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답 - naneun nugu-inga dab

13. 나는 누구인가

  • 홍창성의 철학하는 삶
  • 입력 2020.06.22 14:53
  • 수정 2020.06.22 15:34
  • 호수 1542
  • 댓글 2

‘나는 누구인가’는 묻지 말아야 할 모순된 질문

잘못된 신비감과 심오한 느낌 불러일으키지만 논리적 오류
철학은 논리적 모순을 결과하는 대상은 존재 못한다고 판단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는 점 깨닫는 차원에서만 의미 있어

그림=허재경

“나는 누구인가.”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만한 물음이다. 일상에서는 묻지 않을 질문이지만, 불자는 이 물음이 가지는듯한 어떤 심오한 깊이를 헤아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현대분석철학은 원칙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것 같은 심오한 질문은 실은 개념적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Who am I?”인데,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렸나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Who are you?”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통 “나는 홍길동입니다.”라는 식으로 답한다. 그러나 물론 불교계에서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나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묻고 있는가. 이 질문이 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로 물어야 한다. 그러면 미국인이라면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의 직업이나 직책을 모릅니까?”라는 식으로 한심하다는 듯 되물을 것이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심오함과 신비감은 먼저 “Who am I?”와 “What am I?”를 구분하지 않고 애매하게 섞어 쓴 혼동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애매함의 오류에 해당된다. 한편, “What am I?”라는 질문이 일상에서 말하는 직업이나 직책, 가족에서의 위치 등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종교적·철학적 정체성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질문은 개념을 분명치 않고 모호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논리학자들이 경고하는 모호함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한국어와 영어의 “왜 Why”는 인과적인 원인(cause)을 묻기도 하고 또 어떤 목적이나 이유(reason)를 묻기도 한다. 이 물음은 생존의 생물학적 원인과 살아가는 구체적인 목표와 이유를 개념적으로 뒤섞어놓고 질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오도(誤導)해 이것이 마치 심오하고 신비한 질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더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살펴보자. 존재세계는 나와 나 밖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적인 세계(the internal world)와 외적인 세계(the external world)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곧 나의 의식세계와 의식 밖의 세계와도 일치한다. 내 의식세계는 1인칭 관점에서만 기술할 수 있고, 오직 나만 접근할 수 있으며, 내가 내성(內省)한 내용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어 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내 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제 1인칭 관점에서 보는 나를 ‘나1’라고 하고 3인칭 관점에서 지칭된 나를 ‘나3’라고 해보자. 나1는 주관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남들이 바라볼 때 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나3와는 내 의식에의 접근가능성과 의식내용의 무오류성 측면에서 전적으로 다르다. 나1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내1가 ‘나1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며 나1를 찾아 나1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시키고 탐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일단 내1가 나1에게로 향할 수 있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어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 아무것도 그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non-reflexivity) 때문이다. 칼은 버터를 자를 수 있지만 그 스스로를 향해 서서 스스로를 자를 수는 없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스스로를 가리킬 수 없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만 스스로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홍길동은 그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다. 스스로를 향할 수도 없는데, 향해야만 가능한 사랑도 미움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홍길동이 스스로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의 한 부분, 예를 들어 그의 의지가 그의 다른 부분인 감정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경우일 뿐이다.

위의 원리는 내1가 나1를 향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나1는 나1를 찾을 수 없고 나1에 대해 고민하거나 변화시키려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1를 향할 수 없고 없는 내1가 나1에 대해서 물을 수 없다. 한편, 이 질문을 “나3는 누구인가”로 바꾸면 뜻이 통하게 된다. 내1가 나1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1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3는 누구 또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위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남들이 바라보는 나3는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나 철학에서는 이런 질문을 중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1가 “나1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인데, 이럴 경우 이 물음은 위에서 지적한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질문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백보를 양보해 질문을 “나3는 누구인가”로 해석하더라도, 우리가 한두 걸음만 더 나가보면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다음의 문장들에 주목해 보자.

(1) 내1가 나3이면 내1가 아니다.
(2) 내1가 나3가 아니어야 나1다.

우리가 주관으로서의 나1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위의 (1)과 (2) 두 문장은 모두 참이다. 내1가 객관화되어 내3가 되면 나1로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1와 나3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entity)이라는 점이다. 홍길동이 (또는 그의 의식세계가) 1인칭 관점과 3인칭 관점에서 모두 관찰되고 기술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은 홍길동 하나뿐이다. 관점이 달라진다고 해서 대상의 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관점을 바꿀 때마다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가 거듭 생겨날 것인데, 이것은 망상이다. 그래서 이제 나1와 나3를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 X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위의 두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된다.

(1) X가 X이면 X가 아니다. 
(2) X가 X가 아니어야 X다. 

이는 분명한 패러독스로서, 철학은 논리적으로 모순을 결과하는 대상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X, 즉 나1 또는 나3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금 확인하지만, 붓다의 가르침 무아(無我)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논리적 오류 때문에 잘못된 신비감과 심오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지혜롭다면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 중요한 수행이기 때문에 방편으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나 또한 다른 출재가자와 마찬가지로 이런 방편을 소중히 받아들인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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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수 천 년간 인류 역사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는’ 모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0년을 살든지 100년을 살든지 결국에 가서는 죽음으로 끝을 맺고 만다. 왜, 어떤 이유에서 인류는 이 허무하고도 공허한 삶을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 우리는 ···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새번역 에베소서 1:4~7)

위에서 언급한 세상 창조 이전 즉 지구가 생기지도 않았을 때에 택함 받은 ‘우리’는 누구일까? 에베소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과 그의 서신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다. 즉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인생들이 지구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의 처지에 있다고 말한다.

과연 전 세상의 나는 누구이고, 현재의 나는 누구이며, 죽은 후에 살아남아 영원한 집에 돌아갈 미래의 나는 누구일까(전도서 12:5~7).

사람은 흙과 생기가 결합된 존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흙)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현대인의성경 창세기 2:7)

사람에 대한 이해는, 사람이 어떻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산 존재.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시작되었다. 성경의 인물들은 그 생기를 가리켜 ‘신(神)’, ‘영혼’이라고 말한다(전도서 12:7, 에스겔 37:14, 누가복음 12:20). 즉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혼이 몸에서 나가면 사람이 죽고, 영혼이 도로 몸에 들어오면 사람은 살아야 한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바로 사르밧 땅에 있는 한 과부의 아들이다. 그는 갑자기 위중한 병에 걸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과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던 선지자 엘리야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안고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엘리야는 ···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그 아이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그가 되살아났다.

(새번역 열왕기상 17:22~23)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영혼’에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를 깨달았던 베드로는 사람의 육신을 가리켜 영혼이 임시 거하는 장막집이라고 표현했고, 사도 바울은 사람이 죽게 되면 장막집에서 벗어난 영혼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가게 된다고 말했다(베드로후서 1:13~15, 고린도후서 5:1~9).

이처럼 사람의 본질이 ‘영혼’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지금도 육신의 만족을 누리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고하고 탄식하고 좌절한다. 그러다 결국 대면하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논한다.

이제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창조 전부터 존재했던 진짜 나의 존재. 죽음 후에도 살아남는 진짜 나의 존재. 내 영혼이 어째서 육신을 쓰고 이 땅에 살고 있으며, 사는 동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

인생에 대한 해답은, 사람의 영혼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가를 아는 데부터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내가 땅(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 때에 ···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욥기 38:1~21)

욥(Job)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그는 부자로 태어났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었다. 쌓아놓은 재산을 잃고, 질병으로 고생하고, 심지어 큰 재앙으로 자녀들까지 잃는다. 그를 위로하러 온 세 친구들과 다투기도 한다(욥기 1:13~22, 2:7~10, 4:1~26:14). 사는 날 동안 수고와 탄식, 미움과 적개심, 고통과 괴로움에 허덕이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기 전에 욥이 어디엔가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하나님 곁에서 기뻐하며 노래까지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도대체 지구 창조 이전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 다름 아닌 욥을 포함한 인류가 인생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전 신령의 시절이다. 우리는 천사세계에서 이 땅에 내려온 존재들인 것이다(누가복음 15:4~7, 19:10).

욥, 솔로몬, 예례미야, 요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인류는 왜 천사세계에서 이 땅에 내어보냄을 입은 것일까(예레미야 1:5, 요한복음 1:6, 9:2)?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

앞서 사도 바울은 인생을 가리켜 ‘하나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라고 얘기했다(에베소서 1:4~7). 전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여호와께서 ··· ‘너는 두로 왕을 위해 슬퍼하며 나 주 여호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 네가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 있으면서 갖가지 보석으로 단장하였으니 곧 홍옥, 황옥, 금강석 ··· 이 모든 것은 ···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너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너를 택하여 지키는 그룹 천사로 세웠으므로 ··· 네가 창조되던 날부터 네 행위가 완벽하더니 마침내 네 악이 드러났구나. ··· 횡포를 부리며 범죄하였다. 그러므로 지키는 너 그룹(천사)아,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 너를 땅(Earth, 지구)에 던져 ···

(현대인의성경 에스겔 28:11~17)

기원전 11세기경 번영을 누렸던 두로(현재 지명 ‘수르’). 두로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해안 도시 중 하나다. 솔로몬과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던 두로 왕 히람은 이스라엘 성전건축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자를 지원했던 실존 인물이다(여호수아 19:29, 열왕기상 5:1~6).

성경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을 가리켜, 그의 근본이 하늘의 그룹 천사라고 말한다. 그가 범죄하여 이 땅(지구)에 인생으로 태어나기 전 그의 본래의 성격과 지위가 어떠했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곧 범죄한 천사와 인간은 오묘하고도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무수한 천사들이 범죄하여 이 땅에 인생으로 태어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내 영혼이 울면서 세상에 태어나 삶을 시작하고 각종 인간관계의 문제, 종교적 문제, 경제적 문제, 도덕적 문제, 전염병의 위험 등에 얽매여 수고로운 여정을 살다 허무한 죽음을 당하는 근원적 원인, 그것은 하늘에서 지은 죄 때문이다. 성경은 그 죄의 값을 사망이라고 기록한다. 인류가 하늘 재판정에서 선고받은 죄의 형량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지위 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생들의 최종 목적지가 ‘죽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로마서 6:23, 히브리서 9:27).

[일화일언]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    [ 바로가기 ]

사람이 이 땅에서 찾아야 할 것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범죄한 천사들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주셨을까. 인생들은 도대체 이 시간에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새번역 요한1서 1:8~10)

우리는 ···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새번역 에베소서 1:7)

인생(人生). 이는 하늘의 범죄한 천사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시간이다. 천사세계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기회의 시간인 것이다. 이를 깨달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사는 동안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도 가버나움 회당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수차례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불쾌히 여겼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던 사람들도 이 말에 걸려 넘어졌다.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라며 웅성댔고 비아냥거렸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더욱 힘주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무엇이 그리도 간절하고 처절하셨던 것일까. 도대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일까.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을 가져 사례하시고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 잔(포도주)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8~20)

이날은 성력 1월 14일 저녁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유월절 새 언약을 지킬 객실을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드디어 이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방법을 공개하셨다.

떡과 포도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십자가에서 찢기실 당신의 살과 피라고 알려주셨다. 당신의 살이 채찍에 찢기고 온 피를 쏟아야 하는 죽음을 이미 예견하신 것이다.

몸서리칠 정도로 슬프고 끔찍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무엇이 그리 애타셨는지, ‘유월절’ 지키기를 간절히 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이날 유언을 남기셨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있는 법.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께서 이날 하신 유언 곧 약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한다(히브리서 9:15~17).

도대체 새 언약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하신 약속은 무엇일까.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그토록 새 언약을 외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류에게 ‘죄 사함’의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마태복음 26:17~28). 인류가 전 세상에서 지은 ‘사망죄’를 끊어내시고 다시 본래의 천사세계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요한복음 17:5~10).

이제, 바쁜 세상살이에 묻혀서 잊고 있던 진짜 나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내가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살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내려오셨는지. 왜 그토록 애달프게 새 언약을 외치셨는가를 말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죄 사함’이라는 답을 찾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인생의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이자, 인생의 해답인 것이다.

<삶과 죽음과 영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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