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과제는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의 기간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 양상을 탐색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안목을 제시하며, 나아가 미래적 전망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본 과제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이다. (1) 3단계 연구의 개요 ▶ 세부과제의 통합을 통한 공동연구로 전환: 단일한 연구주제를 다각도로 고찰 (2) 연구성과 ①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출판문화 관련 자료 집성 ②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에 관한 자료 집성 ③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에 관한 자료 집성 ⑤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의 문학적 표상과 변용 연구 ⑥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의 지속과 근대적 변환에 관한 연구 ⑦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의 문학적 표상과 변용 연구 ⑧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의 문학적 표상 연구 ⑨ 조선총독부 기관지 소재 일생의례와 세시풍속 관련 자료 수집 한국민족은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① 대한독립군, ② 군무도독부, ③ 북로군정서, ④ 국민회군, ⑤ 의군부, ⑥ 대한정의군정사, ⑦ 한민회군, ⑧ 조선독립군, ⑨ 의단, ⑩ 대한독립군비단, ⑪ 광복회군, ⑫ 의민단, ⑬ 흥업단, ⑭ 신민단, ⑮ 광정단, 야단, 혼춘군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① 1919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②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③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鳳梧洞)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제1대대, 이범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제2대대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5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하여 패주시켰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의 대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1년 6월에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國民府)(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金元鳳)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예컨대 ①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년 3월), ②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9월), ③ 밀양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12월), ④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년 9월), ⑤ 일본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총살저격사건 (1922년 3월), ⑥ 종로경찰서 투탄사건(1923년 1월), ⑦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년 3월), ⑧ 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년 12월), ⑨ 일본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년 1월), ⑩ 의열단 군자금사건(1925년 10월), ⑪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년 12월)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몇세기?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이다.
일제강점기 몇년?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는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기간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약 35년 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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