑사병에 감염되지 않은 지역이 있다. 그 지역은 왜 감염되지 않았을까?

둘째, 오늘날 이 세상이 형성되는 데 직접 영향을 준 과거의 사건·문화·기술이 있다.

종이・화약・인쇄술・항해술과 같은 물건이나 기술 발명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 언어와 문자・달력・시계・나침반・컴퓨터 등의 발명도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하다. 불교・기독교・이슬람교 등과 같은 여러 종교도 민족이나 인종 구별 없이 여러 지역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아직도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자본주의의 발생이나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 사회주의 사상의 탄생 등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건들은 첫째 종류의 사건이기도 하다. 즉 여러 지역에 걸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들 가운데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예로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저마다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고 긴 인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인류가 이러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만약 인류가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국가(통치 조직을 갖추고 일정한 영역의 사람들을 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