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업적 - lu-i 16se eobjeog

루이 16세(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

#마리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장미마리앙투아네트 #루이16세의자녀들 #루이16세의형제들 #루이16세의아내 #루이16세와마리앙투아네트의사랑

#루이16세가계도 루이16세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왕가출신왕 이다. 본명은 #루이오귀스트다. 그는 프랑스 혁명 때 퇴위당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건으로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가 되었다. 그는 루이 15세의 손자다. #마지막루이 ##루이오귀스트 #루이14세본명

동생 프로방스 백작과 함께 있는 베리공작(루이16세)1757년

루이 16세는 1754년 8월 23일,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인 작센의 마리 조제프 공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베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20살때의 루이 16세(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아버지인 왕세자 루이(1729 ~ 1765)가 사망하자 루이 16세가 1765년 11살의 나이로 루이 15세의 후계자 왕세손봉해진다 된다 .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 사망 후 9년 후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서거한다

루이 16세 1773년

#루이15세사망 #왕태자루이페르디낭 #작센마리조제프공녀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 루이 16세 1775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 거행후 20세의 나이로 즉위한다.하지만 프랑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사형(死刑)된 비운의 왕이다.

루이 16세(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1774년 국력이 쇠약해진 때에 즉위하였다. 궁전의 경비 등으로 인하여 초래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치세하에서도 호전되지 못했다. 루이 16세가 즉위당시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지는 처지가 되었다.

국왕이 된 후의 루이16세 , 1775년 루이 16세(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해 미국을 지원해 프랑스의 경제더욱더 악화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루이 16세는 즉위하면서 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계속 시달렸다 . 프랑스의 고질적문제가 사태 해결을 가로막았는데 구 체제하에서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능력이 아니라,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하여 문벌은 없지만, 학식,기술, 재산같은 실력을 갖춘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대관식 이후 성령 기사단의 작위를 받는 루이16세

즉위후 화려한 궁정 생활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루이 16세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대규모의 예씩과 종교적인 축제들을 주기적으로 열었다. 궁정에서 예의 범절이 매우 중시되어 왕실 일가의 기침이나 취침시에 치러지는 의식이라든지 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해야하는 경우 더욱더 격식을 차렸다.

루이16세

또한 당시 프랑스는 통일된 기준법이 없어 없이 지역별로 관습, 법 등이 다 달랐다. 북부와 중부지방의 세금이 가장 무거웠고 파리가 특히 심했다.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의 10~15%를 세금으로, 8%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를 부양하는 돈을 냈고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때까지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소득의 10%를 교회에 헌금하는 십일조를 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세개혁으로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조치에 크게 저항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존속을 위해 밀어붙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뒤로 미루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루이 16세(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1787년 거의 절망의 상황에서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인 명사회를 소집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모임을 가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1789년 과세의 승인을 요구하기 위해 17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루이 16세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앙투아네

카를 6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1세의 장인이다. 당시의 신성로마제국은 명분상의 황제국이었고 프랑스, 영국 등의 왕국과 동격으로 실추되었다.마리 테레지아(마리앙투아네트의모후)의 아버지인 부왕 카를은 아들을 포기하고 마리 테레지아에게 상속권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마리앙투아네트어머니 #오스트리아여왕 #마리아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합스부르크 군주국[2] 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 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가족들

마리 테레지아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 테레지아(마리 앙투아네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대공으로 널리 알려져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1732년 빈에 유학하러 온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다.

마리 테레지아 그림과 마리 테레지아가 새겨진 금화 (마리앙투아네 어머니)

카를 6세는 딸 마리 테레지아 남편감 후보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왕세자나, 스페인의 카를로스 왕세자, 포르투갈의 주제 왕세자와의 결혼을 생각했었다하지만 카를 6세 역시 프란츠가 마음에 들었고, 특별히 딸에게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수 있도록 해 1736년 2월 12일에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마리 테레지아(마리 앙투아네의 어머니)

당시 연애결혼이기 했지만 로트링겐 공국을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적 결합이기도 하였다.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여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 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후다.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자녀들

오스트리아는 그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있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고자 했다. 적대국인 프랑스와 동맹 강화의 노력으로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1774~1792)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프랑스의 도팽인 루이 오귀스트(루이16세)와 자신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정략 결혼시키기로 계획한다.

마리 앙투아네트 어린 시절

1755년 11월 2일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작 프랑수아 3세의 11녀로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아버지, 프란츠 1세의 외종조부가 루이 14세이다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앙뚜아네뜨, #마리앙뚜아네트, #마리앙투와네트 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마리앙투아네트다.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

즉,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엘리자베트-샤를로테'가 프란츠 1세의 어머니이다.

오빠 요제프2세와 그의 부인 바이레른의 마리아 요제프의 결혼식, 1765년,마리아 안토니아(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

오빠 요제프2세와 그의 부인 바이레른의 마리아 요제프의 결혼식, 1765년 맨 오른쪽 춤추고 있는 여성이 마리 앙투아네트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62년,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온 여섯 살난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일으켜주었고 즉석에서 청혼을 받기도 하기도 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한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 1752년 8월 13일 ~ 1814년 9월 8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로 마리아 카롤리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열세 번째 자녀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하여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왕비가 된 마리아 카롤리나와 가장 친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1742년~1798년 56세사망)

하지만 15번째의 딸로태어난 마리앙투아네트와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모후와 같은 날 1755년 11월 2일에 마리 테레지아의 5번째 딸로 태어나 어머니 마리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다.

열두살의 마리앙투아네트 1768년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다 .

열두살의 마리앙투아네트 1768년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독일어: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이다.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프랑스어: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로 불리게 된다.

열두살의 마리앙투아네트 1768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라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하프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13세의 마리 앙투아네트 1769년 (프랑스와의 혼담을 위해 그려진 초상화)

마리앙투아네의 초상화를 보고 있는 루이 15세의 가족들 1769년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졌고 미래의 왕비를 교육하기 위해 프랑스 오를레앙 교구의 주교인 베르몽 주교가 보내졌다.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희생되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비운을 예상이나 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1769년경

딸이 단두대에 처해질 미래의 일은 잘 모른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루이 5세의 정부,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775년 루이 15세 세 손자와 그의 부인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루이 오귀스트)에게 14세 때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와서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녀는 유독 프랑스어를 어려워했고 훗날 프랑스의 왕비 생활에서도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려 몇번 지적되었다.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라는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았다.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결혼식 1770년 5월16일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졌고 미래의 왕비를 교육하기 위해 프랑스 오를레앙 교구의 주교인 베르몽 주교가 보내졌다.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결혼식 1770년 5월16일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찬가’가 만들어져 성대하게 축복되었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가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작품, 1775년, 조각가 루이 시몽 부아조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가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조각가 루이 시몽 부아조가 1775년 6월13일에 거행될 대관식 앞에 1774년 말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원형을 바탕으로 세브르 왕립 제조소에서 만든 작품이다.

얼마 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20세에 왕위에 올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4세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71년경

1770년에 베르사이유에 도착한 어린 왕세자비이자 훗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초기에 루이 16세와는 가깝지 않았다.외로움에 승마와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마리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사람들의 눈총을 이겨내고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으로 달래려고 사교에 몰두했다.

1773년경,말을 타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또 활달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실에서 주최하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에 따라 나서기도 했다. 당시 여성들에게 권장방식인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걸터앉아 말을 타기도 했지만, 남자들처럼 두 다리를 양쪽으로 나누어 내리고 앉아 말을 타는 일도 많았다.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딸과 정기적으로 주고 받던 서신에 일찍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말타는 습관을 우려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73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부부는 취미나 기질 등이 달랐으나 (앙투아네트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화려한 성향이었으나 루이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사색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지만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결혼후 루이16세의 무관심과 외로움으로 스웨덴의 귀족. 생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염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리앙투아네의 비밀연인 한스 악셀 폰 페르센

한스 악셀 폰 페르센(1755년 9월 4일 ~ 1810년 6월 20일)은 스웨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신이자 연인이다.그러나 루이 16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774년 1월, 파리 오페라의 가면 무도회에서 프랑스 왕태자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이미 많은 총신이 있었지만, 동갑이라서 점차 친해졌다.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

이런 우호적 관계에는 스웨덴의 국익을 바라는 구스타프 3세의 의도가 있었다. 1774년 5월, 루이 15세가 죽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되었고 염문설이 나돌자 스웨덴으로 바로 귀국해 미국 독립 전쟁(1776년 - 1783년)에 참가하였다.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

1778년이 돼서야 다시 프랑스로 돌아 왔고, 프랑스 왕실로부터 스웨덴인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구스타프 3세와 함께 유럽 국가를 순방하였으며, 178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도왔다. 1788년에는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가해 승리로 이끌며 유럽에서 스웨덴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해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편지를 끝낼 수가 없네요." 프랑스 수집품 보존 연구센터에서 악셀 폰 페르젠 스웨덴 백작에게 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 내용의 진실이 밝혀졌다.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은 외교관이면서 군인이기도 해서 출정을 많이 나갔기 때문에 한번에 오랜 기간 동안에 프랑스에 머문 적은 없었다. 페르센 백작은 외교관답게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처럼 사교계에 진출하여 여러 연인을 뒀으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평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사로 그녀를 사랑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백작

바렌 도주는 1791년 6월 20일 ~ 22일, 프랑스 혁명기에 일어난 국왕 루이 16세 일가의 파리 도주와 체포 사건이다. 바렌은 체포된 장소의 지명으로, 바렌 국왕 일가 도망 사건이라고도 한다.페르센 백작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국왕 일가의 망명을 돕는다. 하지만 왕실의 망명 미수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망명의 실패로 프랑스의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공화파가 전면에 등장하고 입헌군주제의 성립 가능성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루이 16세가 반(反)혁명 측에 있다는 인식이 퍼져 국왕부부의 처형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93년 1월 21일, 브뤼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소식을 들은 페르센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하였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의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하여…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절대 왕정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물들어 있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뒤 바리가 사용했던 도자기 티세트는 한 세트에 수천만 원을 호가했고 상류층의 무절제한 사치를 엿볼수 있다.

이는 결국 루이 16세 재위에 이르러, 재정이 바닥나는데 일조했으며 신고전주의로 변화를 이끈다. 비록 당시 귀부인들이 예술품과 예술 후원 등으로 인해 돈을 많이 써 문화재들을 많이 남긴 덕택에 현대의 프랑스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긴 해도, 적어도 그 당시엔 분명 프랑스 왕실 국고에 큰 타격을 입힐 정도로 많은 돈을 사용했다.

.

궁정 대례복을 입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76년/ 장 밥티스트 앙드레 고테에 다고티(1740-1786)작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이후, 그때까지의 프랑스 왕들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애인을 들이지 않고 아내하고만 금슬 좋게 살았다.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여인들을 탐하고 무수한 여자들을 농락했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의 성생활은 왕답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79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성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루머가 퍼졌다. 그런 와중에 루이 16세의 성향은 국민들에게 비호감을 샀고 이는 국민들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

#궁정대례복을입고있는마리 앙투아네트, 1779년(24세)

이른바 앙리 4세를 본받아 호색한이 되는 관념은, 어느정도 명성과 업적이 있는 군주나 귀족에게 허용된 것이다. 민중들이 허용하지 않은 부분의 호색은 오히려 프랑스 왕으로서 마이너스가 되었다

#궁정대례복을입고있는마리 앙투아네트, 1779년(24세)

결혼 후, 왕으로 즉위한 후 한동안 부부관계가 없자, 이로인해 무수한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을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가 진찰했던 기록을 공개했다.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앙투아네트와 부부관계를 본인이 피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와네트 1779년(24세 때)

당시 프랑스 왕실이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모두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적국 출신의 왕비로 곱지못한 시선을 받던 처지라 그녀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게 퍼져나갔다.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궁정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며 사교계에 몰두했다.

베르아이유 궁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초상화를 그니는 고티에 다고티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오스트리아의 퀼른 대주교, 왕비의 형제 요제프 하우징거, 1776년, 독일 연방 소재

루이 16세가 즉위하고 신혼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내 구실을 못하는 남편을 답답해하며 편지를 친정으로 보냈다. 이 편지를 보고 소문을 걱정한 요제프 2세가 여동생과 루이 16세를 만나러 직접 프랑스로 온 적도 있다.그 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이 좋아지고 그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수많은 보석을 부여받게 됐다. 루이의 성(性)적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나 치료를 받아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여느 왕들과는 달리 루이는 정부도 두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초상화와 그의 가족들 1783년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비제 르 브룅작품

마리 앙투아네와 페르센의 염문은 당시 프랑스 궁정내에서도 소문이 확산되자 소문을 피해 프랑스군에 입대한 후 참전하는 등 베르사유에서 떠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 .#베르사유의장미 #마리앙투아네트

당시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했다. 결혼 8년만에 첫딸을 출산했다.마리 앙투아네트의 의 소문이 나쁜데다가 첫 임신 무렵에 페르젠 백작을 알게 됐기에 공주의 생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았지만 루이는 첫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듬뿍 주며 소문을 불식시켰다.

앙투아네트 아셀리노 (1811-1841년 이후)프티 느리아농 《왕비의 극장》내부 1780년 리샤크 미크 건축

프티 느리아농에 있는 《왕비의 극장》내부 또한 루이 15세는 아내를 위해 극장을 만들어 주었다. 1770년 루이 16세가 되는 왕세자와 오스트리아 로렌-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 대공녀의 결혼 피로연과 개관되었던 베르시이유 궁의 왕립 오페라의 형태와 장식을 본 따 만든 것이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드 로렌합스부르크 (1755-1793) 1774-1775년경,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도자기.

20세기에 들어 원래의 색상들로 재복원된 이 극장을 통해, 궁정 생활의 숨막히는 예의범저로붙어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자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바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에 있는 방앗간

앙시 극장 벽면은 회화 작품들 및 푸른색, 금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천장은 「아폴론과 뮤즈, 그리고 삼미신」의 모습이 표현된 장 자크 라그르네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1780년에 리샤르 미크가 건축한 공간으로, 왕실 일가나 그 주변 사람들이 직접 작은 연극과 같은 공연을주최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앙투아네트

쁘띠 트리아농의 정원에서 마리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와 7살에 요절한 프랑스의도팽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2남 2녀를 보았다. 단 장남과 차녀는 일찍 죽었다.차남 루이 17세는 혁명 시기

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다 요절했고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프랑스의도팽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1785년

많은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도 좋아했다. 루이 16세는 난산으로 고생한 아내에게 "자연 속에서 편히 쉬어라"라는 뜻으로 별장인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했다. 후 에 부부관계가 제대로 시작되고 아이들이 넷이나 태어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조용히 안방 내조만 하던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매우 활동적이었고 각종 연회, 무도회 등의 사교계 행사 전면에 나서길 좋아했다여기에다 루이 16세가 애첩도 가지지 않고 아내만 바라보고 사는 등 '왕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못난 남편을 등쳐먹는 기센 아내'로 폄하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16세 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교계 행사의 주최는 왕의 공식 첩인 총희(후궁)가 맡는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이 연회를 보고 백성들이 가지는 반감 또한 총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첩을 두지 않았으니 왕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행사 주최를 맡아야 했다.

앙투아네트

첫 딸을 출산할 때는 당시 관례에 따라 왕족들과 귀족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을 했다고 한다. 창문이 꽉 닫힌 방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왕비는 질식 위기까지 갔다. 이후 루이 16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출산하는 방에 들어가도록 제한했을 정도로 궁정에는 개인적인 공간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였다.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마리 앙네트 본인이 이런 행사를 맡는걸 즐기지 않았다고 해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상황인데 마리가 이 주최 자체를 매우 즐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반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중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반면 재정도 아끼고 반감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당시 궁정 사회에서 이런 행사는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비공식적인 회담을 나누는 중요한 정치 행사의 성격도 있어서 그만두는게 불가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6년(31세 때)의 모습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에 비해 이들 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루머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도 되었다.마리 앙투아네트의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마리앙투아네트

1786년

루이16세는 이미지처럼 정말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악한 폭군도 아니었고 한다.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시계나 가구를 만드는 시시한 취미가 과학에 대한 그의 조예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하지만,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예절교육을 시킨 아내와는 달리, 아이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고 아이들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인 룽16세를 더 따랐다

마리 앙투아네트(31세)와 마리테레즈, 루이샤를, 루이조셉 세아이들 1787년 루이비제르 브릥작품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은 그녀가 31세가 되던 해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였던 비제 르브룅에게 의뢰해 그린 작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우측의 공주가 마리테레즈, 루이샤를, 루이조셉 세아이들 이 아이들 외에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1787년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공주의 죽음과 1789년 루이 조제프 왕자가 죽은 때는 프랑스 혁명의 여건과 분위기가 무르익는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운명 측면에서는 비극을 향해 치닫는 시기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8년

프랑스 혁명은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16세는 순수했으나 소심했다.또한 루이 16세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데다가, 항상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이견을 말하더라도 결국다른 사람의 주장에 설득됐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8년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 싼 악의적인 소문이 날로 증폭되어갔다.

루이 16세( 루이 오귀스트 드 프랑스) 1788년

루이 16세가 개혁으로 임명한 재무장관 튀르고는 자신의 봉급을 절반으로 깎고 재정 파탄을 피하고 농민들의 증세 부담을 줄이고 그 대신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과 특권층에는 과세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왕비 앙투아네트부터 반대했고, 귀족과 소위 기득권층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다. 루이 16세는 성품이 선량하고 즉위(1774년) 초반 국정 개혁을 시도 했지만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할 만한 리더십과 능력은 애당초 없었던게 문제였다.

루이 16세 1786년

특권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 루이16세는 왜 몰랐을까? 불만과 억압이 극에 달해 폭발한 것이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다. 바스티유 성탑은 봉건제의 상징이자 불법 투옥의 악명으로 민중의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1791년의 헌법 성립과 동시에 입헌군주제의 원수의 지위가 보장되었으나, 결국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1792년 4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끝으로 달려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수백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절대 왕정을 무너뜨려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든 단순한 하나의 혁명 이상이었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절대 왕정을 무너뜨려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든 대사건이다. 어쩌면 귀족이 누렸던 수렵권, 토지 강제 사용권, 기타 독점적인 이권 등 특권을 폐지하고 농민의 과중한 부담을 덜게 해주는 개혁에 강행 했다면 루이 16세도 비극적인 최후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커다란 불행을 만든셈이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

“세금 내려는 사람은 없고 세금 쓰려는 사람만 많다” 루이 16세가 개혁에 성공했다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농민은 각종 세금 부담으로 등골이 빠지는데, 귀족은 사냥을 위해 영지에 비둘기와 토끼를 방사해 농작물에 막심한 손해를 끼쳐 불만이 쏟아졌다. 혁명이란 기득권층과 지배계급을 단시일 내에 급진적으로 때로는 잔인하게 몰락시키고 교체한다.

루이16세

혁명 전야엔 공통으로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빈곤, 재난, 그리고 개혁의 실패가 전조 증상으로 나타난다. 루이 16세는 국외 도피라는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프랑스에 머물고자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국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계획했다.마이 앙투아네트는 메르시 대사를 통해 비밀 편지로 본국과 연락을 취했고 망명이 성공하면 친가는 물론이고, 친족이 있는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1791년 6월 바렌에서 체포되는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

10월 6일 왕은 파리 시민에 의하여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져 완전히 민중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1791년 6월, 왕은 일족과 함께 파리를 탈출, 국외로 도망하려다 바렌에서 체포되었다

루이16세의 가족과의 이별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였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8월 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모두 유폐시킨다

루이16세의 가족과의 이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센 백작의 도움을 얻어 위조 여권을 에 넣었고 1791년 6월 20일 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형 마차를 준비시키고 식량과 술과 옷을 가득 싣고 남편과 아이들을 비롯하여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하여 몰래 파리를 빠져 나가려고 했던것이 왕실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냉동이 쳐진것이였도 더우기 혁명군의 마음을 자극시켰다.

1792년 6월 20일 튈르리 궁에 침입한 시민군과 마주하고 있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혁명 박물관 소장

이미 소문이 난데다 짐이많고 진행속도가 느렸던 탈출은 곧 군인들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국왕 가족은 6월 25일, 파리로 잡혀 끌려왔다.

1791년 6월 바렌에서 체포되는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 토머스 팔콘 마샬,작품(작품년도)1854년,

루이 16세 국왕가족의 탈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국왕 일가의 권위는바닥을 쳤고 친국왕파 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잃었다. 게다가 공화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루이 16세가 반(反)혁명 측에 있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탕플 탑의 루이

1792년 8월의 사건으로 왕권이 정지되고 왕실이 몰락하면서 혁명군들에게 붙잡힌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파리의 오래된 요새인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탕플 탑은 현재 프랑스 파리 3구에 있던 수도원이다.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큰 탑때문에 “탑”으로 표현된다

왕의 몰락으로 루이 17세에게 유언장 작성중인 루이 16세/ 베나제크 작품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예감한 그는 1792년 12월 258일 성탄절 날 루이 17세에게 유언 작성했다."아들아! 네가 불행히도 왕이 되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면,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말하는 그 어떤 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루이 16세 1793년, 찰스 베나제크작품 (1767-1794)

루이 16 세는 재판 전날 1792년 12월 11부터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 아이들인 마담 루아얄 및 왕세자 루이와 떨어져 있었다, 1793년 1월 21일 사형 집행전날 밤에 가족들에게 작별 할 시간을 허락 받게 되었다.

탕플 탑에서 왕의 시종을 들었던 클레리 회고록에서는 "왕이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 하는 순간 마담 루아얄은 정신을 잃고 왕의 발치에 쓰러졌다."고 적었다.루이 16세는 체념한 모습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던 탁자 가까이에서 고해 신부인 엣지워스 신부를 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하고 ,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의 뒤에서 팔을 벌려 왕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단두대로 향하는 루이 16세,1793년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9월 폭동을 일으켜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의회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평등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 '인권 선언'을 발표해 혁명의 뜻을 밝혔다. 루이 16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다 실패하여,1793년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1월 21일에 참수형에 처해진다.

처형을 앞두고 단두대에서의 루이 16세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외쳤다. "나는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모든 죄에 대해서 무죄이다.나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용서하노라. 그들이 뿌리는 피가 다시는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노라."

루이 16세의 처단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왕정을 정지(8월 10일)시켰고, 혁명정부의 제 1공화국이 출범했다(9월 21일). 루이 16세는 그 해 11월 오스트리아와 내통의 증거가 드러나면서시민회의의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루이 16세는 혁명직전인 1787년에"모든 권력은 오직 신에게만 책임진다"고 천명했다 .그날따라 파리의 날씨는 암울했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신성한 왕권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눈을 들지 못했다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

1793년 1월 21일 아침 10시, 2만 여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왕을 처형한 후, 선혈이 흐르는 루이 16세의 머리를 군중들에게 들어보이는 모습이다.

재판을 앞둔 마리 앙투아네트

그 해 7월에는 왕위계승자인 루이 샤를이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떼어 놓아졌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으나, 결과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2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초상」1792, 알렉산더 쿠랴르스키

감옥에서 시달리던 스트레스 받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 버렸다,이것을 두고 #마리앙투아네트증후군 (Marie Antoinette syndrome)이라는 병명이 생겨났고 그 증세는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는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의 이름은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불운한 바렌 사건 이후 체포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것을 관찰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목격자들은 세 차례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바뀌었다고 주장하였다 #마리앙투아네트증후군

탕플 탑에 유폐된 마리 앙투아네트 1793년알렉산더 쿠샤르스키 (1741-1819

1792년 8월의 사건과 왕정의 몰락 이후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그곳에서 왕실 일가의 구금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져 갔고, 특히 루이 16세의 재판이 시작된 뒤로 더욱 심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을 보낸 파리의 콩슈에즈리 감옥(현재 박물관)

루이 16세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마리 앙투아네트는 는 1793년 8월 2일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송될 때까지 탕플 탑에 머물렀으며, 1793년 10월 16일에 단두에서 처형되었다.

재판을 앞두고 병사들의 감시를 받는 마리 앙투아네트

검은색의 상복을 입고 수수하게 단장한 왕비는 당시 사람들의 증언대로 무척이나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은 한적이 없지만 민중의 혁명군들은 이 헛소문을 내며 정치적 선동을 했다. 이 소문들은 파리의 민중을 증오와 분노로 치닫게했고 결국 마리 앙트네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재판정에 들어서는 마리 앙투아네트, 폴 들라로슈, 1857년, 조각을 위한 밑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수수하게 단장한 왕비 #앙투아네트가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재판장 에르망은 명백하고 객관성이 충분하지 않은 수백 가지의 죄상은 전부 배제하고 간단한 형태로 정리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소한 것은 프랑스 국민이다.

그는 배심원에게 네 가지 질문을 했지만 재판장은 최후의 제안 중에서 재판이 내포하는 정치적 장식을 일체 배제하고 여러 가지 죄상을 실질적으로는 단 하나로 묶었다.배심원이 질문을 받은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연에 거역하는 탕녀, 근친상간 한 여자, 낭비적인 여자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였다.

형장으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단지 전 왕비가 외국과 손을 잡고 적군의 승리와 국내 봉기를 원하고 그것을 촉진시킨 죄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

탕플에 유폐되었다가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된후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3년인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기 위한 음란 팸플릿들이 혁명을 달군 중요한 불쏘시개들 중 하나였고 그녀는 절대 군주제 타도를 위한 혁명의 불길 속에 적의와 분노의 표적으로 설정된 하나의 희생양, 가공된 악(惡)이었였다 .

단두대로 끌려가는 마리앙뜨에투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때 참수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름통을 싣는 짐수례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마리앙투아네트단두대 처형

반혁명 혐의로 3일내내 심문을 받았으나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 혁명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글에서 불행 속에서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를 남겼다.

혁명의 처절함을 보여주던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들어섰다.

루이 17세는 8세의 나이에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진술에 동의를 했고 마리앙투아네트 생의의 가장 큰 상처였다 .하지만 마지막 까지 그런 오욕을 참고 품위있는 태도를 일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지 민족주의에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사치와 낭비벽으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여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또 다른 희생양이였던 것이다.

생 드니 성당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묘, 에드와르 골과 피에르 페티, 1830년, 대리석, 파리

루이 16세가 죽은 뒤 왕가의 법도에 따라 루이 17세가 된 왕자를 왕가로부터 격리시키고 앙투안 시몬이라는 열쇠공에게 맡긴다. 비록 같은 탑에 갖혀있었지만 그녀는 먼 발치에서 가끔 아들을 지켤볼 수 밖에 없었다.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생드니 성당에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루이14세 마리 레슈친카 프랑스 왕비 에서 부터 앙투아네까지 3명의 왕비가 사용한 침실

루이 16 세는 재판시작 전 1792년 12월 11부터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 아이들인 마담 루아얄왕세자 루이와 떨어져 투옥되었다. 1793년 1월 21일 사형 집행일 전날 밤에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허락 받게 되었다.

사형 집행전날밤 가족들과의 이별, 베나자크의 작품

엘리자베스 공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의 뒤에 서서 팔을 벌려 왕을 지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루이 16세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던 탁자 가까이에서 자신의 고해 신부인 엣지워스 신부를 바라보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단두대 처형

루이 16세형제들

(부친 도팽 루이 페르디낭 모친: 두번째 부인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 사이의 자녀들

#마리제피린(1750년~1755년 )5세 요절

마리 제피린(1750년~1755년 )5세 요절

#루이18세 (1755~1824년)68세 사망 자녀가 없음

루이 18세(1755~1824년)68세 자녀가 없음

#부르고뉴공작루이 (1751년~1761년, 9세요절

부르고뉴 공작 루이 (1751년~1761년,9세요절

#샤를10세 (1757년~1836년 79세 사망

샤를 10세(1757년~1836년 79세 사망

#엘리자베트필리핀마리엘렌 (1764년5월3일~1794년 5월10일 30세 사망)

통칭, 마담 엘리자베트, 프랑스의 왕족으로, 루이 페르디낭 왕세자와 왕세자비 마리 조제프 드 삭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채 사망하고, 오빠인 루이 16세가 즉위함에 따라 왕의 여동생 신분이 되었다.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1764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는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페르디낭 왕세자와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아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 막내이자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이다. 그녀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되었을 때 부모를 잃었다.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오빠인 루이 16세와 유독 사이가 좋아,커서도 당시 왕족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결혼 않고 루이 16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충성심이 깊고 온화한 성품으로, 오빠인 루이 16세와 올케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친밀한 사이였고 조카들도 잘 돌보는 좋은 고모였다.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루이 16세의 남동생들인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과 그 가족들을 외면하고 살 길을 찾아 국외로 망명했다. 그러나 여동생 마담 엘리자베트만은 끝까지 국왕 일가와 운명을 함께 했다. 1791년에 국왕 일가가 도주할 때에도 같이 갔으나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체포된 후 역시 국왕 일가와 함께 탕플 탑에 감금되었다.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1788년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되기 전날에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으나, 이 편지는 결국 전해지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를 통해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자신들(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을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을텐데도 끝까지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하면서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그리고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마담 엘리자베트와 아이들만은 살아남고 아이들이 나중에 고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가족들 중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 살아남았기에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후에도 마담 엘리자베트는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함께 탕플 탑에 계속 감금 중, 1794년 5월 10일 결국 마담 엘리자베트도 30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된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죽는 날까지 곁을 지키다가 그녀 역시도1794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의 자녀들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년 12월 19일~1851년 10월 71세사망)

루이 19세의 부인/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생존 자녀,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1778년 12월 19일에 베르사이유 궁에서 태어났다.마리앙투아네트의 동서인 아르투아 백작 부인은 이미 두 사내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마이앙투아네의 입지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담 루아얄 또는 쿠션에 안자 있는 아기 1778년

하지만16세 부부는 결혼 8년 만인 1778년에 첫 딸 마리 테레즈에게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어린 왕손들을 신화적인 우의와 결합시켜 표현하던 드동안의 전통을 버리고, 아이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생동감 넘치는 이 작품을 만들었다. 조각가 루이 시몽 부아조가 직접 만들어 제공한 원형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

문에, 기존과는 다른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감수성이 느껴진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장녀 마리-테레즈 샤를로트, 마담 루아얄 1784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7년 만에 장녀 마리-테레즈 샤를로트가 태어났을때 "가여운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지만 난 너를 사랑한다.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내 것이고 내가 보살필 꺼야. 너는 나와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게 될 꺼야" 루이16세가 딸에게 한말이다.

1789년 혁명당시 마리 테레즈는 11살로 탕플 탑에 갖혀 아버지 루이 16세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고모들이 차례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남동생 루이 17세 도 병으로 죽자 루이 16세의 직계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프랑스 혁명정부에서도 여자아이라 #살리카법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제대로 돌보지 않아하지만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온갖 학대와 고통속에서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간수들은 마리에게 누더기를 입히고 편의도구를 빼앗고 더러운 담요를 주어 덮게했고 시종, 시녀들의 출입을 금지해 직접 감방을 청소하고 정리하게 했다.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매일 감방을 수색해 그녀가 소지한 돈과 귀중품을 빼앗아 갔다. 마리 테레즈는 감옥 생활의 학대를 이렇게 몇년 간보낸다.

마리앙투아네와 도팽루이조제프와 즐거운 한때

또한 마리 테레즈는 고집이 강해 공화 혁명 정부의 심문에도 협조에 응하지 않자 열악한 대우를 계속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동생 루이 17세의 병을 걱정해 국민공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의 창문으로 가끔 루이 17세가 얻어맞으며 지른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감옥에서는 처형된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의 유품인 실을 주어 주로 뜨개질을 하고 가톨릭 영성 서적인 준주성범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책을 달라고 혁명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마리테레즈와 루이17세의 즐거운 한떄

1793년 5월 11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감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화 기록은 없다.옥중에서 마리 테레즈는 가족의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간수들도 가족들 얘기를 해주지 않아 가족들의 사망소식을 몰랐다. 다만, 아버지인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감방 벽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2년 이상을 지내면서, 마리 테레즈는 이후 평생동안 발성 이상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1795년 7월 쯤에 공포 정치가 해소되면서 대우가 비교적 좋아졌다. 알자스 출신의 30세 여성 르네 샹테렌느 부인이 신변을 돌봐주도록 고용되었고, 르네 샹테렌느는 마리 테레즈에게 의류, 필기 도구, 책 등을 제공했으며 정원을 산책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테레즈, 루이 17세

1795년 8월 말, 르네 샹테렌느는 가족 소식을 모르는 마리 테레즈에게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7세 등 다른 가족들의 최후를 알려주었다. 이때 진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비탄에 빠져 비명 지르고 미친 듯이 울었다.그후 리 테레즈는 르네 샹테렌느와 친해졌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나중에 르네가 아들을 낳자 르네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이름 '샤를로트'를 따서 '샤를'이라고 지어주었다. 왕정 복고 시기에는 샤를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마리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1795년,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포로 교환 협상을 하면서 몇 명의 포로를 돌려받고 대신 마리 테레즈를 석방해서 오스트리아로 보낸다. 마리 테레즈가 풀려난 것은 17세 생일의 전날인 1795년 12월 18일이었다. 외가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에서는 마리 앙투아네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상기 시키는 존재라 그녀를 반가워 하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마리 테레즈 1795년

후일 샤를 10세가 되는 숙부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 결혼하여 앙굴렘 공작 부인이 되었다. 남편인 루이 앙투안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협조하지 않았고, 극단적인 수준의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총리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 빈 체제에 호의적이었다.

흔히 마담 루아이얄로도 알려져 있으며 왕정 복고 이후 1824년 샤를 10세가 왕이 되면서 왕태자비가 되었지만 이후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 앙리 5세에게 강제로 왕위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잠시 왕비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생존 자식인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와 혼인하였다. 루이19세와 마리 테레즈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루이19세의부인 /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당시 보르도에 거주하고 있던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이 돌아온다는 소리에 용감하게 군대를 소집하고 그와 맞서려 했으나, 나폴레옹의 위용을 실제로 보고 들었던 군인들은 공포에 떨며 마리 테레즈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만을 약속했을 뿐 나폴레옹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겁에 질린 왕족들은 국왕 루이 18세를 시작으로 모두 황급히 도주하였다. 이때 왕족들의 도주에 제어를 걸고 단호히 맞선 유일한 인물은 오직 마리 테레즈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폴레옹은 "그녀는 그 가문의 유일한 남자"라며 정론보도를 해야할 언론조차도 처음에는 역도가 탈출했다고 보도하다가 나중에는 황제께서 입성했다고 아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을만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려고 한 여걸마리 테레즈의 용기에 감탄한 뒤 마리 테레즈가 도망칠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결국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달은 마리 테레즈는 국외로 도피하였다.

1778년 12월19일,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딸

1827년, 워털루 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다시 몰락,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면서 부르봉 왕실은 다시 프랑스에 복귀하였다. 1824년, 루이 18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하였고, 그의 장남 앙굴렘 공작이 왕태자가 되면서 마리 테레즈 또한 왕태자비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

많은 민중들은 불행했던 시절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직계 자손이라는 점이 전설이 된 마리 테레즈를 반겼지만 마리 테레즈는 자신에게 바로 그 불행을 안겨준 민중들을 진심으로 싫어했다. 우아하고 센스 넘치는 여인이었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거만하고 새된 목소리에 신경질적이었다고 한다.

한떄 평화로워보이는 황실 마리앙투아네와 마리 테레즈와 루이 17세

또한 샤를 10세와 더불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녀의 정치관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 네 아이를 낳았지만 이중 막내딸 소피 베아트리스는 1787년 유전성 척추결핵으로 사망하고 루이 조셉 그자비에도 1781~1789년 8살 되던 해에 죽다.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와 마리 무릎위의 루이 샤를(루이17세)..

혁명이후까지 살아남은 것은 둘째 루이 17세와 장녀 마리 테레즈 였지만 루이 17세 역시도 비극적 삶을 살아다 10세에 죽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우측의 아이가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 , 루이 조셉)

부르봉 왕가 유지를 위해 사촌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훗날 샤를 10세)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불임이라 아이를 낳지 못해서 마리 테레즈를 마지막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핏줄은 끊기고 말았다. 1801년 러시아에서 퇴거 명령을 받자 마리테레즈는 영국으로 망명했다.또한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왕녀이자 마지막 왕세자빈 그리고 20분 동안 프랑스 황후가 된 여인이다.어릴적 겪은 불행한 일들로 인해 공화정과 동생을 평생 증오하면서 살아면서 평생 웃지 않는 공주로 살다갔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도팽 루이 조제프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자 마리 테레즈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수백만 병력으로 파리를 향해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 18세를 포함한 전 부르봉 왕가가 외국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왕당파와 병사들을 끌어모아 나폴레옹에 맞서려했다. 나폴레옹이 축출된 뒤에 부르봉 왕가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남편과 함께 프랑스를 쫓겨나 이탈리아 영국등으로 떠돌다 병사한다.

그런데 음모론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가 감옥에 갖혀있는 동안 강간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해 시녀였던 에르네스틴과 마리테레즈의 신분을 바꿔 살았다고 한다. 진짜 마리 테레즈는 1807년 튀링겐 주에 정착해서 아이자우젠에서 살다가 1837년 11월 28일에 사망한 신원불명의 여성이였다고 한다. 늘 베이로 얼굴을 덮고 있어 검은 백작이라고 불렸다 한다

#도팽 루이 조제프 (루이16세 첫째 아들)

그러나 왕위는 사내 아이만이 계승할 수없어 걱정다다 1781년 10월에 루이 16세 부처의 첫 아들인 루이 조제프가 태어나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도팽의 탄생

새로태어난 도팽을 안고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1782년

루이16세 도팽의 탄생 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과 두번째 작품 속에서 왕실 일가는 어린 왕세자를 둘러싼 모습으로 왕세가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인 1782년대 초반의 모습이다. 아이들 앞쪽의 두 사람이 아르투아 백작부부이고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부부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다. 그앞의 어린 소녀는 마담 르와얄인 마리 테레즈이다.

왕비 뒷쪽으로 있는 사람은 루이 16세의 동생인 마담 엘리자베트이고 그 뒤에 두사람은 프로방스 백작 부부다. 뒷쪽으로 세아이는 아르투아 백작의 아이들이다. 왕실 일가의 단체 초상화는 흔하지 않는데 훗날 왕관을 물려 받게 될 아기를 둘러 싸고 모여 있는 왕실 일가의 모습은 권력의 영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안고 있는 아이가 도팽인 루이 조제프이며, 옆에는 딸인 마리 테레즈이고 남편인 루이 16세는 옆의 흉상으로 묘사되어있다.루이 조제프가 세살이었던 1784년 그는 매우 심한 열병을 앓았다. 간신히 병에서 회복했지만, 건강은 늘 좋지 않된다. 1786년 열병이 재발했지만, 루이 조제프를 돌봤던 이들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가끔 걷는것이 불안정할 정도였다고한다.

'마담 루아얄'로 불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와 그녀의 남동생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8년 열병으로 인한 열이 자주 났으며, 병은 빠르게 악화됩니다. 결국 어린 도팽은 1789년 7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때가 삼부회가 소집된 직후였다.

도팽 루이 조제프

루이 조제프가 3살이였을때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가 간신히 회복하지만 1786년 열병이 재발해서 1789년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때 삼부회가 소집된 직후라 어린 아들 도팽의 죽음조차 슬퍼할 겨를도 없이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후 왕비가 대의원들의 피로 이를 맹세시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루이 조제프의 흉상

어린 도팽은 생 드니 왕실 묘지에 안장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에 다른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훼손되었다.

#루이17세 루이 샤를

1785년 3월 27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노르망디 공작으로 책봉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인 1789년 6월 4일 4살 터울의 형인 왕세자 도팽 루이 조제프가 죽자, 왕세자인 도팽의 작위를 책봉받았다.

루이 샤를(루이17세) 황태자 즉위식때..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이 샤를은 부모와 같이 도피하다가, 파리의 민중에 의해 체포되어 튈르리 궁전에 갇혔다.

두 자녀가 요절했지만 그나마 행복할 때의 루이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루이17세)

루이 샤를(루이17세)

1792년 8월 10일 국민 공회에서, 왕정을 폐지하고 제1공화국이 선포되자, 루이 샤를은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들과 같이 파리의 탕플 감옥에 수감되었다.

쫓겨나는 16세 국왕가족 일가.. 마리앙투아네트 에게 매달리는 루이 샤를(루이17세)

1793년 1월 21일, 부왕 루이 16세가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사형 집행되자, 도팽 루이 샤를은 외국으로 도피한 프랑스의 귀족들에 의해 루이 17세로 명목상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숙부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가 사실상 섭정을 맡았다.

그 당시 루이 17세는 프랑스 정부와 외가인 오스트리아 사이의 협상에서 중요한 인질이 되었다.

루이 16세 사후 어머니와 헤어져 술 주정뱅이이며 난폭한 성격의 구두장이 시몽에게 맡겨진 루이 샤를(루이17세)

1793년 7월 3일에 루이 17세는 모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을 떠나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난폭한 구두수선공 앙투안 시몽에게 맡겨졌다.시몽은 루이 17세를 왕으로 받들기는커녕, 구타하고 강제로 중노동을 시키는 등 루이를 굉장히 구박하였다.

1793년 10월 16일, 당시 공안위원장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어머니 앙투아네트가 사형 집행되자, 다시 탕플 감옥에 수감되었다.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가 조제프 푸셰로부터 권좌에서 축출되어 단두대로 사형 집행되고 푸셰가 로베스피에르의 권좌를 탈취하였다.루이 17세는 힘든 감옥 생활과 부모의 죽음에 대한 충격, 시몽에 의한 심한 구박 등으로 건강이 나빠져 1795년 6월 8일, 결국 루이 17세는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마리 테레즈와 루이17세

루이 17세가 죽기 몇달 전에 기록은 없다, 루이 17세가 가까스로 탕플 감옥에서 탈출하거나 독살당했다느니, 죽은 소년은 루이 17세가 아니라 그와 닮은 대역이었다느니 등의 여러 소문들이 무성하였다 한다.

왕당파들의 주장은 어린 루이 샤를에게 술과 마약을 먹이고, 천한 말을 쓰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와 고모를 모함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아 서명을 한다, 바라스가 탕플을 방문한후 어린 왕자가 가혹한 환경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왕자의 처우를 개선해줬다. 하지만 엄격한 감시는 유지되었다. 왕자의 감시인은 자주 바꼈다

파리의 대의원들은 왕자의 이상행동이 희귀한 병때문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왕자를 돌보면서 감시하던 이는 왕자가 어머니와 고모를 모함하는 행위를 한 이후 저렇게 말없이 있는 날이 자주 있었다고 주장한다.

1795년 5월 루이 샤를은 갑자기 심하게 아팠으며, 어린 왕자를 이전에 진찰했던 의사가 오지만 의사는 6월 1일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그리고 루이 샤를 역시 6월 8일 사망합니다. 혁명정부는 루이 샤를이 결핵성경부림프선염으로 사망했다고 공표했다.. 루이 17세는 10살의 나이에 사망했으며 공동묘지에 비석하나 없이 묻혔다.

루이17세와 루이 17세의 심장 (우)

루이 17세 사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한 사람이 30명이 넘었지만 루이 17세를 사칭한 자들은 왕족의 명예를 욕심낸 자들이었고, 자신이 진짜 루이 17세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루이가 죽고 난 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가 루이 17세의 심장을 몰래 훔쳤는데, 프랑스 왕실이 전통적으로 묘지와 예배당으로 사용해온 생 드니 교회의 지하묘실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 심장이 두고두고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았으나, 루이 17세의 모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과 같이 DNA 검사결과 서로 일치하여, 진짜 루이 17세의 심장으로 밝혀졌다.

마담 소피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셋째 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막내 아이는 딸인 소피로 돌이 되기전 사망했다.소피라는 이름은 수피가 태어나기전 루이 16세의 고모 마담 소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였다.

마담 소피 (9 July 1786 – 19 June 1787)

아이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빨강 원피스 소녀가 마리 테레즈, 가운데 아기가 루이17세가 되는 루이 샤를이다. 서있는 남자 아이가 죽은 도팽 루이 조제프,

폴리냑 공작부인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1749년 9월 8일 ~ 1793년 12월 9일)

폴리냑 공작부인의 이름은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프랑스의 귀족·정치인이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기도했다.폴라스트롱의 후작 장 프랑수아 가브리엘과 잔 샤를로트 에로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1767년에 폴리냑 백작(후에 공작) 쥘과 결혼했으나, 시댁인 폴리냑 가문은 대대로 부르봉 왕가를 섬겼고, 특히 메르시에 추기경은 루이 14세 및 루이 15세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중용되었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후일 루이 14세의 총희인 몽테스판 후작 부인이 1678년 저지른 검은 미사 사건에 연루되었고, 또 메르시에 추기경

자신도 메인 공왕비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실각했기 때문에 가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궁정에서 영향력이 별로 없더 왕세손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해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가깝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았다. 그 뒤 루이 15세가 죽고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루이 15세의 총애를 배경으로 위세를 부리던 뒤바리 백작 부인이 축출되고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면서 궁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비제 그 브룅과 그의 딸, 잔 마리 루이즈

폴리냑 백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아부를 하면서 그녀의 마음에 든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프티 트리아농에 초대받는 몇 안되는 왕비의 총신 중 한 명이 되었다.

폴리냑 백작 부인은 남편 폴리냑 백작과 함께 국왕 부부의 친구로 권세를 휘둘렀고, 폴리냑 가문에는 연금 및 하사금으로 연간 50만 리블, 이후에 70만 리블이라는 큰 돈이 주어졌다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여성화가였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몹시 총애해 상당히 독보적인 위치였었다. 프랑스 혁명때도 해외로 도피하여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는 등 처세술도 뛰어난 편이었다. 자신의 용모에도 자신이 있어서 자화상도 제법 많이 그렸다.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폴리냑 백작 부인은 국왕 부부를 가장 먼저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마리 테레즈 루이즈 드 사부아 드 랑발 친왕비 1776

마리아 테레즈 루이즈는 1749년에 토리노에서 사부아 가문의 일족인 카리냐노 공 루이 빅토르(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증조부에 해당)와 헤센 라인펠트 로텐부르크의 크리스틴 사이에 넷째로 태어났다. 1767년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증손 랑발 공작 루이 알렉상드르와 결혼하여 랑발 공작 부인 마리 테레즈 루이즈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768년 남편과 사별했다. 177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시집 온 그 해에 랑발 공작 부인이 프랑스 궁정에서 모시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공작 부인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여, 그녀를 궁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1776년 무렵부터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가 넘어가면서, 랑발 공작 부인의 궁녀장 지위도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빼앗겨 버렸다.

기이하게도, 랑발 공작 부인은 폴리냑 백작 부인과 생일이 같았다. 얌전하고, 순수한 랑발 공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아부를 하지 않았지만, 폴리냑 백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음대로 금전을 갈취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다시 랑발 공작 부인을 총애하여 궁전을 물러나 있었던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폴리냑 백작 부인은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한편 랑발 공작 부인은 1791년에는 국왕 루이 16세 일가에 대한 원조를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귀국 후 튈르리 궁전에 참석해 자신의 방을 왕당파와 국왕 일가와 연락소로 제공 했다. 1792년 8월 10일 랑발 공작 부인은 왕당파와로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 8월 19일에는 라호루스 감옥으로 옮겨졌다. 9월 3일,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왕비의 친구이고 왕당파를 혐오하는 민중들에 의해 일어난 《9월 학살》 때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는 난도질당했다.

관련 게시물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