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쇄국 - edo sidae swaegug

일본 에도시대 쇄국정책과 구한말 쇄국정책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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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에도(江戶)시대의 鎖國政策
Ⅱ-1. 에도막부의 성립
Ⅱ-2. 쇄국정책의 실시

Ⅲ. 조선 말 鎖國政策

Ⅳ. 兩國 鎖國政策의 時代的 差異

Ⅴ.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난 후 도요토미 정권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는 아직 유아의 신분이라 직접적인 통치가 불가능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정세를 놓치지 않고 도요토미 가문의 정세를 장악했는데, 에도(江戶)에 본거지를 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파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파가 일본의 세키가하라(ケ原)에서 1600년 10월 21일 결전을 벌였다. 이 날 하루만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했다.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측을 동군, 이시다 측을 서군이라고 부른다. 연민수, 일본역사, 보고사, 2000, p.145.
에서 승리하여 패권을 장악하고, 에도에 새로운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후 260여년간에 걸친 에도시대가 열리고 도쿠가와 가문의 천하임을 명확하게 하였다.
에도막부는 본격적으로 鎖國政策을 실시한다. 당시 에도 막부 자체도 밀려드는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 서양 여러 열강들의 통상요구를 당하게 된다. 에도막부에서 사용한 쇄국이라는 단어는 조선 말 興宣大院君의 정책에서 다시한번 등장하게 된다. 이 두 시대의 쇄국정책은 나라의 문을 걸어잠근다는 의미에서 같은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두 시대는 대내외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글쓴이는 본 글을 통해 에도시대의 쇄국정책과 조선 말 쇄국정책을 비교하여, 쇄국정책을 폈던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뒤 19세기 말 열강들의 침탈대열에 합류하는데 반해 조선은 쇄국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잃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 서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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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에서는 에도막부의 기술첩보전을 다루는 중에 일본의 실리성을 대단히 부각시켜주고 있군요
그러나 200년간 메이지유신때까지 일본을 통치했던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을 펴서 외국과의 교역을 제한했던 에도막부의 쇄국성향을 간과한 측면도 있군요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피기 시작한 이유도 사실 일본에 퍼진 기독교 때문이지요 기독교가 일본사회에 퍼져서 막부의 지배근간인 유교 불교를 흔들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어 1639년 기독교의 대일포교를 주도해온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을 금지하는 쇄국령을 발표로 시작해서 3대 쇼군 이에미쓰는 일본인의 도항이나 해외거주 일본인의 귀국을 금지하였지요
마음대로 해외로 배를 타고 가는 놈이 있으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단호하기 이를데가 없지요

에도시대의 일본의 서양교역창구는 데지마 상관으로 한정되어
일본의 최초 서양교역국인 포르투갈을 기독교문제로 인해서 교역을 금지하고 기독교포교에 신경쓰지 않는 네덜란드와 데지마 상관으로 교역했지요
기독교를 들여오지 않은 선에서 기독교포교에 미온적인 네덜란드와
데지마 상관을 통한 공무역을 하고 있었지요
에도막부의 개혁군주 요시무네가 조선의 식물을수집하기 위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밀무역을 금지하는 막부의 기존정책을 저버리는 짓을 했을수도 있지만

에도막부의 일본의 대외창구는 대마도와 데지마상관 이 두 곳으로 한정되었지요
막부의 쇄국정책의 이유가 되었던 기독교 포교방지의 기원은 에도막부의 전시대인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수가 없네요 히데요시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일본은 남만무역으로 스페인 포르투갈과 교류하고 있었지요
이러는 와중에 선교사들이 남만무역으로 일본에 포교하러 오는 경우가 많아 일본의 기독교신자는 늘어났지요 임진왜란때 왜장으로 유명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그중 하나이지요 히데요시도 처음에 기독교를 용인하였지요 통일전쟁을 해나가중이지만 그러나 큐슈를 병합한 1587년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서 기독교를 금지하기 시작했지요

일본통일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고 하니까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 기독교를 금지하겠다고 히데요시는 생각했지요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끊지 않았지요 그러나 히데요시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선교하려는 서양선교사들의 입국이 끊이지 않아서 결국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지요 1596년 왜란중 명일강화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일본의 우라토에 스페인상선 펠리페호가 입항하게 되어 일본관리들의 검역을 받게되자 펠리페호의 선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인심을 모았으니
이런 식으로 하면 일본을 치겠다"라고 발언한게 문제가 되어 결국 히데요시는 기독교인 체포령을 내리지요
이리하여 서양선교사와 일본인신도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했지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처음에 기독교를 용인했지만 나중에는 탄압정책으로 기울어져서 에도시대 초기에 기독교탄압사건이 끊이지 않았지요 이에미쓰시대에 수많은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책형나 온천팽형(온천에 빠뜨려 죽이는 처형법) 참수형등으로 처형되었고 교토나 에도에서 여러 기독교인들이 순교했지요

에도막부는 기독교 유포를 방지하기 위해 대외무역을 제한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해서 일본의 팽창욕구가 둔화되었지요

어제 방송분의 일본기생의 데지마 상관출입과 네덜란드인 시볼트와의 결혼으로 일본인과 네덜란드인의 접촉을 자유로운것으로 부각시켰지만
그러나 에도막부는 일본인의 데지마상관출입을 금하였을 정도로
일본인과 네덜란드인의 접촉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에도막부는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에게 개항할때까지 쇄국정책으로 일관했지요

산킨고타이 행차로 지방영주들 재정지출…상업과 도시 발달, 농촌의 상업화 촉진

일본 역사에서 에도시대(江戶時代)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이대장군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를 연 1603324일부터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되는 186853일까지 265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 섬을 제외하고 외국과 교역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취하고, 대신에 국내 상업과 농업을 활성화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200년 이상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농지가 개척되고, 농업기술도 발전되었다. 게다가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에도(도쿄), 오사카 등의 대도시가 번성했다.

에도시대는 일본 경제가 크게 발전한 시기로 평가된다. 그 원인은 농업혁명 또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지방의 260개 번()을 지배하기 위해 산킨고타이(參勤交代)라는 인질제도를 시행한 것이 뜻하지 않게 에도시대 경제 발전에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로 막부를 옮기면서 지방의 번()을 철저히 지배하는 정치행태에서 출발한다. 막부(幕府, 바쿠후)는 정이대장군(쇼군)이 야전사령부에 지은 막사에서 나라를 통치하는 제도다. 쇼군은 천황의 이름으로 통치했지만, 천황은 막부가 제공하는 비용으로 살고, 왕실의 공신들도 막부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천황의 존재는 미미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도 쇼군을 황제로 알고 표기했다.

에도 시대는 중앙집권제와 봉건제가 혼합된 시대였다. 중앙의 막부가 지방 영주인 번()의 다이며(大名)을 지배했고, 다이묘들은 각자의 영토에서 세금을 걷었다. 쇼군도 일종의 다이묘로, 중앙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그 세금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에도 시대 쇄국 - edo sidae swaegug
산킨고타이(參勤交代) 행렬 /위키피디아

막부가 지방의 번을 옭아 매는 제도가 참근교대였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격년으로 에도에 거주해야 하며, 영지에 돌아갈 경우 후계자와 정실부인을 에도에 남겨두어야 했다.

그런데 이 참근교대 제도가 에도 시대의 사회와 경제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수백 명 규모의 행렬이 장거리 여행에 나서면서 엄청난 돈을 길거리에 뿌렸고, 이는 숙박업과 유통업을 발달시켰다. 게다가 전 일본의 교통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했다.

다이묘가 에도로 가고 오는 행렬은 장대했다. 자기 번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많은 인원을 동원했고, 화려한 행렬은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다이묘들은 에도에 자신의 주거지는 물론 막료, 경호군인들의 숙소를 만들고 유지해야 했다. 그들은 에도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에도는 전국 260개 번에서 몰려온 다이묘와 식솔, 막료, 군졸들로 인해 거대한 소비도시로 변했다. 또한 에도는 상업거래가 활발하고, 유행의 진원지였고,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731년 에도의 인구는 100만명이 넘는다. 조선 중기에 한양의 인구가 20만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행정 및 상업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18세기 에도는 연간 80만 통의 사케, 10만 통의 간장, 1,800만 개의 장작 꾸러미가 소요되었고, 600개의 책 대여소, 6,000개의 음식점이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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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서 에도로 가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행렬(17세기) /위키피디아

오사카는 상업의 중심지로 변했다. 다이묘들이 에도를 의무적으로 오가고 에도에서 거주해야 했기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들은 막부의 신임을 얻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감내했다. 그 자금은 영지에서 세금으로 걷은 쌀을 오사카 시장에 내다팔아 조달했다. 가신과 막료들도 에도 생활을 하기 위해 쌀을 오사카에서 팔았다.

다이묘들은 에도에서 사치스럽게 생활하다가 돈이 모자라면 아직 수확하지 않은 쌀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일종의 선물거래를 하기도 했다.

우시다 곤자부로, 혼네 무네히사와 같은 대상인들이 생겨났다. 우시다 곤자부로는 쌀의 시세변동을 경험하며 시장의 원리를 체득하고, 투자법을 정립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다이묘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공예산업을 발달시켰고, 수많은 공예장인들이 다이묘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지위를 향상시켰다.

다이묘들의 에도 행차로 인해 사람의 이동도 많아졌다. 다이묘들의 거주지인 조카마치(城下町), 다이묘들이 에도로 가는 경유지, 항구와 광산마을 등에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18세기초 교토와 오사카의 인구는 40만명에 달했다. 당시 에도(도쿄)와 오사카를 있는 도카이도(東海道)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왕래가 많은 길이 되었다.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농촌에서도 뽕, , 닥나무, 면직물등 상품성 작물 재배가 진행되었고, 세토내해에서는 염전이 개척되어 소금 양산체제가 이뤄졌다. 면직물 수공업이 발달했고, 일본식 고급비단제품이 나왔고, 술도가, 요업등도 발달했다.

참근교대제도는 지방 영주들의 경제력을 악화시키고 정신적 나약함을 키우는데도 일조했다. 많은 다이묘들이 에도에서의 호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상인들에게서 사채를 빌렸고, 향촌에서 유지하던 사무라이정신(武士道)를 잊고 향략에 빠졌다. 에도에서 태어나 자란 영주의 자식들은 향촌의 정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참근교대 제도로 가도와 역참이 정비되었고, 에도의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신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1841년 기슈(紀州) 11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徳川斉順)의 참근교대에 사무라이 1,639, 인부 2,337, 103필이 따라갔다. 여정 중에 들르는 숙소에는 다이묘가 도착하기 수개월전부터 준비차 와 있었다고 한다. 주요 다이묘들의 에도 행차에는 수 많은 농민이 구경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에도에는 인구 절반이 지방에서 올라온 다이묘와 가신, 사무라이, 일꾼들로 채워졌으며, 남성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유곽이 번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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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도쿄 일본교 주변의 상인 /위키피디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자급자족 경제가 형성되었다. 16세기에 세계 2위 은() 생산국으로 중국의 은 수입의 3분의1을 메워준 일본 은광들은 쇄국정책으로 대외수출이 금지된데다 그동안의 무차별 생산으로 서서히 고갈되어 갔다. 쇄국 이전에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과 면직물, 설탕, 차 등의 수입도 중단되었지만, 자체적으로 수입대체재를 개발해 수요에 대응했다.

특히 농업이 크게 발전했다. 전쟁이 없는 시기가 200여년 이상 지속되면서 전국의 다이묘들은 영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신전(新田) 개발을 독려했다. 호수 주변, 산간에 새로운 전답이 개척되고, 해안에 간척지들이 만들어졌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경쟁적으로 쌀증산과 농지개혁을 지원했다. 특히 그동안 개발이 늦어진 동북(東北) 관동(關東) 중국(中國) 규슈(九州) 지방에서 호수와 갯벌이 새로운 농지로 개발되었다.

농지 개량사업도 진척되었다. 논은 그동안 자연강우에만 의존했지만, 다이묘들은 대규모 측량을 통해 평지의 논을 새롭게 구획해 관개용수를 통해 물을 공급했다. 습지에도 대규모 배수로 작업을 진행했고, 갯벌도 논으로 바꾸었다.

이같은 농지개척과 농업기술 개발로 에도 초기 1,800만 석이었던 미곡수확량(石高)이 중기에는 2,500만석, 후기에는 3,000만 석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농업생산이 증가했지만, 징세율은 오히려 낮아졌다.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당연히 커지게 되었다. 농민들이 지배계급인 사무라이보다 더 풍요롭게 살게 되었다.

영국의 초대 주일 총영사였던 러더포드 앨코크(Rutherford Alcock)는 관동(關東)의 농촌마을을 둘러보면서 평화, 풍요, 만족, 영국보다 더 완벽하고 세삼하게 경작되고 유지되는 농촌, 영국보다 더 많은 관상수로 장식되어 있는 풍경을 극찬했다. 2)

에도시대 후기에 들어가면서 신흥 상인 대두하고, 막부는 이러한 경제 발전의 움직임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해 불가 불안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해 동요하게 된다.


1)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 2017년 아산서원, 30

2) 상동,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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