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이탈리아 항복 - 2chasegyedaejeon itallia hangbog

이탈리아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때부터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전개된 전역이다. 지중해 전역을 책임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1945년 5월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시실리 침공부터 이탈리아 본토 공략을 총 지휘했다. 독일은 1943년 9월 8일 항복한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원수를 C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연합군에 대응했다. 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가 잡힐 뻔하고, 살로 공화국이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를 세우지만, 이탈리아 점령을 끝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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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식생활에 대한 열정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강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의욕이 있었던 사람은 단 한사람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솔리니...그 이외의 군 상층부의 많은 사람들도 의욕이 하나도 없었고, 군비도 빈약했고, 별로 싸우지도 않고 무조건 항복하고 만다.

다른 나라처럼 끝까지 항전하고 죽기 살기로 하지 않았다는....예전의 로마제국의 모습은 어디로?

- 이탈리아 군

대장이 좀 뚱뚱한 것 같은데...괜찮을까?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스스로 선전포고를 했지만, 완전히 연전연패. 그리고 빠르게 항복. 우스개 소리로 군대의 비축 탄약보다 와인이 더 많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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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군복을 입고있는 기상 캐스터

이탈리아에서는 공군이 위성을 관할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일기예보도 군인이 한다고...

남자들은 모두 명랑 쾌할하고, 여자들은 매력이 철철 넘치는 삶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체가 또한 한없이 밝고 아름답다.

이탈리아는 식사에 대한 집념이 강해서, 군대 전투식량도 아주 고급진것을 먹었다는 사실. 

유럽 국민들에게 이탈리아에 대한 인식은...독일은 근면하고 신뢰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는 태만하거나 붉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 해는 이탈리아에 접하고 있지만, "아드리아 해의 진주" 드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령이다.

주력이었던 기관총의 성능도 허접

결함 투성이의 M30 기관총. 주력 기관총이었는데, 거의 쓸모가 없었다....

주력 기관총으로 채용 된 M30이 "이탈리아 병사는 다른 기관총이 있으면 그것을 선택"할 정도. 장점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만큼 성능이 나빴고, 이탈리아 병은 여러 장비를 선택할 여지가 있을 경우는 망설이지 않고 다른 무기를 선택.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이탈리아는 소련 다음으로 국유 기업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고 있었고, 기술력도 저하.

군수 장관 팹 구루사는 "빨라도 1949년까지 대규모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무솔리니에 통보하고, 군부의 상층부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의지도 없었음. 즉시 항복하는 이탈리아군. 아프기전에 항복하고, 옷이 더러워지기 전에 항복했다는 말도 있었다.

군 통수권을 가진 무솔리니가 군 상층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 

갑작스런 참전으로 군으로서는 정말 아닌 밤중에 홍두깨...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서 몰래 행군 준비가 이루어졌는데, 공군력으로 말하면 당시 일본에서는 68,000대의 전투기가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고.

포로 친화적인 이탈리아 인

이탈리아 인은 포로의 식사 등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배려했다는. 그래서인지, 추축군으로서는 포로의 사망률이 2%이하로 제네바 협약을 제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포로들도 상당히 온순

자..도망하는 연습이다.

이탈리아 군의 행군은 구보로 도망 연습.

이탈리아 군의 항복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포로 수용소의 문은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다고 전해진다.

점령지 등에서 너무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약탈과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면 그쪽 지역의 여성으로 부터 미움을 산다고 해서 매우 신사적이고 온화했다는...

오로지 무솔리니 혼자서 의욕이 넘쳤지만.. 전후에 바로 처형되었다.

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의 정부 쿠라라 페타치와 함께 파르티장에게 붙잡혀 즉시 처형되었고, 그 시신이 민중 앞에 전시되었다. 히틀러 자살 불과 이틀전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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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랑 사이좋게 지내다, 결국 처형당하는 무솔리니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무솔리니만이 유일한 '전투적 로마인'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이탈리아의 국왕인 ‘비토리오 엠마뉴엘 3세’를 비롯해서, 사실상 모든 이탈이라군 장교와 병사들은 2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단히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중해의 그리스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지휘부 조차도 기회만 있으면, 연합군에게 항복하던지 군장을 버리고 도주는 것이 일상화 되어

이탈리아군은 유럽의 ‘당나라 군대’로 모두들 취급해 버렸다.

당시, 이탈리아군이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은, 1942년 여름 이탈리아 제8군 23만여 병력이 소련에 투입되었지만,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 10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1943년 초 나머지 소련파견 병력은 대부분 부대가 해체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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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이 더 익숙한 이탈리아 군

당시 연합군의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이탈리아군의 상태가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탈리아군을 침략자 라기 보다는, 파시즘의 희생자 혹은 독일의 강압에 의한 부용군 정도로 여긴다.

결국 이탈리아는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 3세)과 국민들의 일치된 요구로, 파시즘의 수장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1943년 가을에 연합군에 항복해 버린다

이처럼, 1943년 6월엔 이미 이탈리아군, 대부분이 전쟁 수행 의지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하루빨리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항복할 수 있기 만을 바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 이탈리아군의 울며 겨자먹기 식,제 2차세계대전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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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는 이탈리아군, 얼굴에 미소마저 보인다

이탈리아 왕국은 사실 2차세계대전에, 스페인의 프랑코처럼 참전하기를 그리 원하지 않았다.그리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것도 사실상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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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식량 만큼은 최고였던, 이탈리아군(근대 코카콜라가 보이는게 이상하다)/ 아무튼 스파게티를 드셨다고 한다

오히려 이탈리아는 영국에 연합군 쪽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음을 전달했는데, 갑자기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해 버리자, 전세가 독일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생각을 해서 뒤늦게 독일의 편을 들어 참전한다.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된, 이탈리아군은 1940년 6월 10일부터 1940년 6월 25일까지 총 15일동안 서부 알프스를 지키던, 프랑스군 국경 수비대와 충돌한다.

하지만 이 때 조차도, 이탈리아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열세인, 프랑스 국경 수비대에 밀리는 추태를 보였다. 간신히 이탈리아군은 니스, 사보이 지방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를 얻었기는 했지만, 15일이라는 프랑스와의 전투 기간 동안, 631명 전사, 616명 실종, 2,631명 부상 등의 피해를 입는 등 앞으로의 험란한 여정이 예정되어 보였다.

2. 최악의 선택, 소련전선으로 가는 이탈리아 군

독일은 소련 침공 때, 이탈리아군에 참여를 요청한다. 당연히 이탈리아군 지휘부는 소련원정이 이탈리아에 득보다는

부담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독재자 무솔리니는 군수뇌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련 원정군을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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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한 주유소에 걸린, 무솔리니와 애인 그리고 그 측근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에 공세에 저항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은 전멸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해 보았지만 당시 독일군도 소련군에 밀리던 터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하자, 이탈리아군 제8군도 괴멸당했고 이탈리아 군은 87,795명(장교 3,168명, 부사관 및 사병 84,6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4,4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전체 235,000명의 병력 중 114,520명이 손실을 당했다.

3. 1943년에 이탈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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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8일 항복하는 이탈리아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게시된 지 한 달만에,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고, 다시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한다.

이탈리아 국왕과 정계도 무솔리니 체제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탈리아 의회투표에 의거하여 무솔리니가 실각 후, 구금당하고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을 한다.

그 후, 독일이 이탈리아의 항복과 무솔리니의 축출에 격분하여 이탈리아에 쳐들어가고, 무솔리니를 구해낸 뒤, 독일의 괴뢰정부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지만 역시 붕괴되고

무솔리니는 밀라노의 주유소에 처참한 몰골로 처형되어 매 달린다

4. 영국 폭격기가 이탈리아가 점령한 섬에 불시착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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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섬은 요사히 난민선 침몰문제로 유명해 졌다.

이탈리아의 전황이 참담한 시점이던 1943년 6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섬 남쪽 205 km,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북쪽 120 km에 위치한 곳에 ‘람페두사 섬’이라는 곳이 있었고 그 곳에는 이탈리아 여단급 군대가 진주해 있었다(몰타랑 아주 가까운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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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탈리아는 람페두사섬에 엄청난 방어기지를 구축 하였었다.(당시 선전잡지 사진)

영국 해군의 경폭격기이자 뇌격기인 소드피쉬가

조종사 시드니 코엔, 항법사 피터 게이츠, 통신사 겸

기관총 사수 레슬리 라이트 3명을 싣고 말타섬의

영국군 기지를 이륙하여

평상시와 마찬가지인 정찰 비행에 나선다

(194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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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의 경폭격기(소드피쉬)와 같은 기종으로 추정되는 비행기

그런데, 소드피쉬는, 이륙 후 기상 악화 및 항법/통신 장비의 고장으로 기지가 있던 몰타섬 방향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연료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람페두사 섬에 불시착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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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섬의 전경

사실, 그들은 그 섬이 적국인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포로로 붙잡힐 것이라

생각하며 무척이나 불안해 한다.

5. 이탈리아군의 이상 행동에, 오히려 놀란 영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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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영국군 3명에 항복하러 온, 이탈리아 군

소드피시 에서 내린 영국군 3명은, 항복을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이탈리아군이 백기를 들고 우르르 달려오자 영국군은 너무나 놀란다

3인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 선임 장교가 자신들에게 항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은 겨우 3명이고, 그나마도 불시착 한 상황인데...)

이탈리아 군 지휘관은 연료를 보급해 줄 테니, 영국군 기지로 돌아가 자신들의 항복 사실을 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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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페두사섬을 폭격하는 영국군 전폭기

그 순간에 때마침, 영국 공군이 하늘에 나타나 이탈리아군의 활주로에 기관총을 난사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이탈리아군은 더 간절히 항복을 애원했다고 한다.

3인의 영국군은 연료를 채운 후 이륙하여, 몰타섬에 위치한 기지로 귀환하고서는, 람페두사섬 주둔 이탈리아 군의 항복 사실을 알린다.

6. 3명의 영국군에게 항복한 4,400여명의 이탈리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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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 섬을 점령하기 위해 온, 영국구축함

그 날 저녁 영국 해군 구축함 HMS 룩아웃 Lookout과 함께 상륙한 영국 육군 콜드스트림 근위 연대 2대대의 95명의 병사에게, 4400여 명의 이탈리아 군은 항복하고 무장 해제를 한다

이 사건이 유명한 것은, 겨우 영국군 3명에게 4,400명이

항복했다는 사실도 황당하지만,

람페두사 섬은 연합국에 의해 해방된 최초의 유럽 영토였다

그 다음날, 영국과 미국의 언론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대서 특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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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영웅이 되는 비행사 '시드니 코엔'

특히 22세의 비행 중사 시드니 코엔은 전쟁 전에는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유태인으로, '최초로 해방된 유럽의 해방자'로 알려지며 유태인들의 영웅이 된다.

7. 이탈리아 여단의 황당한 항복은, 연극으로 까지 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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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 섬의 해변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인 새뮤얼 클라렌도프는, 코엔(영국군 3인 중 한명)의 전과를 주제로 '람페두사의 왕'이라는 연극을 집필한 후, 300 회 이상 공연하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 공군으로 복무하던 코엔은

그러나 1946년 25세의 나이로 영불해협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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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람페두사 섬

제 2 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 육군은 161,729명이 항복하였고, 73,277명이 사망 하였으며, 12,0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60,000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 하였다고 한다.

의미없는 전쟁에 끌려간, 이탈리아군을 보며, 일제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이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인지상정 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