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서울대 교수 - gim-yeongmin seouldae gyosu

나는 산책 중독자다. 나는 많이, 아주 많이 걷는다. 나에게 산책은 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이족 보행을 일정 시간 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나에게 산책은 예식이다. 산책에 걸맞은 옷을 입고, 신중하게 그날 날씨를 살피고, 가장 쾌적한 산책로를 선택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꽃그늘과 이웃집 개와 과묵한 이웃과 버려진 마네킹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돌아온다.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존재’의 휴가인 산책은 심신 구원
목적에 희생되지 않는 삶을 위해
최선 다해야 목적없이 살 수 있어
허무 다스리며 산책하는 삶 살고파

일러스트=최종윤

나에게 산책은 생업이다. 얼핏 보면, 빈 시간을 죽이려고 산책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산책을 통해 일상의 필연적 피로를 씻는다. 그뿐이랴. 산책 중에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메모는 글이 되고, 글은 책이 된다. 그렇다고 글감을 얻기 위해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글감은 산책 중에 그저 발생한다. 산책하면 단지 기분이 좋다.

나에게 산책은 네트워킹이다. 술자리와 골프와 동창회와 조기축구회를 즐기지 않는 중년에게 산책은 거의 유일한 정기 네트워킹이다. 걸으면서 나보다 앞선 산책자들과 뒤에 올 산책자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네트워크를 맺는다. 나는 특히 산책을 즐기다가 죽은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를 생각한다. 1956년 12월 25일, 발저는 홀로 산책하다가 눈 위에 쓰러져 죽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산책을 이렇게 찬양한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가 없다. 신발은 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신고, 평지를 산책한다. 오르막길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므로 되도록 피한다. 모든 것에 눈이 내려앉은 날 산책은 얼마나 황홀하던가. 발저는 그러한 황홀함 속에서 죽었다.

산책할 시간에 차라리 회식을 하고, 골프를 치고, 출마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홀로 산책하면 외롭지 않냐고? 산책은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산책은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한 거의 모든 것이다. 발저는 말한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 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 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 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것을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출장이다. 나는 업무 수행을 위한 출장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난 아닌데? 나는 그냥 태어났다. 여건이 되면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수도 있겠지만, 민족중흥에 방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난 산책하러 태어났다. 산책을 마치면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도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산책하러 나갈 때 누가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나는 이런 요구가 싫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애써 내 산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 거다. 신성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걷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상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발길을 옮기다가 관심이 생겨서 하는 일일 뿐이다.

인생에 정해진 목적은 없어도 단기적 목표는 있다. 산책에도 목적은 없어도 동선과 좌표는 있다. 내가 가장 즐겨 가는 곳 중 하나는 인근의 독립서점이다. 자, 나온 김에 오늘도 독립서점 쪽으로 걸어가 볼까. 그렇다고 해서 특정 책을 구입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는, 그냥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한다. 독립서점에는 그냥 간다. 그냥 가서 과묵하고 유식한 점장이 큐레이팅한 서가를 돌아보다 보면 종종 책을 사게 된다. 그곳에는 재밌는 책이 많으니까.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행복하고 싶어! 많이들 이렇게 노래하지만, 나는 행복조차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추구해서 간신히 행복을 얻으면, 어쩐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 가려고 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억지로 잠들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나지 않던가. 행복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자네에게 가지 않을 테니, 자네가 오도록 하게. 행복이여, 자네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 셔터가 무심코 눌려 찍힌 멋진 사진처럼.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궁핍에 내몰린다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너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다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시험에 9수를 한다면, 시험 합격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재산은 필요하지만, 재산축적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공부란 무엇인가

'칼럼계 아이돌' 김영민 교수, 이번엔 '중국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17 16:12

업데이트 2021.02.1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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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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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사상사』를 쓴 김영민 서울대 교수. 14일 오후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지난해 에세이집 『공부란 무엇인가』를 통해 '공부란 무엇인가?'를 물었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이번엔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새 질문을 들고 돌아왔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중국의 정치사상의 방대한 역사를 다룬 학술서 『중국정치사상사』(사회평론아카데미)를 펴냈다. 중국 사료뿐 아니라 한국, 일본, 서양 학계의 다양한 문헌을 넘나들며 중국 정치사상의 긴 흐름을 포착한 학술서다. 책은 총 900여쪽, 이 중 말미에 첨부한 주석만 160여 쪽에 달한다. 저자는 연대기적 서술과 함께 '국가' '귀족사회' '형이상학 공화국' '혼일천하' '제국' 등 주제별 키워드를 뽑아내며 그동안 두루뭉술했던 우리의 역사의식에 제동을 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써왔던 '중국' '중화(中華)' '유교(儒敎)'라는 단어를 허루투 쓰지 못하게 될 듯하다.

이번 책은 김 교수가 국내에서 출간한 첫 학술서인 동시에 국내 저자가 쓴 최초의 『중국정치사상사』다. 그동안 국내엔 샤오궁취안의 『중국정치사상사』, 류쩌화의 『중국정치사상사』 등 번역본만 있었다.

공부란 이런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중국정치사상사. [사진 사회평론아카데미]

그간 산문집을 통해 드러났던 그의 스토리텔링 솜씨와 한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은 자신의 전공분야(동아시아 사상사)를 다룬 이 책에서 더욱 번뜩인다. 연대기적 서술과 주제별 키워드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나간 방식도 독특하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4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2017년 영국 폴리티(Polity) 출판사에서 영어본(원제『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을 먼저 출간하고 이번 한글본을 냈다.

"영국 출판사가 제안을 먼저 해 순서가 그렇게 됐다. 영어로 책을 낸 뒤 이 내용을 한국어로도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번역하려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독자가 달라졌고, 더 보태고 싶은 내용도 생겼다. 중국어·영어·일어 사료를 인용한 것이라 남에게 번역을 맡기기도 쉽지 않았다. 직접 고치며 쓰다 보니 두 배 이상 두꺼운 책이 됐다."

한국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 중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국만 파고든다고 한국을 더 잘 알게 되진 않는다. 한국을 알기 위해선 한국이 놓인 맥락을 넓게 파악해야 하지 않나. 한국정치사상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이 연구를 정리하고 싶었다." 

중국은 하나의 고정된 덩어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중국정치사상사의 '고전'이라 불리는 샤오궁취안의 『중국정치사상사』만 봐도 '중국의 역사는 아득히 먼 과거부터 세기를 걸쳐 내려온 연속체'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중국이 오래전 특정한 민족에 의해 본질적인 문화가 생겼고, 그게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것이라고 여긴다. 그건 중국 민족주의적인 입장일 뿐이다. 중국은 수 천년동안 다양한 정치적 행위자들에 의해 발명되고 변화해온 일종의 구성물이라고 본다." 

관습적인 해석에 이의제기  

기존 중국정치사상 통사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한 것인가. 

"맞다. 과도한 민족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았다. 시대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국을 새로 발명해야 했고, 그 발명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발해를 한국사로 받아들이지만, 과거 어느 특정 시기에는 발해를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다. 즉 시대별로 '한국'이라는 것이 달라져 온 셈이다. 매번 한국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시대별로 새롭게 정의해온 역사가 있었다." 

책에서 그는 "유교 역시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간주해야 한다"며 유교를 획일적인 전통으로 간주하는 경향에 대해 경고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책에 수차례 등장하는 사례가 공자의 '우물에 빠진 사람' 이야기다. 제자가 공자에게 “우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진 사람이 알았을 때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던 이 이야기는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남에 대해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데 이를 또 시대별로 학자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석했는지를 짚었다.

'유교들'이라는 표현이 생경했다.  

"중국이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변해왔듯이 유교도 수천년에 걸쳐 변화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어떤 학자가 섬세한 역사 감수성을 가졌는지 알고 싶으면 그가 유교에 대해 어떻게 다루는지를 눈여겨 보라고 권하곤 한다. 좀 더 정교한 이해를 원한다면 유교를 단순히 몇 마디로 정의하려 하기보다는 어떤 시기에 누가 왜 유교라는 정체성 표지를 원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유교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는지 따지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책 전반에 걸쳐 동질적으로 통일된, 단일한, 전제주의적 중국이라는 관념을 부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를 볼 때 비로소 정치체로서의 중국과 변화하는 정체성으로서의 중국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강조해온 통일성이란 아슬아슬한 균형상태에 불과하다. 중화라는 관념도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명쾌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상징이었다. 청나라, 대한제국과 일본, 베트남이 각각 다른 중화를 주장했다. 중화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중국 민족사라는 틀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정치사상을 다루면서 당나라 한유의『앵앵전』(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서생과 위신 높은 집안의 딸 사이의 실패 연애사를 다룬 이야기)을 비롯해 송나라 소식이 쓴『적벽부』와 『왕소군전』,두보의 시 등을 문화예술 텍스트를 다뤘다. 또 각 주제어로 접근한 방법도 특이하고. 

"영어본 독자들이 그 점을 좋아했다. 내용을 주제별로 응집시켜 구성하지 않으면 자칫 사실 나열에 그칠 수 있다. 자료와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책을 내고 싶진 않았다. 역서 서술과 사상사의 중요한 주제를 연결하고 싶었다. 역사는 내러티브이기 때문에 단순 나열로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의 단순 나열은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 이전 공정에 불과하다."  

2019년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냈는데 장기적인 '논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첫 책이라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앞으로 최소 1년에 한 권씩 한 10권 정도의 논어 해설책을 낼 예정이다. 먼저 출간한 에세이가 논어 프로젝트를 안내하는 것이었다면, 논어 해설서에서는 기존 『논어』의 번역과 해석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보다 풍부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론 한국정치사상사를 쓰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김영민'이라는 정체성도 복수인가. 

"사람이 정체성 하나만 있지 않다.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고 직업도 있고 복수 정체성을 갖고 산다. 이 중에서도 공적인 성격을 가진 정체성이 직업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이다. 진리를 발견했다고 설파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사람. 이 책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하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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