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 lembeulanteu dol-aon tangja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 그림은 낯익은 만큼이나 선입견에 지배당하기 십상인 작품이다. 그냥 모던해 보이기 때문이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광경은 너무나 평이한 주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편견을 박살내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이다. 이 그림은 성경에서의 원 이야기를 압도한다. 그 어떤 주석가보다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그림에는 잘 알려진 코드 몇 개가 있다.

첫째, 바로크 시대의 거장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이다. 어두운 배경에서 빛을 통해 중요한 것들을 배열하는 화풍을 구사한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의 얼굴은 그 빛의 진원지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손이다. 분석가들은 아버지의 양 손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에 주목한다. 왼손은 가늘고 길다. 반면 오른손은 넓적하고 커 보인다.

그래서 왼쪽 손은 여성성이고, 오른쪽 손은 남성성이라는 도식적인 분할을 가한 다음, 하나는 섬세한 사랑을, 다른 하나는 넓은 사랑을…, 이런 식의 적용을 한다.

그리고 세 번째, 탕자의 형이다. 어디를 봐서 탕자의 형인 줄 알까. 아버지의 빛에서 곧바로 반사되는 빛은 다른 엑스트라와는 달리, 그가 장자임을 지목한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을 받고 있으며, 같은 색, 같은 스타일의 유대인 복장, 특히 이렇게 옷이 길다는 것은 상속자임을 의미한다.

통상 일꾼의 옷은 소매와 옷자락이 짧다. 일을 해야 하니까. 이를테면 창세기에서 요셉의 옷은 채색 옷이었다고 기록하는데, 그 채색 옷이란 말은 이렇게 긴 옷이란 뜻을 포함한다.

한 마디로 요셉은 상속자였던 셈이다. 그것이 형제로 하여금 모함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는 형이 그 긴 채색 옷을 입고 있다. 눈살을 찌푸리고서.

그리고 말이 없다. 이 그림 속 장자는 원래 본문과 달리 말이 없다. 이것이 네 번째 특징이며, 이제 우리가 세밀하게 살펴야 할 핵심 도상이다.

누가복음에서 탕자의 형은 뭐라 뭐라 말이 많았는데, 이 그림 속 장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이 유명한 이야기의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유대교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이 1차적인 대전제이다.

이방인은 어차피 내쳐진 종자들인데 그들을 구원하신다 하니, 가당치 않은 그 가르침에 분개하는 전통 유대인의 심정이 드러나 있고, 또 그것을 지적하는 비유인 셈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재산을 몽땅 큰 아들에게 준다는 뜻으로 오해하지만, 유대인에게는 ‘장자의 분깃’이라는 개념이 있다.

‘분깃’은 재산 실물을 표현한 말로서, ‘장자의 분깃’은 통상 그 두 배를 말한다. 아버지가 재산 상속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원들에게 분배를 하면서, ‘장자’에게는 두 배를 줬던 것이다. 그러면 그 두 배를 언제 받느냐.

아버지가 죽어야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장자의 분깃이란 그에게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아버지의 몫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기 몫을 미리 챙겨나간 둘째 아들은 극악무도한 죄는 아니다.

단지 장자가 보기에 참 싸가지가 없었을 따름이다. 그런 장자의 심정이 성서와 같은 구어체는 아니지만, 이 그림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의 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란다.

아버지의 양손이 각기의 다른 손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아들의 양손도 다르다. 한 손은 어둡고, 한 손은 밝다. 어두운 오른손이 왼쪽의 밝은 손을 짓누르고 있다.

이것이 아버지의 활짝 반기는 양손과 대조를 이룬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은 받았지만, 자신의 그 빛나는 손을 짓누르는 어두운 손(그 이중의 손)을 통해, 내면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와 같은 왼쪽과 오른쪽의 대비가 이제 동생 탕자의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대비로 이어진다.

동생의 왼쪽 발은 신이 벗겨져 있다. 발이 완전히 나와 있다. 정말로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발로서, 그의 비참했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지만 오른발은 신을 신고 있다. 어찌하여 왼발만 신을 벗고 있는 것일까? 우연일까?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 그림의 주된 구조가 왼쪽과 오른쪽의 대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동생의 오른발에 신이 신겨져 있는 어색함은 다름 아닌 그의 오른편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작은 칼과 관계를 이룬다.

이 칼은 왜 차고 왔을까. 집안에 누구 죽일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면 오랜 세월 험한 야생 생활 탓에 호신용인가?

이 칼은 그런 칼이 아니다. 이 칼은 바로 신분을 표지한다. 자신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 집에서 가지고 나간 그 모든 것을 다 팔아먹었지만, 이 작은 칼만큼은 팔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남은 자신의 표지!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 작은 검 하나만은 팔아먹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것.

이것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환대한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탕자의 오른쪽 발의 신은 신과 더불어 그의 정신을 표지한다.

여섯 번째,

이에 반해 형의 발은 한쪽이 보이질 않는다. 형의 왼발에는 동생의 벗겨진 발과는 달리 질 좋은 가죽으로 된 신이 신겨져 있는게 보이지만, 도대체 오른발은 어디 가 있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 오른발을 대신하여 지팡이가 있을 뿐.

따라서 이 도상은 전체적으로, 두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두 종류의 태도를 담고 있다.

하나는 ‘장자의 분깃’(두배)을 받은 큰 아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들’이다. (아버지와의 막연한 동거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돌아온 둘째 아들’.

이 아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기 신분을 표지하는 그 작은 칼 하나만큼은 끝끝내 팔아먹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의 아들임을 지켜낸 아들’이다.

그런 두 아들에 대한 표상인 것이다.

해설 참조: //youtu.be/btdNbph8860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 ~ 1669 )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69, oil on canvas,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위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성화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빛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렘브란트 말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성경의 사건 속에 대입시키기를 좋아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사랑과 포용력을 통해 깊은 종교적 체험을 표현한 걸작으로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성경 속 사건을 토대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아들이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을 가지고 객지로 나가 떠돌며 사창가에서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 먹이로 끼니를 때우다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를 받는다는 성서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를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지 3년 정도 지난 1636년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를 1669년에는 '돌아온 탕자'를 제작한다.

렘브란트는 삽화를 그리는 동시에 자신이 탕자가 되어 인생을 고백하는 기회로 삼는다.

렘브란트가 첫째 부인 사스키아와 외아들 티투스의 죽음외에 여러번의 큰 불행을 겪고 재산까지 탕진해 절망에 빠져 있었을때

자신을 탕자로 묘사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만이 끝까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작품에 담아냈으며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말에는 새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 잡고, 춤과 풍류를 즐기는 성서의 장면을 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거지같이 해진 옷에 죄수처럼 머리를 깍고, 다 떨어진 신을 한 짝만 걸친 채

황망하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아들의 어깨에 늙은 아버지가 두 손을

부드럽게 얹고 용서하는 자비의 순간을 묘사했다.

렘브란트는 심리적 통찰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성서의 의미를 해석했다.

그는 성서에 묘사된 입 맞추는 첫 만남이 아니라 그 다음의 포옹와 용서의 감동적인 순간을 택했다.

아버지는 자신으로 인한 지난날의 괴롭고​ 복잡했던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사람의 손길로 아들의 등을 어루만진다.

아버지의 눈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짓물러 멀게 되었다.

때문에 아버지의 시선은 초점이 없다.이는 눈이 멀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로 받을 지새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은 깊은 품위가 느껴지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의 얼굴엔 한없는 너그러움과 거룩하기까지 하나 성자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여기서 아들을 등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으로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의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온화한 부드러움이 손을 통해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근육질이며 손가락들이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싸고 있다.

반면 오른손은 누르거나 잡거나 하지 않고 아들의 등위에 부드럽게 얹혀 있어 마치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어머니의 손과 같다.

또한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 있고 화해와 용서, 치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림에서 다른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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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다르게 돌아온 탕자는 너무 왜소하고 초라하다.

누더기 속옷을 걸치고 거의 몸만 가리고 있는 그는 신발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다 닳은 신발 자체이다.

거친 발바닥은 그이 삶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의 머리는 죄수처럼 삭발한 모습으로 뉘우치는 아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나타내고 있다.

탕자의 얼굴은 엄마의 자궁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양이고 어머니의 뱃속에 머물고 있는 태아의 모습처럼 평안해 보인다.

이것은 본래 고향인 하나님의 품에 돌아왔음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품에 안긴 인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인간의 모습을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아기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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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인간상 속에서 화가 렘브란트는 예수가 죄 많은 인간에게 베푸는 속죄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한다.

아버지의 흰 수염과 핏기 없는 자비로운 굳은 손, 그리고 그의 구부린 몸은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는 장면을 실감하게 한다.

렘브란트는 색을 통해서 아버지의 어깨에 두른 긴 홍포와 아들의 누더기 옷,

아버지의 긴 백발과 아들의 아무렇게 난 쥐어뜯긴 것 같은 머리를 너무나 강하게 대조시켰다.

사랑에 충만한 늙은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과 흰 수염, 그리고 자비로운 손길을 밝고 따뜻한 빛으로 비추어 강조한다.

옆의 계단 위에서 값진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쓰고 언짢은 표정으로 이들을 내려다보는

냉담한 형제들은 어둡고 차게 묘사되어 있다.

​빛은 사랑과 구원을 어둠은 시기와 무정과 죄를 상징한다.

렘브란트는 이렇듯 인간 내면의 화 (禍​ )와 사랑을 깊게 통찰하고 이해하려 한 화가였다.

​< 출처- 지식백과, 뉴스한국등 일부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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