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버블경제 월급 - ilbon beobeulgyeongje wolgeub

일본 버블경제는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비정상적인 자산가치 상승 현상을 뜻합니다.

이러한 버블경제 붐에 의해 주식과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부풀어서 거품을 형성했고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20년이 확정됐으며 도호쿠 대지진, 고령화로 인해 잃어버린 30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30년을 잃어버렸는데도 세계 경제 규모 3~4위권이라는 사실. (내수경제가 탄탄한 덕분이겠죠)

미국 경제 추월은 시간문제고, 도쿄 땅을 사면 미국 본토를 살 수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던 시절.

실제로 이 당시 도쿄 황실 거주지(고쿄) 지가가 캘리포니아주 전체 지가와 맞먹었습니다.

일본이 1980년대에 이렇게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1960~1970년대 고속 성장을 계속하던 일본은 미국을 경제성장으로 거의 따라잡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전후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율을 기록했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은 무서운 속도였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과 동시에 물가가 동시에 오르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며

일본은 무역 흑자를 위해 엔을 저평가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당시 1달러가 250엔 수준으로 폭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수출품은 터무니없이 비싸졌고, 수출로 먹고 사는 미국 기업들은 큰 타격을 맞게 되죠.

그래서 미국은 일본 등의 동맹국에게 달러를 저평가 하겠다는 합의를 받아냈습니다. 이것이 '플라자 합의'입니다.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인들의 구매력이 급격히 좋아졌으며, 엔화 구매력이 높아지다보니

일본인들은 심심하면 해외여행을 가고 외국에 나가서 외국의 부동산을 싹쓸이하다시피 하게 됩니다.

세계 부동산 가격상승을 주도한 일본인들. 해외 부동산만 싹쓸이하면 모르겠는데,

자국 내에서도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부동산 거품이 시작된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 토지가격은 50배 정도가 뛰어 올랐습니다. 기준금리가 2.5%까지 떨어졌죠.

이렇게 땅투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은행의 무차별적인 대출이었습니다. 은행들은 서로 대출경쟁을 벌였죠.

실명확인이고 뭐고 그냥 돈 달라고 하면 무조건 빌려줬습니다. A은행이 5% 금리를 제시하면 옆 은행이 4%를 제시하는 식.

오죽하면 일본의 재정경제부에서 대출경쟁을 막으려고 했지만 은행에서는 배째라 식이었습니다.

금리를 인하하면 기업이 살아나고 가계가 침체되죠. 금리 인화로 대기업은 신이 나게 되는 겁니다. 

일본 기업들이 너도 나도 대박이 나자 경기가 활성화되며 너도 나도 땅투기를 하며 해외에서 사치(일명 돈지랄)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버블이 생겼으나 일본의 물가 자체는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돈이 많이 풀렸으면 물가가 올라가면서 

인플레이션이 통화량을 따라가야 하죠. 그러나 부동산과 주식은 가격이 정해져있지 않은 자산이라 물가가 상승하지 않았습니다.

금리인하로 인해 대출이 많아지자 일본 정부는 땅값을 바로 잡기 위해 금리를 상승시킵니다.

일본 정부가 금리를 올리며 대장성(재정경제부)에서 부동산에 대한 대출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미친듯이 대출경쟁을 벌이던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지 않기 시작합니다. 이자율을 높이면 기업이 대출을 하려 하지 않죠.

거품이 꺼지고나서 부동산 대출 채권이 악성 채권이 되고, 돈을 빌려주었던 은행들은 자신들이 파산할 상황에 이르자 

기업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려 하고, 대출한 사람들을 독촉합니다. 여기서 땅투기하던 사람들은 당황을 하죠.

근데 현금은 없고 갚으려면 땅을 팔아야 하는데, 문제는 너도나도 다 땅을 팔려고만 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토지불패가 깨지고 땅값과 주가 지수가 하락하면서 거품이 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순환이 이어지면서 결국 사회적으로 돈줄이 마르게 되어 끊이지 않는 불황에 빠지게 되죠.

사실 땅 값 뿐만아니라 주가도 그렇고 기업들도 그렇고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봐도 비정상적으로요.

일본 도쿄 땅을 다 합치면 2경이라는 액수가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는 상상도 못할 정도죠.

여튼, 버블 경제 당시 얼마나 일본인들이 호화롭게 살았는지 간략하게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업에 면접을 보러갈 때 차비를 주는데 1인당 2~4만엔씩 쥐어줬다고 합니다. (우리나란 많아도 몇만원이죠)

실제로 이런 식으로 취직은 안하고 면접만 백군데 정도 봐서 차를 한대 뽑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20대 연봉은 천만엔(원이 아니라 엔입니다), 정기예금은 금리가 무려 8%에 달했다고.

신형 벤츠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했으며, 벤츠의 주력 모델 조차 너무 많이 보급되어 고물취급 받던 상황.

룸싸롱 같은 주점에 가는 남자들은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해가는 등, 피카소나 르누아르를 비롯하여 모든 해외 미술품들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했죠.

일본의 한 커뮤니티에서 버블경제 시기를 겪었던 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 스레드의 댓글들입니다.

1.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 세배돈이 30만엔을 넘겼었다.

2. 부잣집도 아니었던 대학생이 뉴욕에서 헬기를 타고 샴페인을 한 손에 들고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3. 기업에게 접대까지 받아가며 어쩔 수 없이 취직해 주었다. 심지어 면접 중에 졸아도 취업이 되었다.

4. 일손이 부족해서 도산하는 회사가 실존했던 것 같다. 입사 시험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합격했다.

5. 89년 당시의 잡지를 갖고 있어 훑어봤더니 여자들이 「남친의 연봉은 2천만엔 정도면 충분해요」라고 하더라.

6. 1만엔 지폐를 하루에 몇장 쓰는지도 모를 정도로 생활했지만 맨날 똑같은 차를 타고 다닌다며 가난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버블의 영향은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 청년들의 삶을 퍽퍽하게 만들고 맙니다.

사실상 20년 전의 버블이 현재 일본정치와 일본인의 삶을 개판으로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네요.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일본인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합니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안그래도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를 필요로 했는데 일자리가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 되었죠.

현재 일본의 상황은 한 직장에 꾸준히 일하지않고 알바로 몇 달 돌려가며 먹고 사는 프리터족이 많고

1인 독거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일본에서 연애도 결혼도 관심없는 '초식남' 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었죠.

일본 청년의 특성이라고 대표되는 무기력함이나 소심함, 은둔형 외톨이 기질은 저 시기 겪은 버블의 영향도 큰 것 같아요.

물론 프리터족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건 일본 기업들도 한 몫 합니다. 알바만 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시급은 괜찮은 편인데 월급이 우리나라 마냥 일본도 큰 변화가 없어요. 편하고 쉬운 걸 찾다보니 직장을 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 

편하게 할 거 다 하면서 알바만 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죠. 일본 아르바이트는 좀 시간 조정이 자유로운 편이니까요.

이건 젊은층들의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가치관을 형성하는 건 결국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당시 청춘을 보냈던 세대들이 아직도 과거 회상에 젖어 사는 것도 그렇고,

너도 나도 영화도 씨에프마저도 행복만 넘쳤던 세상이 저렇게 증발해버렸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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