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배상 금액 - ilbon baesang geum-aeg

일본의 전쟁배상

1. 일본의 전쟁배상

대일 강화조약은 제14조 a항 2에서 일본의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과거 해외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현지 국가에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배상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해외에 놓고 온 재산을 배상이라고 한다면, 중국도 내몽골과 만주지역 등에 있던 일본의 재산, 광업권, 철도권익 등을 전후에 취한 만큼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강화조약 제4조는 한국과 같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 대해서도 일본 재산을 처분을 통한 청구권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패전 때까지 일본의 기업과 민간인이 해외에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일본 외무성은 1945년 8월 5일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3,800억 엔 가량의 해외자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통계를 인정한다면 1945년의 환율 1달러당 15엔을 적용하여 일본은 패전과 함께 약 250억 달러 어치 해외자산을 전쟁배상으로 지불한 셈이다.

표2. 패전 당시 일본의 해외자산 표2. 패전 당시 일본의 해외자산:5

지역 금액
한반도 702억 5600만엔
타이완 425억 4200만엔
중국대륙 東北지방 1465억 3200만엔
華北지방 554억 3700만엔
華中・華南지방 367억 1800만엔
기타 지역 280억 1400만엔
合計 3794억 9900만엔

또한 대일 강화조약 제14조는 일본이 전쟁 기간 피해를 끼친 연합국과 양국간 협정을 체결하여 배상하도록 규정했다. 전쟁배상은 이처럼 양국간 협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이 1950년대에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필리핀·베트남·버마·인도네시아 등 4개국으로 배상금은 총 3,643억 4880만 엔에 달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양국간 협정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라오스·캄보디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크로네시아·버마(추가) 등 6개국으로 총 605억 8000만 엔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의 경우는 대일 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일본으로부터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은 받지 못했으나, 1965년에 체결된 청구권 협정을 통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자금을 받았다. 회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배상적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한국 국민들에게 그러한 성격임을 홍보했다. 반면에 일본정부는 어디까지나 ‘경제원조’ 내지는 ‘독립축하금’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그렇게 자국민에게 설명했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은 동남아시아 국가와 동일하게 생산품과 용역서비스에 의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대일 강화조약 제16조는 중립국과 일본의 동맹국에 있던 일본의 해외 재산 등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 포로에 대해 보상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은 1955년에 45억 엔을 국제적십자사에 지불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다루었다. 생산품과 용역서비스에 의한 전후처리 방식은 일본이 경제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견인차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일본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아직도 북한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국가간 전후처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간 청구권 타결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본제국에 의한 강제동원피해자들이 199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있어 전후처리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이제까지 제기된 수많은 소송 가운데 일본 정부나 기업에 대해 단 한 건의 보상 의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전후보상에 관한 청구권은 국가간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원칙적으로 국가나 기업의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주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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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를 내건 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이 이만큼 살게 된 건 19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이 준 돈 덕이 크지 않느냐고, 아베 신조 정권 대변지 노릇을 한다는 일본 극우 신문의 서울 주재 논설위원은 말했다. 이럴 때는 으레 36년 일제강점기에 철도, 도로 놓고 공장, 학교 지어준 덕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는 얘기까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그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고 중국에 아편전쟁을 일으켜 유린한 것,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한 것,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것, 독일이 폴란드를 짓밟은 것이 모두 인도와 중국, 알제리, 에티오피아, 폴란드의 발전을 위해서 그랬다거나 그 나라들의 지금 발전이 배상금(또는 보상금 등) 덕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랑하니까 때려 죽였다거나, 도와주려고 빼앗았다는 말만큼이나. 그럼에도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철 지난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대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독일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이제는 어쩌면 그 노래의 곡조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전후 세대 첫 총리라는 아베 신조가 이끄는 정권 시절에 그 노래를 더는 전과 똑같이 부르기 어려운 변곡점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마침내 당도했다는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에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 심사 우대국) 배제 카드까지 꺼내들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 안보·경제 관계 틀을 흔들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일본 우파 정권의 최근 행태가 그것이다. 전례 없는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 등장 이후 한층 뚜렷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1952년 4월 발효된 미-일 강화조약과 안보동맹 체제) 동요와 동아시아 정세 급변 속에 그들이 마침내 생존전략을 바꾸려는 걸까.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아베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베의 전쟁’에서 아베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결연하고 사나운 저들의 자세엔 예전 같은 여유도 자신감도 없어 보인다. 말은 공세적이지만 행동은 수세적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최대 수혜국인 일본 주류 우파세력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 ‘아베의 전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배후 ‘일본회의’가 핵심을 장악하고 있을 ‘대본영’에서 보내는 선전 구호들은 초점을 잃은 채 오락가락하고 내부 반발도 점차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럴수록 ‘좋았던 시절’의 향수는 더 짙어지고, 흘러간 옛 노래에서 위로받으려는 욕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전후(戰後) 세대지만 향하는 쪽은 전전(戰前)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뒤로 가는 퇴행이다. 그것이 ‘아베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같은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에서 일본 극우 신문 <산케이>의 간부와 같은 얘기를 했다가는 낭패를 당할지 모른다. 1967년 이후 지금까지 독일에서 사는 후쿠자와 히로오미라는 일본계 독일 시민에 따르면, 1972년 제정된 ‘과격파 조례’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독일인” 판정을 받아 공직 금지 처분을 받은 사람이 1100명이다. 판정을 내리는 헌법옹호청의 심사를 받은 독일인은 140만 명에 이른단다.(<녹색평론> 2019년 7·8월호) 독일에선 아직도 나치 시절의 강제수용소 전 간수 등 전범자들은 90살이 넘어도 재판을 열어 형을 집행한다고 한다.

곧잘 한국 정부의 ‘무례’와 ‘국가 신뢰 상실’을 입에 올리는 아베 정권이 그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이 ‘모든 과거사를 다 처리했다’는 1965년 한일협정이다. 한일협정 교섭 일본 쪽 수석대표도 했고 협정 체결 땐 외상(외무대신)이었던 시나 에쓰사부로가 협정 체결 2년 전인 1963년에 이런 말을 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 식민지배가 조선에도 좋았다고 한 악명 높은 ‘구보다 망언’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이었다면 시나는 공직에서 추방당했거나 전범자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고토 신페이는 대만 총독부 민정장관, 남만주철도 초대 총재를 지내고 아시아 식민 침탈에 앞장섰으며 내무·외무 대신에 도쿄시장까지 한 이로 시나의 숙부였다. 시나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상공대신일 때부터 최측근이 됐고, 기시가 일본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만주국을 주무를 때 그 밑에서 통제과장을 했다. 그때 그들이 도조 히데키의 관동군과 함께 손잡은 일본 재벌이 닛산이다.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있던 기시가 1948년 12월23일 자정 무렵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7명이 교수형을 당한 다음날 전격 석방된 뒤 그의 공직 추방 해제를 미 군정청에 탄원한 것도 시나였다.

기시, 시나… 적폐 세력의 집권

기시의 외손자 아베 총리가 2015년 전후 70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도 시나의 세계관을 그대로 닮았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21세기에도 저들은 러일전쟁이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이라 우기며 ‘영광의 대일본 제국주의’를 그리워하는 시대착오 속에 살고 있다. 독일에서라면 당연히 기시도 아베도 공직을 맡지 못했을 것이고, 기시는 아마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지 않았을까.

영광의 제국주의를 읊조리는 그들이 지금 한국에 화내는 이유는, 청산당해야 할 추잡한 적폐 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베 총리가 다닌 세이케이대학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소송을 제기한 미쓰비시 계열사가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아베의 친형은 포장업체 ‘미쓰비시상사 패키징’의 사장이다.

7월19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에 불러놓고 대사의 말을 도중에 끊고는 일본이 한국의 제안을 이미 거부했는데도, “그걸 모르는 척하면서 (다시) 제안하는 것은 극히 무례하다”며 정말 무례하게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대일 소송에서 희생자들 편에 서온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판결을 두고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단”(아베 총리)이라거나 “양국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폭거”라는 등의 일본 쪽의 비난은 사실 은폐나 자가당착에 가깝다고 비판했다(<세카이> 2019년 1월호). 그에 따르면 포기한 것은 국가의 ‘외교 보호권’일 뿐,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 쪽 주장은 20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가 부인해온 논리다.

고노 외무상의 “무례” 타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월 방미 중이던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마디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 또는 곧 퇴위하는 일왕이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진정 어린 사과”를 촉구했을 때도 “극히 무례”하다고 했다.

(왼쪽부터)1951년 미-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식. 1970년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중 일본군이 중국인을 생매장하는 모습. 위키백과, 한겨레 자료, 연합뉴스

조약 체결에 초청받지 못한 이유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를 결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해 9월 체결되고 1952년 4월 발효) 체결 때 미국이 작성한 조약 초안에는 한국이 “대일 평화(강화)회담 참가국으로 결정”돼 있었다. 1949년 12월 초안 전문에서 한국은 ‘연합국 및 협력국’ 명단에 있었다. 그해 12월29일 미국 국무부가 초안과 함께 작성한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에 대한 논평’도 한국이 수십 년간의 항일 저항, 전투 기록이 있다며 강화조약 서명국(당사국)이 돼야 하는 이유를 적었다.(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2010)

그 강화조약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존 포스터 덜레스(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가 조약 초안을 뒤엎고 한국의 교전국 지위가 박탈됐다고 최종 통보한 것은 1951년 7월9일이었다. 당시 덜레스의 문서철 지도에 한국령으로 명기됐던 독도도 나중에 소속 자체가 어디인지 명기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얼버무려져, 지금의 ‘독도 문제’ 씨앗이 뿌려졌다. 덜레스는 왜 그랬을까?

정병준의 책은 그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정을 미국 국립공문서관 1차 사료를 토대로 자세히 추적하는데, 그 요체는 당시 일본을 냉전의 교두보로 육성하겠다던 미국의 대일정책 변화와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집요한 한국 배제 요구였다. 그때 요시다가 덜레스에게 보낸 비망록이 남아 있다.

“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거주자(종전 무렵에는 거의 150만 명)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는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결과 잠깐 동안 일제 지배를 받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과는 무관한 폴란드 등이 서명국에 포함됐다. 필리핀은 그때 무상 5억5천만달러의 배상금 등 모두 8억달러를 받았고, 인도네시아도 비슷한 액수를 받았다. 40년을 싸우고도 조약 체결에 초청도 받지 못한 한국이 1965년에야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받은 돈(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은 무상 3억달러 등 총 5억달러였다.

한국은 승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도 서명국이 되지도 못한 것이 아니라, 서명국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 못했기 때문에 승전국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었다. 일본을 영구 종속화한 미-일 안전보장조약(안보동맹)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 요시다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동지로, 총리까지 한 일본의 현직 재무대신이요 부총리인 아소 다로다. 아소는 2013년 7월 공개 강연에서 아베 정권의 핵심 정치 의제인 헌법 개정 절차와 관련해 “나치스의 수법을 배우는 게 어떨지”라고 했다가 말썽이 일었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히틀러가 의회를 장악해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바이마르 헌법을 사실상 해체해버렸듯이 일본의 헌법 개정도 그런 식으로 해보는 게 어떠냐는 아소의 ‘농담’은 ‘혼네’(본심)일 수 있다. 독일에서 그따위 얘기를 했다면 설사 농담일지라도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징용당한 조선인들이 하루에도 한두 명씩 죽어나갔다는 전범기업 아소탄광의 그 아소그룹(아소시멘트) 직계 후계자가 바로 그다.

사토 vs 빌리 브란트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급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시작할 때 그 최종 결정이 내려진 어전회의에 상공대신으로 계속 참석했고, 도조 내각에서 군수차관도 맡았던 A급 전범 기시. 그가 1948년 12월24일, 3년3개월 만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됐을 때, 그날 찾아간 곳이 당시 갓 출범한 요시다 시게루 2차 내각 관방장관인 사토 에이사쿠였다. 사토는 기시의 친동생이다(기시가 기시 집안 양자로 입적했음). 미국 중앙정보국의 자금을 받아 자민당 장기 집권의 토대를 쌓은 1955년 보수합동(1955년 체제)을 성사시킨 주역인 기시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사토는 지금까지 일본 전후 최장수 총리다. 외손자 아베가 곧 그 기록을 깨겠지만. 전쟁 전 기간까지 합친 역대 일본 최장수 총리는 지금까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으로부터 조선 지배를 보장받은 그 가쓰라 다로다. 아베 총리는 곧 그 기록도 깰 것이다.

일본과 독일의 운명이 크게 갈린 것은 비슷한 시기에 총리가 된 사토(임기 1964년 11월~1972년 7월)와 빌리 브란트(1969년 10월~1974년 5월)의 집권 때였다. 노동자계급 출신에 사생아인 브란트는 10대 때부터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고, 나치 시대에는 노르웨이로 망명했다가 독일에 잠입해 대담한 비합법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후쿠자와 히로오미는 “이런 경력을 지닌 정치가가 독일 총리가 된 것은 독일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회변혁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 의미를 가지게 했다”고 했다.

브란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집권 전해인 1968년 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났다.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과 평등의식, 나치 세력 재등장에 강력한 거부, 반동적인 국가의 개혁, 성 해방, 대학을 비롯한 교육의 민주화 등을 외친 68세대의 사회변혁운동 바통을 이어받은 브란트는 나치스 유산을 청산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나라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겨냥한 ‘동방외교’로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동서 냉전 종결과 소련 붕괴에도 그의 동방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 12월7일 브란트는 초겨울 비가 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사죄로 독일 과거사에 대한 응어리는 풀리기 시작했다.

문희상 의장이 일본 총리나 일왕의 ‘단 한마디의 진심 어린 사죄’를 얘기했을 때 그는 아마 브란트의 그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을 “극히 무례”한 일로 받아들이는 일본 우파의 심성과 역사관, 그리고 독일의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자행한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냐며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희생자 수로 죄업의 경중을 가릴 순 없지만, 희생자가 5천만~8천만 명에 이른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일본군은 학살한 희생자 수나 그 수법에서 결코 독일에 뒤지지 않았다. 그 전쟁에서 일본군에 희생당한 아시아 민간인만 2천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일본은 40년 세월을 식민지배하면서 차별과 수탈로 조선을 파괴했다.

사토 에이사쿠도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한 비핵 3원칙으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미국과 밀약해 그 3원칙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견된 극비 문서로 확인됐다. 사토 집권 때 일본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시-사토로 이어진 일본 보수 정치는, 브란트가 철저히 나치 등 과거사 청산, 동서 화해 쪽으로 독일을 이끌고 간 것과 달리 반공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냉전적 대결 정책에 편승해 경제적 실익을 챙기면서 과거사를 덮고 구체제와 그 세력들을 온존시켰다. 2차 대전 패전 3국 중 그때의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쓰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정한론자 이래 변한 게 없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총리가 사토였다. 그 상대는 “쇼와의 요괴”란 별명이 있는 그의 형 기시가 “내가 설계했다”고 큰소리친 만주국에서, 도조 히데키가 지휘했던 관동군 산하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였다. 이 둘을 엮은 것이 미국이고, 그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산물이다. 아베 정권은 지금 흔들리는 그 체제가 일본에 제공한 기득권을 고수하려 하면서 거기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문재인 정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배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카드가 한국 내 반정부 여론을 부추겨 문재인 정권을 좌절 또는 굴복시킬 수 있다고 착각한 듯하다. 거기에는 ‘반문’(반문재인) 기치 아래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한국 보수 주류 매체들 기사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그들의 우익 편향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것만 보면 한국은 곧 망할 나라로 보였을 테니까.

‘아베의 전쟁’은 아픈 과거사를 그대로 드러내고 대규모 배상·보상 작업을 계속하며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오히려 신뢰를 얻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개헌을 통한 ‘보통국가’화 전략과 연계된 ‘아베의 전쟁’은 유럽연합으로 귀결된 브란트의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를 분열과 대결로 몰아가는 새로운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 ‘정한론자’ 요시다 쇼인 이래 변한 게 없어 보이는 그들의 전쟁은, 그러나 실패할 것이다.

한승동 언론인·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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