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 등장 배경 - pungsoghwa deungjang baegyeong

- 전대에도 풍속화가 제작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18세기경부터 특히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역시 조선 후기의 시대정신이나 경제, 사회적 여건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1. 조선 후기 풍속화의 발달과 그 배경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살아가는 풍속을 그린 그림을 풍속화라고 할때, 풍속화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고구려 시대 사람들의 갖가지 풍속을 복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사시대의 암각화에서 풍속적인 면을 발견해낸다. 선사 시대 원시인들이 바위벽에 새겨 그린 암각화에는 그 당시의 주술적 신앙과 생활상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히 풍속화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도 풍속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풍속화는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어떤 생활 습속을 형성하며 살아가던 오랜 옛날부터 인간에 의하여 꾸준히 창작되어 오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후기에 이처럼 풍속화가 특별히 발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후기 풍속화가 가장 발달하던 시대는 영정조, 순조 초년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대의 특징으로는 우선 영조, 정조와 같은 뛰어난 왕이 다스리던 시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가 아닌 조선시대와 같은 시절에는 국가의 흥망성쇠의 큰 열쇠가 왕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조선후기는 영조와 정조 같은 뛰어난 왕들이 다스리면서,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부흥시켰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조선 초기 이후 두번째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또 영조와 정조는 개인적으로 직접 그림을 그릴 정도로 회화에 취미가 같았고, 따라서 그림에 대한 관심과 후원이 남달랐던 점도 하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영조, 정조, 순조 초년은 대개 18세기와 19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이때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던 때였다. 일반 백성들도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문화란 이처럼 안정된 사회 분위기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위로는 국가와 왕실의 각종 행사가 그림으로 표현되고,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생활의 영유와 문화적 안목으로 말미암아 조선 후기의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주변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탐구하며 그림으로 그려 즐길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뿐이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시와 기행문,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도 사실적이며 풍속적인 묘사가 많았다. 당시 문인들이 산수 유람을 즐기면서 쓴 기행시문, 백성들의 생활상을 읊은 서사시,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 사설시조나 판소리 등도 크게 보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 일본의 경우에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식 풍속화가 크게 유행했는데, 우키요에가 바로 그것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서민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우리 풍속화와는 달리 주로 판화로 제작되어 대량 생산되었다. 또 기생의 자태나 남녀간 애정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여 우리나라 풍속화에 비해 더욱 감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쨋든 일본의 우키요에도 에도시대 도시의 발달과 서민 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성행한 데에서 우리 풍속화와 공통점이 있다.

-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김홍도에 앞서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등의 일부화가들이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1) 김홍도

- 서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았다.

- 정선이 진경산수화에서 중국이 아닌 한국의 산첩을 소재로 삼았듯이 김홍도는 그의 풍속화에서 한국 서민 사회의 정경을 다루었던 것이니 이 두사람이야말로 조선 후기 화단의 새경향을 잘 대변해준다.

<단원풍속도첩> 

   

<단원풍속도첩>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그림책 형태의 풍속화 25첩이다. 보물 지정

풍속화는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을 하여 그렸는데, 각 장의 크기는 가로 22.4㎝, 세로 26.6㎝ 정도이다. <씨름>, <대장간>, <글방> 등과 같이 서민사회의 일상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 구수하고도 익살스럽게 표현된 그림들이 실려 있다. 풍속화의 대부분은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특히 인물은 웃음 띤 둥근 얼굴을 많이 그려 익살스러움을 한층 더하였다. 선이 굵고 힘찬 붓질과 짜임새있는 구도는 화면에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한편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조 21년(1745)∼순조 16년(1816)에 그린 이 풍속화들은 활기차게 돌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의 사실성과 사회성을 그 생명으로 삼았고, 또한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 신윤복

- 남녀간의 애정 또는 춘의를 즐겨 그렸다.

- 유교적 도덕 관념이 농후했던 당시에 속된 그림들에 자신의 작품임을 떳떳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대담성도 있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사회적 추이를 시사해주는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 신윤복의 작품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 (자유로운 애정 표현)를 나타낸다.

- 배경에 가끔 산수를 종종 그리는데 이러한 산수에 보이는 석법, 준법, 수파묘 등에는 김홍도의 영향이 보인다.

- 조선 후기 풍속화는 19세기에 풍미하였던 김정희 일파의 남종화 지상주의 앞에 한낱 저속한 속화로 간주되어 쇠퇴하게 된다.

  

<혜원풍속도>

조선 후기의 화가인 혜원 신윤복(1758∼?)이 그린 <단오풍정>, <월하정인> 등 연작 풍속화 30여 점이 들어 있는 화첩으로 가로 28㎝, 세로 35㎝이다.  국보 지정

아버지 신한평의 뒤를 이어 한때 도화서의 화원이기도 하였던 신윤복은 참신한 색채가 돋보이는 산수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특히 풍속화에서 그만의 독특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혜원풍속도는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는데, 가늘고 섬세한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을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가게 표현함으로써 다소 선정적인 느낌이 들며,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글과 함께 낙관이 있지만 연대를 밝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은 알 수 없다.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전형필이 구입해 새로 틀을 짜고 오세창이 발문을 쓴 것으로 미술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18세기 말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3) 윤두서

   
   

     
     
   

<해님윤씨가전고화첩>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인 윤두서(1668∼1715)의 서화첩이다. 윤두서는 정선·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화가이며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말그림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서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윤씨가보』라 쓰여진 화첩 2권과『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 등이다. 화첩 1권은 선면(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숙종 30년(1704)∼숙종 34년(1708)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다른 1권은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윤두서가 잘 그렸다는 말그림은 ‘백마도’와 목기를 깍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나물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등이 있으며 다수의 미완성 그림들도 수록되어 있다. ‘백마도’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며 뒷다리를 살짝 들어올리는 모습으로 생동감을 준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후에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화첩은 선비화가였던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그림솜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그의 실학자적인 면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다.

2. 19세기 후반 풍속화

- 19세기 후반 풍속화는 장식성에 그친 경직도류의 병풍 그림이나 호사 취미로 전락한 춘화첩이 주류를 이루면서 더 이상 변력기의 시대 정신과 조응하지 못하였다. 또 이를 계승한 구한말의 풍속화에는 회화성이나 장식성보다 기록적인 성격만 유지되었다. 근대로의 개화 노력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꺾이면서, 개항 이후 외국인의 조선 풍속에 대한 관심에 따라 그려진 사례를 통해 구한말 풍속화의 주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독일에 가 있던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은 바로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와 함께 구한말에 기록적인 풍속화첩을 남긴 화가로는 평양에서 활동한 일재 김윤보가 있다.


 이처럼 예술적 풍모보다 기록화적인 성격으로 치우친 구한말의 풍속도들은, 새로움보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쇠잔한 말기적 양상을 짙게 띠고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중세적 양식에 머물러 근대로의 사회 변동에 적응하지 못한, 그리고 이 시기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해진 봉건 사회의 문화 수준을 드러낸 결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풍속화의 맥락은 19세기 말 내지 20세기 초의 근대화 과정에서, 회화 작품으로보다 신문이나 서적 등 인쇄 매체의 삽화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중국과 일본의 풍속화

- 중국은 이미 북송 때 수도인 카이펑(開封)의 도시풍속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린 ‘淸明上河圖’라는 명품을 낳은 전통을 갖고 있다. 명나라 때 구영(仇英, 1494~1552?)이 다시 그린 ‘청명상하도’는 조선에 전래되어 조영석의 풍속화와 정조 때 제작된 ‘城市全圖’에 영향을 주었다. 명대에는 소설의 삽화를 중심으로 풍속화가 발달했다. 그런데 정작 청나라 들어서면서 국가의 기반을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퇴폐적인 소설을 탄압하는 바람에 풍속화 제작이 주춤해지고 대신 우리의 민화에 해당하는 니엔화가 유행하게 됐다. 


동아시아 국가 중 풍속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7세기 후반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전개된 서민회화인 우키요에가 꽃을 피웠다. 사창가인 遊里의 遊女를 그린 미인와 가부키의 인기 있는 배우를 선전하는 브로마이드 사진과 같은 야쿠샤에(役者繪)가 에도시대(1603~1867)에 인기를 끈 풍속화의 주제다.


도슈사이 샤라쿠(東州齋寫樂, 18세기말 활동)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호평을 받을 만큼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화가다. 한 때 어떤 소설가에 의해 김홍도가 일본에 가서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화제가 됐으나, 생애와 화풍으로 보아 그가 김홍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지만 에도시대 최고의 미인상을 그린 우키요에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 1753~1806)가 신윤복에 해당한다면, 샤라쿠는 김홍도에 비견할 수 있다. 우타마로의 작품이 신윤복처럼 여성적이라면, 샤라쿠의 작품은 김홍도처럼 남성적인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샤라쿠는 강렬한 필선으로 매우 독특하고 미묘한 성격의 캐릭터를 즐겨 나타내었다. 그의 대표작인 ‘오타니 오니지가 분한 하복 에도헤이’는 금품을 빼앗으려는 악한을 그리고 있다. 음흉한 눈빛과 꾹 다문 입에서 결코 선한 배역이 아니고 목을 앞으로 쭉 내밀고 양손을 활짝 펴고 달려드는 자세에서 긴박한 순간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치카와 에비조가 분장한 다케무라 사다노신’는 가부키 배우의 내면적인 성격을 강하게 표출한 작품이다. 이마에서 미간으로 쏠린 눈썹, 은행잎 모양의 눈에서 발산되는 눈빛, 그리고 굳게 담은 입의 모습에서 강인한 인상을 받는다.


김홍도가 등장인물의 ‘관계’를 극화시켰다면, 샤라쿠는 등장인물의 ‘개성’을 표출하는데 주력했다. 전자가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조형을 창출했다면, 후자는 세련되고 정제된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조선의 사회적이고 자연주의적 미의식과 일본의 개인적이고 감각주의적 미의식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청명상하도>  장택단,  북송                                                     <청명상하도> 구영,  명

 

도슈사이 사라쿠                                                   기타가와 우타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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