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술 의 달인 - cheosesul ui dal-in

조조군의 모사, 가후.

이 지도에서 량주에 속한 곳이다. 현재는 몽골과 가까운 곳. 한마디로 촌구석이다. ㅋㅋ 그렇기 때문에 이 시골마을에서 그를 크게 평가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염충(閻忠) 만이 그를 장량이나 진평과 같은 기이함이 있다고 한 것이다. (장량, 진평= 유방의 모사들. )

2) 가후의 활약 1- 처세의 시작

그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가 랑이 되었으나, 후에 질병으로 관직을 떠나 서쪽으로 돌아왔는데, 병현에 이르렀을 때 반란을 일으킨 저족을 만나 동행하던 수십 명이 모두 붙잡혔다. 가후가 말했다.

“나는 단공(段公)의 외손자이니, 너희들은 나를 따로 매장하라. 우리 집은 반드시 후한 예로 나를 살 것이다.”

그 당시 태위(太尉) 단영(段穎)은 이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를 지냈으며, 그 위세는 서쪽 땅을 진동시켰기 때문에, 가후는 이런 거짓말로 저족(氐)을 두렵게 한 것이다. 저족은 과연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그와 맹약을 맺고 보내주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가후는 사실 단영의 외손자가 아니었다. 가후가 어떤 상황에 응하여 대처하여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와 비슷하였다. -정사 위서 가후전

그가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을 때부터 그의 처세술은 돋보인다. 저족들에게 뻥(?)을 쳐 위기를 모면하고.. 이때부터 그가 처세술의 귀재임을 엿볼 수 있다.

3) 동탁의 휘하에 들어가다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으로 들어올 때, 가후는 태위(太尉)의 속관(掾)의 신분으로 평진도위(平津都尉)가 되었으며, 후에 토로교위(討虜校尉)로 영전하였다.-정사 위서 가후전

정권을 장악한 동탁은 그의 고향 사람들인 변방(옹주. 량주 등) 사람들을 많이 기용한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가후도 등용된다. 그러나 동탁군엔 이미 이유가 있었기에 가후는 중용받지 못한다.

동탁의 사위 중랑장(中郎將) 우보(牛輔)는 섬(陝)땅에 주둔했고,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정사 위서 가후전

그래서 가후는 우보의 군대에 있었지만, 그 스스로도 우보가 큰 인물이 아님을 알고 조용히(?) 지냈다.

4) 이각과 곽사를 돕다.

동탁이 패한 이후에 우보 또한 죽었고, 동탁의 무리는 두렵고 무서워하였으므로 교위 이각(李傕)ㆍ곽사(郭汜)ㆍ장제(張濟) 등은 병사를 해산시키고 사잇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가후가 말했다.

“장안(長安)에 있는 사람들은 동탁의 수하에 있는 양주(涼州) 사람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군들은 오히려 병사들을 버리고 홀로 달아나려고만 하고 있으니, 단지 정장(亭長)이라도 그대들을 하나씩 체포할 수 있소. 내가 보기에 군대를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다시 우리의 대오를 확충하여 장안을 공격해 동탁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오. 만일 다행히 일이 성사되면 우리들은 다시 국가를 보위하여 천하를 정복할 수 있소.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다시 도망쳐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오.” -정사 위서 가후전

가후는 이렇게 진언을 하여, 이각과 곽사가 동탁 사후 가장 큰 세력이 되게 돕는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옳다고 생각했다. 이각은 곧 서쪽으로 장안을 공격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동탁전(卓傳)에 보인다. 후에 가후를 좌풍익(左馮翊)으로 임명하고, 이각 등은 그의 공로에 의거하여 제후에 봉하려 했는데, 가후는 말했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는 하나의 계책에 불과한데, 무슨 공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가후는 완강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가후를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가후는 말했다.

“상서복야(尚書僕射)란 모든 관리의 사장(師長)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직책인데, 저는 명망이 본래 중하지 않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을 설복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제가 영리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어찌 국가와 조정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정사 위서 가후전

왜 가후는 그가 이각과 곽사를 위해 한 일의 공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벼슬을 받지 않았을까? 간단하다. 그는 이각과 곽사를 자신이 모실 인물이 아니고 곧 패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음 글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이각 등은 곧 가후를 상서(尚書)에 제수시켜 관리의 선발을 관장하도록 하고, 많은 일을 바로잡아 구제하도록 하였다. 이각 등은 그를 친근하게 대했으나, 또한 두려워하기도 했다. 때마침 가후는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버리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제수되었다. 이각과 곽사 등은 장안에서 다투었고, 이각 또한 가후를 선의장군(宣義將軍)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각과 곽사 등은 화해하여 천자를 영접하러 나갔는데, 대신을 보호함에 있어 가후는 있는 힘을 다했다. 천자가 이미 낙양을 떠나자 가후는 자신이 관여되는 인수(印綬)를 돌려보냈다. 이때, 장군 단외(段煨)가 화음(華陰)에서 주둔했는데, 가후와는 같은 군에서 태어났으므로 가후는 곧 이각을 떠나 단외에게 의탁했다. 가후는 본래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단외의 군사들이 우러러 보았다. 단외는 속으로 가후에게 자신의 군대를 빼앗길까봐 두려웠으나, 겉으로는 가후를 받들어 깊은 예절을 갖추어서 가후가 점차 불안을 느끼도록 했다.
이때 장수가 남양(南陽)에 있었는데, 가후는 은밀히 장수와 교류하여 장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가후를 영접했다. 가후가 막 떠나려는데, 어떤 사람이 가후에게 말했다.

“단외는 당신을 후하게 대접하였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를 버리십니까?”

가후가 대답했다.

“단외는 성품이 의심이 많아 이미 내 뜻을 시기하였고, 나에 대한 그의 예우는 비록 두터웠지만, 오히려 나는 의지할 수 없었고, 시간이 오래지나면 그에게 제거될 것이오. 내가 떠나가면 그는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또 내가 밖에서 그를 위해 큰 구원을 하기를 바랄 것이니, 반드시 나의 처자식을 후하게 대접할 것이오. 장수에게는 계책을 주로 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또한 나를 원했던 것이니 내 집안과 나는 반드시 모두 안전할 것이오.”

가후는 이각과 곽사 그들 스스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가후 역시 벼슬을 한사코 거절하며 다른 주군을 찾는다. 처음에는 단외에게 의탁했지만 그가 인물이 아니라고 여긴 가후는 장수에게 의탁한다.

5) 장수 휘하에서의 가후- 조조의 저승사자

가후는 곧 장수가 있는 곳으로 갔고, 장수는 가후를 만나자 자손의 예를 갖추었으며, 단외는 과연 가후의 집을 잘 돌보았다. 가후는 장수에게 유표와 화친을 맺으라고 했다. 태조(=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러 간지 오래지 않은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자, 장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태조를 추격하려고 했다. 가후가 장수에게 말했다.

“추격하면 안됩니다. 추적하면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장수는 듣지 않고 군대를 진격시켜, 크게 패한 채 돌아왔다. 이때 가후가 장수에게 말했다.

“긴급히 태조 군대를 추격하여 다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장수가 거절하며 말했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소. 지금 이미 패했는데 어찌하여 다시 추격한단 말이오?”

가후가 말했다.

“군대의 형세는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니 빨리 가서 추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장수는 그의 말을 믿고 드디어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거두어서 추격하여 크게 싸웠는데, 과연 승리를 하고 돌아와서 가후에게 물었다.

“방금 내가 정예군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태조 군대를 추격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했고, 패한 이후에 물러난 병사들로 승리를 얻은 태조 군대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했소. 모든 것이 그대의 말처럼 되었는데, 어찌 보통의 원리와 위배되는 말로 모두 효험을 볼 수 있었소?”

가후가 말했다.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장군께서 비록 용병술에 뛰어나지만, 결코 태조의 적수는 못됩니다. 태조의 군대가 비록 막 퇴각했으나, 태조는 반드시 스스로 정병을 이끌고 뒤를 끊으려고 할 것인데, 당신이 추격하는 병사는 비록 정예이지만 장군들은 이미 당신이 태조의 적수가 안된다고 생각하고, 게다가 그들의 사졸 또한 정예 이기 때문에 당신이 반드시 패배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태조는 처음에 장군이 어떠한 실책이 없는데 공격하였으나, 그의 역량을 완전히 보여주지도 못하고 물러났으니, 이는 반드시 국내에 변고가 생긴 것 입니다. 태조는 이미 장군을 무찔렀으므로, 반드시 군사들의 무장을 가볍게 하고 빠르게 전진하였을 것이고, 설령 그가 여러 장수들을 남겨 뒤를 차단한다 하더라도 남은 장수들은 비록 용감하지만 또한 장군(張繡)의 적수가 못됩니다. 따라서 장군께서 비록 패잔병을 이끌고 싸웠으나 반드시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 -정사 위서 가후전

이때 가후의 계략이 폭발(?) 한다. 장수를 도와 조조를 여러번 물리쳤고, 그 와중에 조조는 맏아들 조앙과 아끼는 장군 전위를 잃는다. 또한 스스로도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가히 조조의 저승사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수는 이 말을 듣고 곧 감복했다. 이 이후에 태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할 때, 원소는 사람을 파견하여 장수를 부르는 동시에 가후에게 한통의 편지를 써서 구원 을 맺으려 하였다. 장수는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가후는 오히려 공공연히 장수의 자리에서 원소의 사자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원본초(袁本初)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그들 형제들끼리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어찌 천하의 선비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냐고 하시오.”

장수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말을 하시오?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응당 어느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가후가 말했다.

“태조를 따라가는 것만 못합니다.”

장수가 말했다.

“원소는 강대하고 태조는 약소하며, 또 우리들은 태조와 원수지간인데, 어떻게 조공을 따라가겠소!”

가후가 말했다.

“이는 곧 우리들이 마땅히 조공을 따라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조공은 천자를 봉양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그를 따라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원소는 강성하므로, 우리들이 적은 병력으로 그를 따라가면 반드시 우리들을 중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조의 군대는 약소하므로 우리들을 얻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조공을 따라야 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무릇 패왕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실로 사사로운 원한을 없앰으로써 온 천하에 덕망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조공을 따르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청컨대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정사 위서 가후전

가후는 위기에 처한 장수에게 조조에게 귀순하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뛰어난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 원수 진 사람에게 항복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후는 원소가 지는 별이고 조조가 뜨는 별임을 알고 있었고, 장수를 잘 받아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아들과 호위장군을 죽인 장본인을 환대한 조조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6) 조조 휘하에서의 가후

장수는 가후의 말에 따라서 군대를 이끌고 태조에게로 귀순하였다. 태조는 그들을 보고 기뻐하며 가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의 신의가 천하에서 중요시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오.”

태조는 즉시 가후를 집금오(執金吾)에 추천하여 도정후(都亭侯)로 봉하고 기주목(冀州牧)으로 승진시켰다. 기주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을 때, 군중에 남아 사공(司空)으로 군사의 일을 돌보았다. 원소(袁紹)가 관도(官渡)에서 태조를 포위했을 때, 태조의 양식이 바야흐로 떨어져가고 있었으므로 가후에게 무슨 계책이 있는지 물어보니, 가후가 말했다.

“명공의 현명함과 용맹함은 원소를 능가하고, 사람을 다루는 것도 원소를 능가하며, 싸움에 임해서 시기를 잡는 것도 원소보다 낫습니다. 이 네 가지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하지만 반 년이 지나도록 평정하지 못한 것은 공이 단지 만전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싸움 시기를 결정하면 일순간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다.”

곧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30여 리나 되는 원소의 진영을 포위 하고 공격하여 그들을 쳐부수었다. 원소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고 하북(河北)은 평정되었다. 평정된 후에 태조는 기주목(冀州牧)을 겸임하였으며, 가후를 태중태부(太中大夫)로 임명했다. -정사 위서 가후전

가후는 조조에게 계책을 간해 결국 원소를 무너뜨리고 관도전에서 승리하는 데에 큰 일조를 한다.

건안 13년(209)에 태조는 형주(荊州)를 대파한 후에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손권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가후가 간하여 말했다.

“명공께서는 옛날에 원씨를 쳐부쉈고, 이제 한남(漢南)을 수복하였으니, 위세와 명성은 멀리까지 떨쳤고, 군세는 이미 강대해졌습니다. 만일 옛날 초나라의 풍부함을 틈타 선비들에게 포상하고, 백성들을 위로해주고 편안한 땅에서 즐겁게 일하게 하면,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강동(손권)은 머리를 조아리며 승복할 것입니다.”

태조는 이러한 권고를 듣지 않아 군대는 결국 이로움이 없었다. 태조는 한수(韓遂)ㆍ마초(馬超)와 위남(渭南)에서 싸웠는데, 마초 등은 토지를 분할하여 화친을 모색하고 자식들을 관리로 임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후는 거짓으로 이를 허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조는 가후의 의견을 물으니 가후가 대답했다.

“그들을 이간시키면 됩니다.”

태조가 말했다.

“알겠소.”

하나 하나씩 가후의 계책을 사용했다. 이에 관한 일은 무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한수와 마초를 격파한 것은 본래 가후에게서 나온 계책이다. -정사 위서 가후전

가후는 그 뒤로도 손권을 굴복시키고, 마초와 한수를 패배시켰다. ( 삼국지 처음 읽을 때 저부분 참 안타까워했었는데.. ㅋㅋㅋ 장본인이 가후라니. ㄱㅡ )

7) 조비 휘하에서의 가후

이때 문제(=조비)(文帝)는 오관중랑장(五官將)이 되었고, 임치후(臨菑侯) 조식(植)은 재기와 명망이 흥성한 시기로써 서로 당파를 두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왕위계승 문제를 두고 다투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가후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방법을 물었다. 가후가 말했다.

“바라건대 장군은 인덕과 헤아림을 발휘하고 숭상하며, 직접 보통 선비의 업을 행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 아들의 도리를 고치지 않으면 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정사 위서 가후전

이때는 조조의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 불붙던 시기로, 대부분의 문관들은 조비나 조식의 편을 들어 확실히 나눠졌다. 그러나 이때도 가후는 한 쪽 편을 들지 않고, 도움을 요청한 조비에게도 간단히 " 아들의 도리를 다하라 " 라고 조언할 뿐이었다. 역시.. 처세의 달인. 다음 글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문제는 가후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깊이 연마하였다. 태조는 또 일찍이 좌우의 시종들을 물리고 왕위계승 문제에 관해서 가후에게 물으니, 가후는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을 했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요?”

가후가 말했다.

“이 문제는 마침 생각해 보아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무슨 생각이오?”

가후가 말했다.

“저는 그저 원본초(袁本初 : 원소)와 유경승(劉景升 : 유표) 부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사 위서 가후전

개인적으로 가후의 재치가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후계자를 장자로 정하지 않고 우물쭈물 하는 바람에 자멸해 버렸다. 가후는 이 사례를 들며 조조로 하여금 조비를 후계로 세우도록 은근슬쩍 권유한 것이다.

태조가 크게 웃으며 드디어 태자를 정했다. 가후는 스스로 태조의 구신(舊臣)이 아니지만, 계책과 모략이 깊고 뛰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는 것이 두려워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았다. 자식을 시집보내고 장가들일 때에도 권문세족과 혼인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에 지혜를 논하고 헤아리는 자는 가후에게로 돌아 왔다.
문제가 즉위하자 가후를 태위(太尉)로 삼았고, 위수향후(魏壽鄕侯)라는 봉작을 주었으며, 식읍을 3백 호 증가시켜 이전의 것과 합쳐 8백호가 되게 했다. 또한 그의 식읍 2백 호를 나누어 가후의 작은 아들 가방(訪)을 열후(列侯)로 삼았고, 맏아들 가목(穆)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정사 위서 가후전

조비는 가후의 말대로 하여 조조의 뒤를 이었으므로 가후에게 큰 포상을 한 것이다. 태위는 굉장히 높은 직위이다. 삼공(=한나라 때의 가장 높은 벼슬. )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8) 가후의 죽음

가후는 77세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숙후(肅侯)라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가목이 작위를 승계했으며, 군수(郡守)를 역임했고, 그가 죽은 후에 아들 가모(賈模)가 계승했다.-정사 위서 가후전

9) 내 생각

가후는 거의 틀린 계책을 내는 법이 없었다. 안목도 매우 밝았다. 가후는 동탁-> 이각. 곽사-> 장수-> 조조-> 조비로 무려 5명의 주군을 섬겼다. 이렇게 많은 주군을 섬기고 큰 활약을 하면서 무사히 천수를 누리고(심지어 오래삼.. ㄷㄷ) 간 사람은 가후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과연 처세의 달인이다..

마지막으로, 진수의 평가.

순유(荀攸)와 가후(賈詡)는 거의 잘못된 계획을 세우는 적이 없었다. 이두 사람은 권모에 빈틈이 없었고 변화에 따르는 융통성이 있었으니, 장량(良)과 진평(平)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