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지 만드는 법 - gaengji mandeuneun beob

돕헤드님의 [완전히 아름다운 세상이 되면] 에 관련된 글.

내가 일하는 피자매연대에서 재생지만을 쓰기로 지난 3월 결의했었다.
중형, 대형, 특대형 본을 비롯해 소식지 등을 꾸준히 만들고 복사해야 했기에 우리 사무실도 종이 소비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  종이들만 재생지로 바꿔도 상당한 양의 나무를 살릴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재생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지난 3월이 처음이 아니었다.
평소 도서관이나 교보문고처럼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는 곳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무들의 무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권 낼 때 첫 판에 2천부를 찍는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베어지는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은 예전에 몇몇 출판사에서 나보고 책을 내자고 할 때도 망설였던 것이다.
그 출판사들이 재생지를 사용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나는 눈여겨보았는데, 사실 재생지를 사용하는 출판사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재생지로 선뜻 전환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재생지가 새종이보다 더 비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나만 갖고 있는 선입견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재생지가 더 비싸지 않을까?' 여기고 있었다.
10년 이상 재생지를 써온 녹색평론이 얼마 전부터 좀더 밝은색 종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저 종이가 재생지인지 아니면 일반지인지 궁금했고, 또 경제적 사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일단 궁금증이 커지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대추리에서 쫓겨나 본격적으로 피자매연대 사무실 생활을 시작한 4월 초 어느날 무작정 인쇄골목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 충무로로 향했다.
평소 그곳을 들락거리며 수 많은 곳에서 종이를 취급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종이 도매점이 많이 몰려 있을테니 그곳에서 재생지를 분명히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목적은 일단 A4 크기의 재생지를 구해서 복사할 때와 프린터로 출력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충무로에서 듣게 된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몇 군데 종이 도매상을 모두 돌았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이 '충무로에서는 더 이상 재생지를 취급하지 않는다'였다.
수지도 맞지 않고, 요즘엔 더 이상 재생지를 찾는 인쇄업자가 없어서 한 2-3년 전부터는 아예 충무로 바닥에서 재생지가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대답이었다.
그 중 한 분이 방산시장에 가면 어쩌면 재생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도 별로 자신은 없어 보였다.

사실 '평화가 무엇이냐' 음반을 낼 때 속지를 모두 재생지로 하려고 마음 먹었었다.
음반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달군이 디자인을 끝낼 무렵인 지난 2월 재생지를 찾아 충무로를 돌았었다.
그런데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재생지는 없다' 였었다.
당시에는 시간도 없었고 또 마침 충무로에 갔던 날이 비가 오는 날이어서 몇 군데 돌지 못했었는데, 한 군데에서 중질지로 할 수가 있다는 대답을 듣긴 했었다.
그런데 단가가 너무 비쌌고, 결정적으로 그 중질지라는 것이 재생펄프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업자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나는 갈등을 했다.
시간은 촉박하고, 돈에 쪼들리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일반지로 음반 속지를 뽑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 사정이 있고 난 후 지난 4월 다시 충무로를 찾을 땐 재생지를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결의가 있었지만 세상은 결의만 갖고는 되지 않는 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 후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절박하면 길이 보이는 법일까?
이상하게도 그 전에 검색할 때는 A4 크기의 재생지를 찾아봐도 검색 결과가 나타나지 않던 것이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드디어 재생지를 파는 인터넷 종이 쇼핑몰들을 몇 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에 내가 찾아낸 인터넷 종이도매쇼핑몰들에서는 A4 크기로 미리 재단되어진 종이를 팔기보다는 커다란 한 롤 단위로 재생지를 팔고 있었고, A4 크기로 재생지를 재단하려면 재단비를 또 내야 하고, 수량도 커다란 단위로만 판다고 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고생 끝에 A4 크기의 재생지를 판다는 종이도매점에 거두절미하고 전화부터 걸었다.
직원이 전화를 받길레, 다짜고짜 그 종이의 재생펄프 비율이 얼마냐고 물었다.
급한 마음에 그렇게 물어본 것인데, 직원은 황당하다는 듯 그런 것을 왜 묻느냐고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제서야 나는 환경운동을 위해 재생지를 사용하려고 한다면서 다시 친절하게 되물었다.
직원은 그런 것은 판매하는 그곳에서는 잘 모르고, 종이 제조회사로 물어봐야 한다면서 제조사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다시 종이 제조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제지사에서도 처음 전화를 받은 직원은 판매 담당 직원이었는데, 그런 것은 잘 모른다면서 공장에 연결을 해봐야 정확한 재생비율을 알 수 있다고 한 발 빼면서 대답했다.
답답해진 나는 현장노동자든 공장장이든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바꿔달라고 독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종이를 직접 만드는 노동자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회사에서 만드는 재생지는 재생비율이 50% 이상이라고 했는데, 관련 규정에서는 재생비율이 40% 이상이고, 염소계 표백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재생지로 인정이 될 뿐더러 GR(Good Recycled)마크라는 환경인증마크도 달 수 있다고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기쁜 나머지 나는 바로 그 재생지 A4를 박스 단위로 판매한다는 도매점으로 달려갔다.
서울 포이동에 있는 약간 허름한 사무실이었는데, 양재천 부근이었다.
보통 일반 A4 복사지는 250장 들이 한 묶음이 비닐포장되고, 이것이 다시 10묶음으로 묶여 한 박스에 들어간다.
문구점에서 파는 일반 복사지 한 박스가 보통 1만8천원 또는 그 이상이고, 비싼 곳에서는 2만원이 넘기도 한다 .
그러니까 2천5백장이 들어 있는 일반 복사용지 한 박스의 가격이 그렇다면 재활용 복사용지 가격은 얼마 정도일까.
나는 이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비싸도 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물어물어 고생고생해서 찾아간 그 재활용 복사지 도매점에서는 한 박스에 1만4천원 정도였다.
생각보다 싼 가격에 무거운 종이박스를 하나 사서 어깨에 짊어지고, 피자매 사무실로 돌아왔었다.
도매점 직원이 '차는 가져오지 않았나요?' 라고 묻길레, 환경운동을 하기 때문에 자동차는 타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나왔었다.

그렇게 해서 재생 복사용지를 잘 사용하고 있었다.
중형본 대형본 소식지 모두 이 재생지로 뽑아서 돌리고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색깔이 일반 흰색의 복사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세히 보면 재생펄프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냥 얼핏 보면 이것이 재생지인지 아니면 일반종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재생지를 사용하자'는 취지라면 보다 재생지스러운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찾기 시작한 것이 갱지였다.

갱지라니.
이름부터 재생지스럽지 않은가.
갱생한 종이라니 이것은 모르긴 몰라도 재생비율이 거의 100%에 이를 것이다.
문제는 A4 크기로 재단되어진 갱지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나중에 재생지에 대해 많은 문서들을 검색하고 읽어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재생지에는 종류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재생비율이 가장 높고 질이 낮은 것이 갱지였다.
갱지는 요즘에는 신문용지라 불린다.
우리가 보통 읽는 신문들이 이 갱지로 만들어지고, 이 신문용지는 모두 폐지로 만들어 재생비율이 100%다.
그런데 하나 알아둬야 할 것은 살구빛이 나는 신문지는 재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구빛 신문지는 재생비율이 0%라는데, 그 신문사 측에서는 자기들 신문용지가 싸구려 재생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해서 알리고 있었고, 행여 독자들이 살구빛 고운종이를 재생지로 착각할까봐 무척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독자들이 있을 때마다 매우 억울해하면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기도 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듯 '살구빛 신문지는 절대로 재생지가 아닙니다'라고 말이다.

나는 종이는 그 두께에 따라서 미터당 45그램, 50그램, 70그램, 75그램, 80그램... 등등 나뉘어지고, 그램 수가 많이 나갈수록 종이는 더 두꺼워지고 그에 따라 가격도 올라간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인쇄나 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에 따라 어느 정도 두께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어떤 아날로그 복사기는 50그램의 갱지도 복사를 할 수가 있는 반면에, 요즘 복사가게에 있는 대부분의 디지털 복사기는 50그램이나 그 이하의 갱지는 너무 얇아서 복사기에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100그램 이상이 좋고, 복사기에는 75그램 이상을 써야 한다는 자잘한 사실도 줏어 듣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여차저차한 끝에 50그램짜리 갱지 2천5백매 한 박스를 만원이라는 싼 가격에 판매하는 도매점을 찾아냈고, 나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역시나 무겁기만한 그 박스를 어깨에 매고 사오게 되었다.
이제 피자매 사무실에 완전 갱지만을 사용해 복사도 하고, 인쇄도 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또다시 불거져나왔다.
일반적인 갱지는 대부분 45그램이나 50그램인데, 이것들은 너무나 얇아서 요즘 대부분인 디지털 복사기에는 복사지로 쓸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갱지를 들고 복사가게에 가서 복사를 해달라고 하니 종이가 너무 얇아서 자꾸 복사기에 '잼'이 생긴다면서 복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과일잼은 좋지만 종이잼은 싫다는데, 내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좀 오래된 구식 복사기로 복사를 하거나 프린터로 일일이 직접 출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속도가 느리다.
그래도 재생지를 사용해서 작업을 한다는 기쁨이 있다.
지난 한 달 여 천신만고 끝에 나는 재생지로의 전환을 착착 이뤄내고 있다.

그 과정은 처음엔 지루하고 귀찮기만 했다.
쉽고 편한 길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만 먹으면 돈을 좀 더 주고라도 나무를 베어 만든 일반 복사용지를 사무실 앞 문구점에서 언제든 손쉽게 구매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모른척 하고 나도 일반종이를 쓰면 되겠지만 이건 양심의 문제이기도 했고, 이제는 내가 펄프산업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도저히 예전처럼 무감각하게 지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펄프산업이 얼마나 규모가 큰 산업이며, 자본가들이 그 펄프를 보다 손쉽게 뽑아내기 위해 '녹색사막(green desert)'을 만들어 얼마나 많은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숲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에서 보다 많은 종이와 일회용 생리대가 소비되기 위해 자신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재생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대안생리대를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몰랐을,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을 이 사실들을 알게 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제대로된 사실에 접근하지 못했었나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책이, 일회용 생리대와 종이티슈 등이 얼마나 많은 삼림을 베어내고, 그것이 환경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숲에서 살아가던 생명들을 내쫓고 있는지 우리는 지금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의 관심도 부족하고,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유한킴벌리 같은 자본가들이 알아서 잘 조림(造林)을 하면서 펄프를 만들고 있겠지 믿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자본가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윤추구가 제일의 목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나는 생활습관을 바꾸고 있다.
내 삶을 바꾸고,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다.
재생지로의 전환이 처음엔 길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내가 사용하는 갱지가 너무나 예뻐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
함께 재생지로 전환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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