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난고 성덕임 - ijae nango seongdeog-im


출처-나

나무위키 '의빈성씨'

장옥정, 사랑에 살다 OST-그리움의 향기

덕임과 절친한 사이인 의녀가

끌려가는 걸 보게된 나인

빈(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의빈 성씨)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합궁) 했다

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和嬪尹氏 僭妬於中宮 喑詛於成嬪

因此得罪 自內嚴囚 方有降宮爲房之議
화빈 윤씨는 중궁(효의왕후)을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성빈(의빈 성씨)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다

이로 인하여 죄를 얻었고 대궐 안에 엄히 가뒀다

의논하여 대궐에 방을 내렸다

-황윤석 이재난고-

1782년 윤 9월 7일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 9월 7일 신축 1번째기사 -

이후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원자(문효세자)가 태어났다.

이에 소용이 되었고, 아들의 귀함에 의빈이 되었다

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

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년 뒤 1784년, 의빈 성씨는 옹주를 낳았으나

생후 두 달만에 요절했음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정조 실록 17권, 정조 8년 윤3월 20일 을해 1번째기사-

五月成昭容所生女 以避寓出處闕外卽夭

命武寵臣任嵂主治喪葬
5월에 의빈 성씨가 낳은 딸이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

(임금은) 총애하는 무관 임율에게 명을 내려

옹주의 상장례를 주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 황윤석, 이재난고-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從今國事尤靡托矣

이제부터 국사(=임금 자신)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정조실록, 의빈 성씨의 졸기 (1786년 9월 14일)-

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

빈이 임신하여 해산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아래는 의빈 성씨(성덕임)에 대한 기록들 중 일부분>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 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 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 曰德任腹漸高大矣

上則微哂而已 尹嬪 過三十餘 朔 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

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 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

上意亦然 亟從之 徐則竟八度呈辭而遞 蓋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그녀가 복스러운 관상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공간)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윤빈(화빈 윤씨)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원자가 태어났는데, 산실청도제조 서명선 등은

오히려 윤씨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자고 청하면서

원자로 정하는 것을 청하지 않았다.

봉조하 김상철은 극력 상소하여 <춘추>에서

서자로 장자를 세우는 의리를 인용하며 원자 정호를 청하였다.

임금의 뜻 역시 그러했다.

서명선은 끝까지 8차례나 반대의 뜻을 아뢰다가 체직당했는데

(그가 반대한 까닭은) 대체로 소용이 본래 홍봉한 가문의

청지기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宜嬪成氏 在本第方待十月産期

而經産男子子孔而母亦逝 自上哀慟 朝廷致慰
의빈 성씨의 10월 산기를 대비해 약으로 살폈다

아들을 낳은 경험이 있는데 어머니(의빈 성씨)와

태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슬피 울부짖었고

조정에서는 임금을 위로했다.
- 황윤석, 이재난고

정조께서 후사가 늦어 나라의 근심이 크다가

1782년 문효를 얻어 처음으로 경사로워하니라.

그런데 1786년 5월에는 문효가

그해 9월에는 문효의 생모 의빈이 죽는 변을 당하니

슬픔과 걱정으로 귀한 몸을 손상하시어

내 임금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애를 태우니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음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그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생신다례. 건륭 모년 세차 모갑

7월 삭모갑 삭초 8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아이들의 어머니인 너의 세월은

이 하지에 이르렀으나 틀림없이 죽었으니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이 없구나.

어찌하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는 네가 문효세자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일 뿐만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마음속 깊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가?

기일. 건륭 모년 세차 모갑 9월 모갑삭 14일,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바뀌어서 다시 기신일이 되었구나

하늘의 뜻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해처럼 빛나는 대의는 기록이 있으나

훌륭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는다

나의 사사로운 말은 종사에 영원토록 힘입었던 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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