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 생활 - joseonsidae nobi saenghwal

한편, 사노비의 경우 한 가호의 노비가 그들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그 상전으로부터 독립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가에 따라 전자를 솔거노비 또는 가내노비라 하고 후자를 외거노비라고 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공노비는 거의 대부분 외거노비의 범주에 속한다. 솔거노비는 독자적인 가계나 재화 축적의 기회, 행동의 자유 등이 주어지지 않았고 일부는 주인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대부분 하인으로서 잡역 및 농경에 최대한 사역되었다.

이들은 고공(雇工)과 더불어 상전의 호적에 기재되었으며 조선시대 노비 가운데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외거노비는 주인의 직접적인 부림에서 벗어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납공공노비의 경우와 같이 상전에게 매년 신공을 바쳐야 했다.

이들은 주인 또는 타인의 토지를 전작해 대략 수확의 반을 전작료로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경우에 따라 재화 축적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들은 생활면에서 양인 전호와 비슷했고, 이들 외거노비가 전체 노비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가옥·토지뿐만 아니라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고, 또한 주인의 농장 관리인이 되어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매우 높은 자도 있었다.

조선 전기 농경에서 노비 노동의 수요는 양반 귀족층의 농장 소유의 발달과 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사전 개혁 이후 위축되었던 그들의 농장은 세종 때부터 확대, 발전해 여기저기 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들을 농장에 투입해 경작하게 했다.

그 가운데에는 수 천의 노비를 거느리는 광대한 농장이 경영되기도 했다. 태종 때의 홍길민(洪吉旼), 세종 때의 안망지(安望之)의 처 허씨(許氏), 문종 때의 유한(柳漢) 등은 1,000여구의 노비를 소유했고, 성종 때의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은 무려 1만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들은 대부분 주인의 농장에서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농장에서 노비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정도였다.

또한, 양반들의 농장이 발달됨에 따라 농장주들은 그들의 권세를 빙자해 국가로부터 사노비에 부과된 요역이나 공부의 면제는 물론 전조도 가볍게 징수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그리하여 이들 노비에게 부과되었던 요역과 공부까지 더해 부담해야만 했던 양인들은 그들의 과중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농장에 투탁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노비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하였다. 당시 노비 가운데에는 농업 이외에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의 대부분은 공노비였으며, 사노비 가운데에는 상업에 종사해 부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 노비 중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한 노비의 비중이 매우 낮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 사노비들은 대체로 양반·양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지만 능력 여하에 따라서 엄청난 재력을 보유할 수도 있었다.

성종 때 8천여 석을 보유한 진천(鎭川)의 사노 임복(林福)은 자신의 네 아들을 종량(從良)하기 위해 2천여 석을 국가에 납곡했으며, 남평(南平)의 가동(家同) 또한 그의 아들을 종량하기 위해 2천 석을 납곡의 의사를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대토지의 사유화 경향이 심화되어 가는 15세기 말 이후 농장주 가운데에는 귀족·사족·관인·양인과 더불어 천인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의 경우 천인·노비들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노비는 상전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시대와 같이 가옥·토지와 함께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는 가옥·토지의 경우와 같이 노비의 매매 뒤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뒤 15일로 정했고, 100일 내에 관청에 신고해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규정했다.

또한, 노비가 상전의 재산인 우마와 동일시되었던 것은 우마매매한(牛馬賣買限)과 동일한 조항에서 취급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노비 제도가 문란했던 고려 말 우마의 값만도 못해 말 1필의 값이 노비 2, 3구에 해당했으며, 1398년의 기록에 당시의 노비 가격은 비싸야 오승포(五升布) 150필 값인데, 말 1필의 가격은 400∼500필에 이르렀다. 노비의 가격을 15세 이상 40세 이하는 400필, 14세 이하 41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하기로 했다.

그 뒤 『경국대전』에는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장년 노비의 값을 저화 4.000장, 15세 이하 50세 이상은 3,000장으로 규정해 상등마값 4,000장과 비슷하게 정했다. 이로 볼 때 조선 건국 이후 노비의 가격은 대체로 등귀했다고 하겠다.

한편, 사노비가 공노비로 되기도 하고 공노비가 사노비로 되기도 했다. 수많은 노비를 소유한 자가 대역죄(大逆罪)를 지었을 경우 국가는 엄한 벌로 다스리고 가산(家産)을 몰수함으로써 공노비로 삼았다.

또 사노비가 국가에 큰 공(功)을 세웠을 경우 국가는 면천방량(免賤放良)해 줌으로써 농공행상하는 대신 소유주에게 상당공노비(相當功奴婢)로 보상해 사노비가 되었다.

원칙적으로 노비는 성씨(姓氏)를 가지지 목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창두적각 蒼頭赤脚] 흔히 노비를 창적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노비의 상속에 관한 원칙은 1405년의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 20조’를 기초로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이에 의하면 먼저 노비 상속의 대원칙으로 부모가 생전에 분배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자녀의 생사에 관계없이 급여하되, 분배할 노비가 적을 때는 적자녀에게 고루 급여하고 만일 나머지가 있으면 승중자(承重子)주 01)에게 우선해 급여하고, 또 나머지가 있으면 장유의 순서로 지급하며 적처의 자녀가 없으면 양첩의 자녀순으로 지급하기로 규정했다.

또, 부모의 노비는 적자녀에게 평분하며 승중자에게는 5분의 1을 더해 주고, 양첩 자녀에게는 7분의 1을, 천첩 자녀에게는 10분의 1을 급여하도록 규정했다.

만약 이 규정에 따라 35구의 노비를 적자녀 3명, 양첩 자녀 1명, 천첩 자녀 1명에게 상속할 경우 적자녀 가운데 승중자에게 12구, 나머지 적자녀 2명에게 각각 10구, 양첩자에게 2구(적자녀가 12구일 경우 2구임.), 천첩자에게 1구가 배당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이 밖에도 ① 적자는 없고 적녀가 있을 경우, ② 적자녀가 모두 없는 경우, ③ 자녀가 없는 적모의 경우, ④ 자는 없고 여만 있는 적모의 경우, ⑤ 양첩녀만 있을 경우, 천첩자녀만 있을 경우, ⑥ 의자녀(義子女)의 경우, ⑦ 양자녀(養子女)에 대한 상속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대체로 적 자녀·양첩 자녀·천첩 자녀는 각각 분배에 차등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자·여의 차등은 없고 다만 승중자와 중자(衆子)의 차등이 있는 것은 후사를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사노비와 상전의 관계에 있어서 상전은 노비에 대해 어떠한 형벌이라도 가할 수 있으나 죽일 때에는 해당 관청에 신고해 허가받도록 규정했다.

만일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비를 죽일 경우, 곤장 60대와 도형(徒刑) 1년 또는 곤장 100대의 형벌에 처한 외에 피살된 노비의 가족은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소속을 바꾸어주는 조처를 취했다.

또한, 노비는 상전이 모반 음모가 아닌 이상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으며, 상전을 관에 고해 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강상을 짓밟는 것으로 간주되어 교살에 해당하는 중죄로 규정했다.

한편, 동일한 상전 소유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는 공노비의 경우 선상노비와 납공노비가 쉽사리 교체되듯이 서로 교체될 수 있었다. 솔거노비가 외거노비로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외거노비가 상전의 요구에 따라 가족 전부 또는 가족의 일부가 솔거노비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