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민 이름 - joseonsidae cheonmin ileum

조선의 신분제 실상은 6등급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

양반+상민=서, 양반+천민=얼

개똥이 등 노비 이름 기구한 운명

사노비, 양반 가문 지탱 핵심 노동력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로 움직여

공노비 해방서 폐지까지 100년

노비들의 장예원 방화서 300년 걸려

종로구 장예원(掌隸院) 터를 찾아 세 번째 길을 떠난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응달, 노비 이야기의 마지막 회다. 장예원은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함께 ‘장○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다루는 관청이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奴婢)란 남자 종(奴), 여자 종(婢)일 뿐 노예(奴隸)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관아 이름에는 버젓이 ‘부릴 예(隸)’자를 썼다. 기자조선 때부터 삼한과 삼국·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3천 년 가까이 줄기차게 이어져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도 그 자체였다.

우리가 반상제(양반과 상민) 혹은 양천제(양인과 천인)라고 알고 있는 조선의 신분제는 실제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의 6등급제였다. 서얼(庶孼)은 양반+상민의 자녀는 서(庶), 양반+천민의 자녀는 얼(孼)이라는 새로운 신분이었다. 양반도 상민도 아닌 서얼의 양산이 중인 신분으로 계층 분화했다. 게다가 천민은 팔천(八賤)이라고 하여 노비·기생·백정·광대·장이(대장장이·옹기장이)·승려·무당·상여꾼 등 8가지로 세분해 숨을 쉴 수 없도록 억눌렀다.

노비는 나라와 양반 가문의 궂은일을 도맡는 핵심 노동력이었다.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내시와 궁녀는 궁궐과 왕실을 지탱했고, 관아를 뒷바라지하는 관기와 사환, 문무 잡직 모두 공노비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이민족 노예가 인구의 30~40%에 이른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였다.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양반 선비를 노비들이 온몸으로 지탱했다.

장예원은 노비 소송 업무의 주무관청이었다. 조선의 사법기관은 형조, 의금부, 사헌부, 한성부였다. 일반 백성 관련 민사와 형사 소송은 형조, 관리와 양반은 의금부, 재심은 사헌부, 토지와 가옥 관련 민사 소송은 한성부에서 주로 다뤘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했기에 사법기관이 아닌 장예원이 전담했다. 중국도 폐지한 노비제 유지책이었다.

장예원이라는 역사 한 귀퉁이에 등장할까 말까 한 관아가 광화문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왕의 재산인 공노비, 양반의 사유물인 사노비를 증명하는 기록이 보관돼 있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특수한 재산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노비의 소유권과 신분을 다투는 소송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한양 거주자의 70~80%가 노비이고, 전국 노비 소유주의 대부분이 한양과 경기 지방에 살았으므로 이곳에 두는 게 편했다.

노비 소송의 증거 자료인 호적은 3년마다 갱신했다. 전국의 각 호구는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4조(四祖)를 기재한 호구단자를 관아에 제출했다. 관아는 보관 중인 호적과 대조해 변동 사항을 반영 기재한 뒤 돌려줬는데, 개인이 보관하는 호구단자와 관아가 소장한 호적이 신분 확인의 기본 자료였다.

모든 노비의 신원은 장예원의 천적(賤籍)에 기재돼 엄격하게 관리됐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예원 창고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15~17세기 조선 인구 900만~1200만 명 중 노비 비중을 30~40%로 잡을 경우 270만~480만 명쯤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장예원의 조직은 조촐했다. 정3품 당상관인 판결사 1명, 정5품 사의 3명, 정6품 사평 4명이 해결했다.

조선 시대 소송은 노비 소송과 조상 무덤을 둘러싼 산송(山訟)으로 크게 나뉜다. 조선 초 노비 소송은 지방일수록 격렬했다. 민사 소송 대부분이 노비 소송이었다. 노비들은 면천해 양인이 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1400년대 100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송 건수가 600건이 넘었다. 심지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에 노비에 관한 청원만 계속 올라오자, 노비 문제로는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으나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세종 때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을 시행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1596년(선조29) 3월13일 전라도 나주에서 보기 드문 노비 소송이 벌어졌다. 피고는 여든 살의 노파 다물사리였는데 “어머니가 성균관 소속 관비인 공노비였으므로 자신도 공노비”라고 주장했다. 원고인 양반 이지도는 “다물사리는 집안의 사노비와 결혼한 양인”이라고 반박했다. 증거 조사에 나서 한 달여 동안 호적단자와 관청의 천민 명단을 조사한 이후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은 “다물사리는 양인”이라고 판정했다. 공노비로 신분을 세탁, 자식도 공노비로 만들어서 처우 개선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노비 소송은 노비가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려고 다투는 양상이었다. 양란 이후 노비 문서가 불타버렸거나 다른 문서와 섞이는 혼란을 틈탄 소송이 많았다. 관찰사·부사·목사·현령 등 지방 수령의 업무 중 재판이 70%를 차지했다.

하급 공무원 노릇을 한 공노비가 팔천(여덟 종류 천민계층) 중 최상의 대우를 받은 반면 사노비는 최악의 피지배 계층이었다. 사노비는 상전(주인)집 행랑채나 담 너머 집에 기거하면서 24시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의식주를 제공받는 솔거노비와 따로 독립해 농사를 짓는 대신 1년에 면포 1.5~2필 정도의 몸값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사와 길쌈, 심부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외거노비는 기회가 생기면 서해안 섬, 이북 오지, 강원도 산간으로 도주했다. 청지기나 집사 역을 맡은 수노는 ‘마름’이라고 했는데 위세가 당당한 우두머리 사노비였다.

여자 종은 출처에 따라 윗대서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비, 당대에 사들인 매득비, 안주인이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로 나뉜다. 임무에 따라 정월 초하룻날 안주인을 대신해서 친척에게 세배하는 문안비, 초상이 나면 곡을 해주는 곡비, 문 앞을 지키는 직비, 안주인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유모비가 있다.

노비의 이름은 기구한 운명의 흔적이다. 성이 없는 이름은 십중팔구 노비 이름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 흔하고 천하게 지었다. 영화나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똥이(갓동이·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태어난 순서대로 일○, 이○, 삼○을 넣거나,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막동이나 끝동이, 끝순이라고 불렀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청소 전담 빗자리, 아무개를 지칭하는 거시기…식이었다.

이름만으로 식별이 가능하고,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다물살이나 이쁜이, 꽃분이, 곱단이, 바우 같은 긍정적 이름도 있었다. 요즘 우리말 이름 짓기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1801년 1월28일자 <순조실록>에서 순조는 “임금으로서 백성을 대하게 되면 귀천도 없고…노나 비라고 하면서 구별해서야 어찌 동포라 할 수 있겠는가…내노비 3만6974구와 사노비 2만9093구를 모두 양민이 되게 하라…아, 내 어찌 감히 은혜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동족을 노예로 부린 왕조의 잘못을 뉘우쳤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노비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21대 영조 이후 22대 정조와 23대 순조 3대에 걸쳐 노비 신분의 대물림을 끊은 것이 공교롭다.

노비를 사람으로 본 영조는 ‘노비의 어버이’라고 칭할 만하다. 장예원을 ‘보민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노비 소송 업무를 형조로 이관했다.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다가 급서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조가 1801년 공노비를 해방했으나 1894년 완전한 철폐가 이뤄지기까지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비들 스스로 장예원의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신분 해방까지 300년이 꼬박 걸렸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 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고려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良民)·촌민(村民)·백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대신에 백정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살업·유기제조업·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백정을 고려시대의 백정과 구분하기 위해 ‘신백정(新白丁)’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들을 백정 또는 신백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423년(세종 5)의 일인데, 이 때 이전까지의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백정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은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합해 통칭한 신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따라서는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은 화척이고 재인은 백정 계열과는 다른 계층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전의 화척을 ‘화척’ 또는 ‘백정’이라 하고 재인은 ‘재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재인과 화척을 구분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재인과 백정이 모두 유목민족 출신으로 그 생활상에 차이가 없으며 직업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없지만 조선시대의 백정은 재인과 구별되는 것이다. 즉 그 이전의 화척이 개명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이러한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은 멀리는 삼국통일 때까지, 가까이는 신라 말 고려 초까지 소급된다. 즉,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말갈인·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와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이 그 뒤 화척으로 변모했다가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개칭된 것이다.

이들 백정은 고려 이후에도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계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 또는 그 전신인 화척은 대개 유목민족 출신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 사회에 정착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생활 습속을 버리지 못하였다.

즉, 그들의 일부는 이동 생활을 하면서 수렵·목축을 하기도 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목 민족적 특성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면 자주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거나 방화·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외적과 내통하거나 외적으로 가장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고려 말기에는 양수척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거란병의 향도 구실을 했고 왜구로 가장해 노략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란(作亂)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조선 사회에 정착한 이들 백정의 일부는 유목민적 생활의 연장으로서 유기 제조와 판매, 육류 판매 등의 상업에 종사해 그들이 제조한 유기(柳器)를 공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수렵·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 도살의 기술을 살려 우마(牛馬)의 도살업에도 진출하였다.

이 우마의 도살과 그 판매는 상업상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므로 백정들은 이를 생활의 적극적 방편으로 삼았고 독점성까지 띄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백정 이외에도 거골장(去骨匠)이라 하는 양인출신의 전문적 도살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이들 거골장이 사라지면서 도살업은 백정들에 의하여 독점되었다. 그리하여 이 도살업은 백정들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백정들은 유랑·수렵·목축·절도·도살·이적행위·유기제조 등을 주된 생활 방편으로 삼았다. 반면 농경에는 별로 종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해 주거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은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백정을 모두 찾아내어 각 방(坊) 및 촌(村)에 나누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장적을 만들어서 백정의 출생·사망·도망 등을 기록, 보고하도록 했으며, 도망하는 자는 도망례(逃亡例)에 의해 논죄하였다.

또한 이들을 농경 생활에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고 혼혈정책·행장제(行狀制), 군역에의 동원 등을 시행하였다. 즉 국가는 이들 백정을 농경에 종사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고 호적에 편입시켰을 뿐 아니라 국역에도 편입시켰다. 그리고 능력 있는 자는 향학(鄕學)에 참여할 수 있게도 하였다.

한편 그들만의 집단적 생활을 금지하고 일반 평민과 함께 섞여 살도록 했으며, 평민과의 혼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의 거친 유목민적 기질을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이들의 유랑을 막기 위해 그들이 이동할 때는 반드시 관에서 발급하는 행장을 소지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민첩하고 강인한 기질과 유능한 마술(馬術)·궁술(弓術) 등을 이용하고자 군역에 편입시키고 내란·외란 등의 진압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군역에 동원하는 정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즉 유랑에 익숙했던 이들 백정들은 영농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일반 평민들은 천한 이들과 혼인하기를 꺼렸으며, 지방 수령들이 행장제 시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이들의 집단적 유랑이나 사회적 작란 등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이전부터 행해 오던 직업인 유기제조·도살업·육류판매업 등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에 이들의 일부는 지방 토호들에게 점유되어 사노비(私奴婢)와 비슷한 처지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주로 토호의 요구로 재살(宰殺)에 종사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각종의 부담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평민 중에서도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변신하는 자의 수가 매년 증가함으로써 백정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갔다.

천민으로서의 백정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으로 신분적으로 해방되었다. 법제적으로도 이후에는 백정이라는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지속되었던 일반민의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들과의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꺼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녀의 교육 문제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고, 각종 연설회·유희회에의 참가를 거부당했으며, 촌락의 공동 행사와 의복착용·음주 등에서도 차별 취급을 받았다.

결국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백정 신분은 엄연히 존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백정의 호수와 인구는 7,538호에 3만 3712명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추측된다. 백정층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관념적 차별은 마침내 형평운동(衡平運動) 또는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이라 불리는 백정들의 해방운동을 가져왔다.

백정층에 의한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25일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 자산가였던 이학찬(李學贊)이 자제에 대한 교육차별사건을 계기로 양반 출신인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및 백정 출신인 장지필(張志弼)의 도움을 얻어 형평사(衡平社)라는 사회 단체를 조직하면서 시작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형평사의 창립에 백정이 아닌 양반층이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형평사의 설립 취지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인 백정이라는 용어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해 백정층도 참된 인간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사칙(社則) 19조항과 세칙 6항을 마련하고 전국적 조직을 갖도록 하였다. 본부는 진주에 두었으며 전국 각처에 지사 및 분사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형평사는 설립 1년 사이에 12개의 지사와 67개의 분사를 갖추었다. 그리고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형평여성동맹 등의 별도 기관도 각지에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평사의 활동은 당시의 언론과 각 사회 단체로부터 적극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형평운동을 방해하는 반형평운동도 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전국 각처의 형평사 지사 및 분사가 반형평운동 단체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평사 창립에 관여했던 간부들이 한 때 분열되는 어려움도 겪었으나 여러 사회 단체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하고 본부를 서울로 옮겼다.

1925년 8월의 예천사건(醴泉事件)을 계기로 형평사운동은 이전까지 지향했던 백정들의 신분향상 운동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나, 조선청년총동맹 및 조선노농총동맹 등 각종 청년·사상·노동 단체와 제휴하면서 일반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다시 형평사는 사회운동을 하려는 혁신파와 본래의 형평운동을 지속하자는 온건파와의 대립을 겪게 되었다. 이리하여 1930년대에 들어와 형평운동은 그 위세가 약화되고 일부는 사회주의운동이나 기타의 사회운동에 흡수되어 갔다.

이러한 형평운동이 지니는 특징은, 첫째로 농민·노동 운동과는 달리 주로 권력적·신분적 투쟁이었다는 점, 둘째로 자본주의 제도나 자본가를 대상으로 하는 노동운동, 지주나 전근대적 토지관계 등을 운동 대상으로 하는 농민운동과는 달리 운동 대상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등이다.

결국 형평운동은 그 원래의 취지를 제대로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의식이 높아지면서 백정층이 자신의 사회적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받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