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문화 변화 - iljegangjeomgi munhwa byeonhwa

본 과제는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의 기간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 양상을 탐색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안목을 제시하며, 나아가 미래적 전망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본 과제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이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는 서구 문물의 도입과 식민지로의 편입으로 인해 우리 사회 전체가 근대적 전환과 문화적 억압․굴절의 과정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던 때이다. 특히 식민지 지배 권력은 전대의 삶의 양식을 폭력적으로 해체하면서 근대적 생활양식으로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강제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근거하여 우리의 근대적 삶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이식된 제도와 문물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의 근대는 민족의 자생적 동력에 의한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 구축되었다는 반론이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강제된 서구적 근대화와 식민지의 경험은 우리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근거 없는 열등감과 과장된 옹호라는 양가적 태도를 동시에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 생활양식은 외적 강제에 의해 단번에 교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층의 생활은 정치․경제적 변화의 진행과는 층위를 달리하는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문화전통의 토양을 바탕으로 교섭과 통합의 복합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전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 과제는 한국 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을 탐색하되, 기존의 전통 연구가 가져왔던 복고적, 폐쇄적, 방어적 태도를 지양하고, 기층의 다양한 문화 주체들이 일상의 생활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즉 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을 연구함에 있어 전대로부터 ‘잔존’한 전통 문화유산을 규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문화와의 접촉 과정에서 혼성 변이되면서 중층적으로 축적되는 제반 현상들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가 ‘전통문화’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문화전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간 한국 문화 연구에서 전통은 대개 근대 문화나 서구 문화의 타자의 자리에서 발견되어 왔다. 이에 따라 재래의 것, 고유한 것이 ‘잔존’되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적, 고립적, 배타적 시각에 입각한 전통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정태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게 만든다는 한계를 지닌다. 전통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전통에 대한 이해를 협소하고 경직된 것으로 한정시킨다는 점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명목 하에 이루어진 서구화가 극도에 달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우리 문화 역시, 그 내면을 조금만 깊이 있게 살펴보면 우리 문화 기층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관습, 의례, 사상, 제도 등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할 때, 문화적 교섭이 가장 급격하게 이루어졌으며 현재 우리 삶의 양식의 기본 패턴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시기 문화전통의 지속과 변용의 양상을 면밀하게 조사・연구하는 작업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나아가 미래적 전망을 모색하는 데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층의 생활은 지극히 복잡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총체적인 양상이 파악되기 어렵다. 이에 본 과제는 전체 3단계를 생활 문화의 전 영역을 아우를 수 있도록 연구 대상을 나누어 구성하였다. 본 과제의 1단계와 2단계를 병렬적으로 설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각 단계의 과제는 2개의 하위 세부 과제로 이루어져 있다. 제1세부 과제가 주로 역사민속학, 비교민속학, 도시민속학 등 민속학 제 영역의 연구 방법과 학문적 성과를 바탕에 두고 있다면, 제 2세부 과제는 풍속사, 일상생활사, 문화사회학 등에서 최근 부각되고 있는 문화 연구의 시각과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
본 연구의 제3단계에서는 이러한 두 세부과제를 통합하여 연구방법론을 일원화하고 학문적 성과를 종합하는 공동연구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거시사적 접근과 미시사적 접근을 통합하여 수행하는 연구로서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연구성과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3단계 1년차와 2년차에서는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와 세시풍속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근대적 전환양상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3년차에서는 이제까지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점검을 통해 연구의 의의와 성과를 검토하였다. 이를 간략히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1) 3단계 연구의 개요

▶ 세부과제의 통합을 통한 공동연구로 전환: 단일한 연구주제를 다각도로 고찰
▶ 종합적인 고찰을 위한 거시사적 접근과 미시사적 접근을 통합하여 연구 수행
▶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연구 성과를 도출

(2) 연구성과

①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출판문화 관련 자료 집성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출판 문화 관련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출판 문화 관련 자료에 관한 해제

②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에 관한 자료 집성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출생의례 관련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혼례 관련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회갑연 관련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상례 관련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일 아동 성장 관련 이미지 자료의 현황 파악

③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에 관한 자료 집성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봄 놀이 세시풍속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여름 놀이 세시풍속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가을 놀이 세시풍속 자료의 현황 파악
□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겨울 놀이 세시풍속 자료의 현황 파악
④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의 지속과 근대적 변화에 관한 연구
□ 근대적 사고를 통해 본 일생의례의 변화 양상 연구
□ 1930~1940년대 출산 풍속에 대한 사례 연구
□ 출산의례의 변용(變容)과 근대적 변환(變換) 연구
□ 한말 일제강점기 국가제례(國家祭禮) 공간의 변화 연구
□ 일제강점기 혼례문화의 지속과 변용 연구
□ 전통 상례의 변화를 통해 본 일제의 조선 인식 연구
□ 현대 한국 상례문화의 변화 연구

⑤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의 문학적 표상과 변용 연구
□ 식민지 시대 소설 속 출산서사의 의미 연구
□ 현대소설의 통과제의 구조 연구
□ 교양소설과 주체확립의 동력학 연구
□ 1920년대 신여성의 ‘사랑’과 근대적 결혼 제도의 함수관계 연구
□ 근대적 결혼제도 정착과정과 소설의 관련양상 연구 연구
□ 근대문학 속에 나타난 상례 연구
□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 연구 연구
□ 한일 근대 창작 동화 속에 투영된 일생의례의 특징 연구

⑥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의 지속과 근대적 변환에 관한 연구
□ 조선 후기 세시풍속의 양상과 특징 연구
□ ‘조선총독부간행물’에서 볼 수 있는 세시풍속의 양상 연구
□ 『임하필기』에 나타난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연구
□ 근대에 등장한 이중과세의 지속과 변용 연구
□ 일제강점기 한식의 지속과 변화 연구
□ 근대 매체에 나타난 계절 여가 연구
□ 크리스마스의 도입과 세시풍속화 과정에 대한 연구

⑦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세시풍속의 문학적 표상과 변용 연구
□ 식민지 시대 소설 속 출산서사의 의미 연구
□ 현대소설의 통과제의 구조 연구
□ 교양소설과 주체확립의 동력학 연구
□ 1920년대 신여성의 ‘사랑’과 근대적 결혼 제도의 함수관계 연구
□ 근대적 결혼제도 정착과정과 소설의 관련양상 연구 연구
□ 근대문학 속에 나타난 상례 연구
□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생사관(生死觀) 연구
□ 한일 근대 창작 동화 속에 투영된 일생의례의 특징 연구

⑧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일생의례의 문학적 표상 연구
□ 두레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연구
□ 이기영 소설에 나타난 세시풍속의 재현 양상 연구
□ 백석 시에 나타나는 세시풍속의 의미 연구
□ 근대문학 텍스트에서 무속적 요소의 의미 연구
□ 향토 담론과 조선 문학의 탈지방성 연구

⑨ 조선총독부 기관지 소재 일생의례와 세시풍속 관련 자료 수집
□ 조선의 습속에 관한 자료 수집
□ 조선총독부 기관지 소재 1920~30년대 세시풍속 자료 집성
□ 조선총독부 기관지 소재 혼례와 상례 관련 자료 집성

한국민족은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① 대한독립군, ② 군무도독부, ③ 북로군정서, ④ 국민회군, ⑤ 의군부, ⑥ 대한정의군정사, ⑦ 한민회군, ⑧ 조선독립군, ⑨ 의단, ⑩ 대한독립군비단, ⑪ 광복회군, ⑫ 의민단, ⑬ 흥업단, ⑭ 신민단, ⑮ 광정단, 야단, 혼춘군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① 1919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②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③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鳳梧洞)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제1대대, 이범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제2대대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5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하여 패주시켰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의 대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1년 6월에 자유시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國民府)(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金元鳳)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예컨대 ①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년 3월), ②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9월), ③ 밀양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12월), ④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년 9월), ⑤ 일본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총살저격사건 (1922년 3월), ⑥ 종로경찰서 투탄사건(1923년 1월), ⑦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년 3월), ⑧ 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년 12월), ⑨ 일본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년 1월), ⑩ 의열단 군자금사건(1925년 10월), ⑪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년 12월)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 몇세기?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이다.

일제강점기 몇년?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는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기간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약 35년 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