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는 지금 어디 - byeoglandoneun jigeum eodi

고려 무역의 메카 ‘벽란도’ 에서 볼 수 있는 고려의 국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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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국제성을 고려시대 무역의 메카로 불렸던 벽란도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ⅰ. 벽란도의 위치
ⅱ. 벽란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국제무역

Ⅲ.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선조들은 송악지방 신흥귀족의 후예로서 당나라와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였고, 그것을 통해 영향력 있는 해상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 해상세력은 고려의 송악 뿐 아니라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한강하류 일대에도 영향을 주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었다. 태조 왕건은 이러한 세력을 통해 고려를 건국하는데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는데 성공을 하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경)으로 옮기며 시전건설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이렇게 시전건설에 관심을 두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해상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려의 해상무역은 중국의 송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뿐 만아니라 아라비아에까지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며 활기를 띄게 되었다.

당시 개경의 시전은 고려에서 국내 상업의 중심지였고, 또한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개경은 고려의 수도로서 역할 뿐 만아니라 중국 상인부터 일본,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해상무역의 메카로 고려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개경이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송나라의 사신이나 상인, 중국 뿐 아니라 일본이나 멀리는 동남아부터 아라비아의 상인들도 내왕하였던 항구인 벽란도가 있다. 벽란도는 개경근처에 위치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해있던 곳으로 개경의 해상관문이자 국제무역항이다.
이렇게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기능하면서 고려 해상무역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시 고려 해상무역의 국제성을 잘 보여주는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번 과제에서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고려 해상무역의 국제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ⅰ 벽란도의 위치
벽란도는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의 해상 요충지로서,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곳이다. 벽란도 위치는 현재 정확히 어디인지는 설명되고 있지 않아 그 위치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위치는 선의문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있는 예성강 하구이다.

참고 자료

이병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고려)』, 솔출판사 , 2002.
이진한,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 경인문화사 , 2012.
김영제, 『고려상인과 동아시아 무역사』, 푸른역사 , 2019.
윤명철,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사계절 , 2000.

태그

동양(东洋), 서양(西洋), 남양(南洋), 북양(北洋) //blog.daum.net/han0114/17049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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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碧瀾渡)라고 하는 예성항(禮成港)이 어딜까?

고려가 언어학적으로 돌궐(突厥)이라 하는 투르계(Truk)인가?

고려의 정확한 위치만 알면 국제무역항이라 하였으니 어느정도 가름 해 볼 수 있다.

고려가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포괄적으로 위치한 것을 전제로 로마(서역상인)를 깃점으로 하여 해양을 동쪽으로 이동시켜보면 벽란도라고 하는 예성항의 위치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한반도는 아니라고 감히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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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가 아닌 corea or korai 고려는 어디에 존재 해야 하는가?

고려연합체(corea or korai)는 유라시아, 중앙아시아에 근거한다.

core 와 korai 는 지금 발칸반도 그리스에 남녀 조상(彫像, 조각상)으로 변해있다.

corea or korai(다민족 다문화국가연합체)의 고려인이 근세들어 어떻게 반도 조선인, 한국인 korea으로 둔갑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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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우리의 역사로 보았을 때 이긴 자는 누구인가?

바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서세이고 그 서세에 비일 붙어 미개하던 자신을 문화국으로 탈바꿈시키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리를 흐트러놓은 왜구 전신인 스스로 일본이라고 칭하길 바란던 역천집단인 일제가 있다.

이긴 자가 역사를 지배하였으니 이긴자에게 폐하고 망한 우리의 역사는 보잘 것 없이 변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긴 자들은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요리했을까?

있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만들고 사실을 통째로 들어내기하면서 재편 판짜기를 과감하게 단행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무엇을 만들고 들어내어 판짜기를 했을까?

첫째 세계사에서 고려를 들어내고 정상적인 역사를 10분지 1로 축소하였다는 사실이다.

진본이 없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현존하는 모든 역사서와 그 사서에 나오는 숫자와 자료들은 10분지 1로 축소되면서 근세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해야 한다.

만리(萬里)를 천리(千里)로 백만(百萬)명을 십만(十萬)명으로 오그뜨리고 보면 역사가 지금처럼 형편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오리엔트는 다 아다시피 소아시아 터키 이동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오리엔트는 라틴어로 오리엔스(Oriens)로서 즉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 ‘동방(東方)’동쪽 방향이라는 뜻인데 지구 동단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가 따른다.

로마의 근거지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동쪽을 가리켜서 오리엔트라고 불렀다.

더 정확하게 풀이하자면 네이버사전에 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및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방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오리엔트는 동쪽으로 밀려 korea 로 변한 고려와 같이 붙여 한반도를 지정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고려는 오리엔트의 상징성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지금의 터어키반도는 소아시아라고도 하지만 아나톨리아(Anatolía)라고 한다.

이 아나톨리아 뜻은 희랍어로 Aνατολή (Αnatolí) 일어나다, 또는 Ανατολία (Anatolía) 해돋이의 땅, 또는 동쪽(Eastern)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터어키 중심으로 이동쪽을 오리엔트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판짜기 이후 서양에서 지정한 오리엔트는 동쪽으로 현저하게 이동시켜버린 한반도 korea(고려)라 하고 있다.

실제 오리엔트 상징인 고려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근세기 역사 재편 판짜기 작업에서 근본 역사를 밀어내고 들어내기 한 결과이다.

터키인들이 고려인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한사코 형제라고 하면서 친근감을 보이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터키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공감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생뚱맞은 소리로 들리며 어색함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터키인들이 그런 말을 했을까?

역사를 이치적으로 풀어보자면 터키인들이 고려인들을 형제라고 하는 것은 그들 가까이에서 늘 공생공존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바로 근본역사를 들어내기하며 재편 판짜기로 만들어진 동양을 배제한 그들만의 역사, 이긴 자의 역사, 덧붙여 서세에 기생한 일제식민지사인 반도사가 우리를 역사의 별종으로 만들면서 터키인들이 친밀감을 가지는 면을 우리가 알 수 없도록 덮어 감추고 없애버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고려가 투르크계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유라시아에 있지 않고 아시아 동단(東端) 한반도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진짜 역사를 아는 터키인들이 이상하다 여길 것인데 터키인들은 대체적으로 고려의 역사를 바르게 알고 교육을 받은 것 같다.

때문에 과거 바로 곁에 공생공존한 투르크계의 고려인들을 생각하며 형제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식민지사인 반도사(半島史)에 길들여져 왜소하게 변한 역사만을 우리의 역사로 보기 때문에 터키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한국동란때 유엔군으로서 참전한 우방정도로 받아들일 뿐이다.

러시아의 지시를 받고 침략한 북한은 같은 고려인이라고 하지만 이질적으로 본다는 사실이 또 있다.

그 만큼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쓰면서 삼한영역 유라시아지역과 중앙아시아를 삼킴으로서 근원적으로 투르크계의 지류인 터키와는 역사적으로 앙숙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터키역사에는 유라시아, 중앙아시아를 묶는 삼한의 영역은 전통적으로 고구려, 신라, 고려가 이어간 다민족연합체 성격의 영역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터키를 가깝게 볼 수 없는 면에서 보면 각각 동서극단에 존재하는 위치문제가 있고 거리상으로도 직선거리 7000㎞(20,000里)나 떨어져 관계설정하기가 곤란한 면이 있으며 인종적인 면에서도 우리의 모습과 현격하게 다른 모습이어서 쉽사리 머리로 융합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역사엔 분명 고려만리국, 조선만리국이 있다.

우리는 터키와 한반도란 지형적인 거리에서 유라시아 소아시아 동편에 존재한 삼한의 고려연합체가 사실이라면 근세기에 어떤 이유로 어떤 경로로 한반도로 이동 했을까 하는 의문과  어떻게 서세와 러시아에 쫓겨 났을까? 라는 근원적인 의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1937년 연해주의 한인(고려인을 포함한다)동포가 소련 구 정치세력에 의해서 강제이송 완료 후 소련 비빌경찰국 보고서엔 송환(送還)완료라는 표현으로 보고 처리되어있다.

왜 이송(移送)이라 하지 않고 본래 있었던 곳으로 보낸다는 송환(送還)이라 했을까?

강제이송된 한인(고려인)들이 과거 그곳에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송환(送還)이란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이송된 고려인들은 본래 그곳이 본 근원지이고 터전이라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터키인들을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한반도를 한계로 한 반도사교육 때문이며 철저한 주입식 교육과 비판없이 받아들인 암기식 교육이 낳은 병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한반도와 신만주(동북삼성)를 한계로 우리민족 역사의 근원적인 지역적 근거로 한정하였으며 그 이상 나갈 수 없는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 밖에 나머지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남의 역사라고 알도록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근세기 이후 일제가 낳은 사생아 사학자들, 근원이 불분명한 꼭두각시같 은 식민지 반도사학자들이 한국 사학계를 지배하고 기득권으로 목메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방오리엔트에 고려연합체(corea or korai)가 존재했다는 것은 고려가 한반도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소아시아(아나톨리아)등 동양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곳에 근원한 것이라고 판단되며 실제로 고려(corea or korai)는 다민족연합체 성격의 제국으로서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존재했었다고 믿어지는 바가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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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려사에 나오는 벽란도와 예성강은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존재했다고 추증할 수 있다.

물론 고려 이후 이 벽란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지역이 동으로 이동되면서 시대마다 달리 불려 졌을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벽란도와 예성강은 한반도에 국한한다.

그러면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는 벽란도와 예성강이 고려 기록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보자.

기록에서 벽란도라고 하는 벽란정은 걸어서 개성부로 들어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것 같다.

또한 예성강 역시 지금은 두루 뭉실 뭉뚱그려 예성강이라고 칭하지만 예성항(港)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성항은 예성강 어디쯤 위치하고 개성 또한 어디에 위치하며 예성강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류의 해상 요충지로서, 개경에서 30리(里) 혹은 40리(里)떨어진 황해(黃海)안에 위치하고 물살이 빨라 위험하지만 수심이 깊어 선박운행이 자유로워 국제항으로 성장한 항구가 바로 예성항(禮成港)이라고 했으며 그 곳에 벽란정(碧瀾亭)이란 정자가 있어 벽란도(碧瀾渡)라고 이름 하였는데 그곳으로 송(고려皇京)나라와 일본상인들이 들락거렸고 남양(南洋)뿐만 아니라 서역상인들과 교역하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다고 하였다.

남양은 남지나해 전역을 통칭 하는 것이지만 인도양도 포함한다고 했다.

남양과 서양에서 접근 할 수 있는 전략화된 국제항구가 동남아시아 해안에 한반도 예성강이 아니라도 많다. 문제는 고려시대 즉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남양항로가 보르네오 섬 이동까지 개척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15세기들어 서양선박들이 말라카해엽을 통과해 필린핀을 지나 대만을 거쳐 한반도로 빈번하게 들어 갔다는 사실자체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서역상인에서 서역은 동양을 반대로 이해하면 정확하다.

즉 서양상인은 서역상인이고 로마인들이 들락거렸다는 말이다.

로마인들이 들락거렸다는 것은 적어도 서양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지금 예성강이라고 하는 한반도 강화도 위 강 입구 상황을 한번보자.

국제무역항이 되려면 수심도 깊어야 하지만 통로가 원활하고 항로에 방해요소가 없어야 한다.

도대체 입구가 어딘지도 모를 한반도 예성강!

현재가 이러니 당시라면 더욱 그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에 나오는 국제무역항이 존재한 고려의 예성강이라고 하기엔 그저 난감 할 뿐이다.

과연 그런 지형에 있는 항구 즉 예성강 가까이에 국제도시 개성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믿기 어렵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역사재편 짜기가 얼마나 황당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강역의 전체도형은 지금 한반도처럼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게 길쭉하게 뻗어 있는 긴 사각형이 아닌 정은 못되어도 대체적으로 정 사각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2권  
지리고(地理考) 12
조선(朝鮮)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여직(女直)과 이웃하였으며,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다. 동서 간의 거리는 2,000里(816㎞)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4,000(1,632㎞)里이다”라고 하였다.

서북쪽은 압록강이라고 하였는데 한반도에서 서북쪽이 아니라 아예 북쪽이라고 해야 맞다.

한반도는 남북 길이는 길지만 동서길이가 짧아 역사상 중요한 지명을 다 집어넣기도 부족한 영역이다.

지금 한반도 동서길이는 구글 위성에서 보면 321㎞(786里)밖에 되질 않는다.

서쪽이라고 해봐야 넓지 않아 웅진반도가 전부이다.

일제가 황해도(西海道)를 설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녹녹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이는 점이다.

해동역사에서는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해도는 고려 때에 서해도(西海道)였다. 조선 태조 초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太宗朝에 개성 서쪽 지역이 와서 속하여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관찰사영은 해주에 있으며, 목 2개, 도호부 5개, 군 7개, 현 9개를 관할한다.”라고 하고 있는데

개성() 서쪽지역이 와서 속하여 황해도(西海道)로 개칭하였다.라는 말은 기존 서해도가 있었는데 개성 서쪽을 더하여 황해도라고 했으니 서해도보다 더 넓혀졌다는 말이다.

어쨌던 일제는 이 넓지 않는 웅진반도를 황해도로 만들고 그 속에 해주를 넣고 강을 예성강이라 만들어 개성까지 넣어 나름대로 끼어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넣었다고 보이지만 구도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한반도 지명들을 대륙조선의 지명으로 바꾸지 않고 동이문화영역으로서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고대지명 그대로 사용하였더라면 오히려 동이족 정체성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이긴자들이 우리좋도록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어 쓴 웃음만 흘릴 뿐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4권 절장(節仗) 신기대(初神旗隊)편에

神舟旣抵禮成港。下矴訖。麗人。具采舟。來迎使者。奉詔書登岸。三節步從。入碧瀾亭。奉安詔書訖。退休于所舍 

신주(神舟)가 예성항(禮成港)에 도달하고 나서 닻을 내리는 일이 끝나면 고려인이 채색을 베푼 배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사자(使者)가 조서를 받들고 상륙하면 삼절(三節)이 걸어서 따라가 벽란정(碧瀾亭)에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 물러가 묵는 곳에서 쉰다. 라고 했으며 송나라 사신이 탄 신주가 도착하여 벽란도에 내리면 개성까지 40里라고 했으니 벽란도와 개성간 거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옛 고려기록과 한반도 지형은 맞을 수가 없다.

도저히 상식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정말 냉정하게 따져 한반도 예성강이 국제무역항으로 손색이 없는가?하는 물음은 계속되어야 맞다.

물론 지금이야 건설 기술력이 향상되어 불가능이 없다고 하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따져 볼 때 경제적으로 따지더라도 국제무역항의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인다.

15세기 항해시대 때 서양인들이 가치를 느끼던 곳은 바로 인도네시아를 깃점으로 하는 동남아시아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태어 멀고도 먼 한반도 근해 예성강을 찾을 이유가 없다란 말이다.

더군다나 15세기 이전 같으면 더욱 그렇다.

만약 서양상인들이 로마에서 한반도 예성강까지 머나먼 2만리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부득불 와서 교역을 하였다면 고려가 상당한 문화국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그러한 고려가 대륙으로 진출하지 않고 한반도에 쳐박혀 나아갈 줄 몰랐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설정인 것이다.

로마가 2만리 해로를 마다하지 않고 오고갔다면 고려가 중국이었다는 반증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고려가 그처럼 막강한 나라였다면 분명 한반도에 만족하지 않고 영역적으로 충분히 중앙아시아, 유라시아까지 진출하였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한반도만 따진다면 예성강보다 오히려 무역항으로서는 바로 위 해주가 더 적합하다.

또는 아래 강화도나 제물포라고 하는 인천이 국제무역항으로 더 적합하다고 느껴지는 바다.

그런데도 예성강이라 하니 일제가 개성을 먼저 박아두고 예성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명명 한 것이라고 이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꿰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예성강만 그렇겠는가, 한반도 구석구석 지명 모두가 이런처지 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실로 통탄할 일이다.

한반도 예성강 하류가 물살이 세고 수심이 깊어 수많은 배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은 어리석은자들의 고집이고 아집일뿐이다.

구글 위성을 보면 더더욱 고려때 국제항이었다고 생각되질 않는다.

결국 이상으로 살펴보았을 때 한반도에 있는 예성강은 고려의 예성강이 될 수 없으며 한반도 벽란정과 벽란도 역시 고려 때 역사적 장소라고 할 수가 없다.

한반도 개성 또한 고려의 개성이 될 수가 없다.

고려 때 진짜 예성강과 벽란도 그리고 개성은 유라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찾아야 할 지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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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碧瀾渡)

고려시대 예성강(禮成江) 하류의 해상 요충지로서,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 안에 위치하였고 물살이 빨라 위험했으나 수심이 깊었기 때문에 선박의 운행이 자유로워 국제항으로 성장하였다.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碧瀾亭)을 따라 벽란도라고 이름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에는 송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남양(南洋)과 서역 지방의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는데 벽란도는 이러한 국제무역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남양(南洋) 蘭芳大總제

고려 전기 고려와 가장 빈번한 교역을 한 나라는 송이었다. 송에 이르는 길은 국초에서 문종 28년(1074)까지는 산동(山東)의 등주(登州)방면에서 거의 직선 통로를 택하여 대동강어구의 초도(椒島) 옹진구(甕津口) 예성항(禮成港)에 이르는 길이 중심이었으며, 그 이후는 거란의 위협을 느껴, 남쪽으로 바뀌었다. 예성강에서 출항하여 자연도(紫燕島), 마도(馬島), 군산도(群山島)를 거쳐 서남으로 나아가 명주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이 항로는 명주·정해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만에 바다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또 5일이면 흑산도에 도달하여 고려 국경에 들어갈 수 있는 빠른 뱃길이었다.

또한 중국의 사신이 들어오면 벽란정으로 이끌되 우벽란정에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 사신을 대접하여 사신이 도착하거나 떠날 때 반드시 하루씩 묵었다가 갈 수 있게 하였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벽란도의 위치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벽란도는 예성항 상류의 나루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려 말기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항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예성항을 벽란도로 혼동해 불렀다고 한다..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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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24권  

절장(節仗) 

첫째 신기대[初神旗隊]

神舟旣抵禮成港。下矴訖。麗人。具采舟。來迎使者。奉詔書登岸。三節步從。入碧瀾亭。奉安詔書訖。退休于所舍

신주(神舟)가 예성항(禮成港)에 도달하고 나서 닻을 내리는 일이 끝나면 고려인이 채색을 베푼 배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사자(使者)가 조서를 받들고 상륙하면 삼절(三節)이 걸어서 따라가 벽란정(碧瀾亭)에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 물러가 묵는 곳에서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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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27권  

관사(館舍)

벽란정(碧瀾亭)

碧瀾亭。在禮成港岸次。距王城三十里。神舟旣抵岸。兵衛金鼔。迎導詔書。入于亭。亭有二位。西曰右碧瀾亭。以奉詔書。東曰左碧瀾亭。以待使副。兩序有室。以處二節人。往來各一宿而去。直東西有道。通王城之路。左右居民。十數家。蓋使節。旣入城。衆舟皆泊于港中。舟人。分番以守。視於此耳。

벽란정은 예성강(禮成江)의 강언덕에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신주(神舟 조서를 실은 사신의 배)가 강언덕에 닿으면 수위병이 징과 북으로 환영하고 조서를 인도하여 벽란정으로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자리가 있으니 서쪽을 우벽란정(右碧瀾亭)이라 하여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을 좌벽란정(左碧瀾亭)이라 하여 정사와 부사를 접대한다. 양편에 방이 있어 두 절(節)의 인원을 거처케 하는데, 갈 때와 올 때에 각각 하루씩 묵고 간다. 똑바로 동서로 도로가 있는데, 왕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좌우에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절이 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뭇 배들은 다 항내에 정박하므로, 뱃사공이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감시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벽란도(碧瀾渡)부 서쪽 36리에 있다. ○《송사(宋史)》에, “급수문(急水門)에서 또 3일 만에 언덕에 닿으니,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있으며, 여기서부터 육지에 올라 험난한 40여 리를 가면 바로 국도(國都)이다.”라고 한 것이 이곳이다. 정자 이름을 지금 식파정(息波亭)이라 한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송도(松都)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긴 강이 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나루터를 벽란이라 한다. 국도에 가까우므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고, 산에 가깝기 때문에 흐름이 빠르고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조수가 세게 밀려서 건너는 이들이 또한 매우 괴롭게 여긴다. 나라에서 관원을 두어 맡겼는데, 강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에는 초루(草樓)가 있었으니, 나루터 일을 맡은 관원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강은 바다 하늘에 닿아 있고 산은 들판을 가로질러 구불구불하여 아득히 멀어 바라봄에 끝이 없으니, 형세의 뛰어남이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곳이 다투어 건너는 장소가 되고 유람하는 곳이 아니므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분주히 잘 건널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올라가서 경치를 구경할 경황이 없었다. 임오년(1402) 가을에 철성(鐵城) 이공(李公)이 도끼[鉞]를 집고 와서 우도(右道)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하면서 언덕 위에 올라가 마땅한 곳을 잡아서 개암나무와 가시밭을 베어내며 모래와 흙을 평평하게 하고서 새 정자를 짓고 ‘식파(息波)’라 편액하니, 대개 압승(壓勝)하여 건너는 데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순시(巡視)하는 여가에 반드시 와서 휴식하고, 오면 반드시 이틀 밤을 묵고 시를 읊으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공은 천성이 인후(仁厚)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개연히 지조와 절개를 가졌으며, 일찍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늦게 즐거워한다.’는 말을 사모하여 항상 외고 읊어서 스스로 기대하였다. 때문에 그 문무(文武)의 재략(才略)과 중외(中外)의 업적이 뛰어나서 보통 사람과 달라 범공을 뒤쫓아 짝할 만하며, 그 가슴속의 넓은 도량 역시 범공과 더불어 그 크기를 같이 할 만하다. 대개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의 좋은 경치이지만 구경하는 사람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자신들이 느끼기에 달린 것인데, 범공은 근심하고 즐거워한 것이 유독 천하에 관계된 것이었다. 지금 공이 이 정자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 하고, 또 그 근심을 물결을 쉬게[息波]하는 데까지 미루었으니, 이것은 그 마음의 근심과 즐거움이 모두 남에게 미치는 데에 있고 자기 한 몸에 관계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그것이 있는지라 이러므로 같게 한다.’ 하였다. 훗날 묘당(廟堂) 위에서 정승의 반열에 처한다면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효험이 범공으로 하여금 송(宋) 나라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않게 할 것을 또한 미리 알 수 있다.” 하였다. ○ 고려 유숙(柳淑)의 시에, “오랫동안 강호(江湖)의 언약을 저버리고, 홍진(紅塵)에 20년이었네. 백구가 나를 웃는 양, 짐짓 누(樓) 앞으로 가까이 오네.” 하였다. ○ 이숭인의 시에, “산수(山水)는 원래 값이 없는데 물고기와 새우는 풍년을 당했네. 조수가 들어오자 다시 순풍이 부니, 뱃사람들 스스로 앞을 향해 오누나.” 하였다. ○ 성석연(成石珚)의 시에, “세상 사람 몰기를 급히 하니, 낚싯대 잡을 해 기약할 수도 없는 것이, 강호에 한없는 뜻은 가는 비 한 돛대 앞일세.” 하였다. ○ 유백유(柳伯濡)의 시에, “나루 사람들 보내고 맞이하는 일 맡아보며 물결 위에서 또 한 해 지내네. 보일락말락 조각배 작은데, 청산이 거울 앞에 들어오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급수문 앞에 도서(島嶼)가 푸르고, 벽란정 아래에 들 연기 비꼈네. 송 나라 사신들 드나들기 익숙한데, 명주(明州)에 내왕하기 며칠 길이나 되는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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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 제39권  

해도(海道) 6

예성항(禮成港)

十二日癸巳。早雨止。隨潮至禮成港。使副遷入神舟。午刻。使副率都轄提轄官。奉詔書于采舟。麗人。以兵仗,甲馬,旂幟,儀物。共萬計。列於岸次。觀者如堵墻。采舟及岸。都轄,提轄。奉詔書入于采輿。下節。前導。使副後從。上中節。以次隨之。入于碧瀾亭。奉安詔書訖。分位少愒。次日。遵陸入于王城。臣竊惟海道之難。甚矣。以一葉之舟。泛重溟之險。惟恃宗社之福。當使波神。效順以濟。不然則豈人力所能至哉。方其在洋也。以風颿爲適從。若或暴橫。轉至他國。生死瞬息。又惡三種險。曰癡風。曰黑風。曰海動。癡風之作。連日怒號不已。四方莫辨。黑風則飄怒不時。天色晦冥。不分晝夜。海動則徹底沸騰。如烈火煮湯。洋中遇此。鮮有免者。且一浪送舟。輒數十餘里。而以數丈之舟。浮波濤間。不啻豪末之在馬體。故涉海者。不以舟之大小爲急。而以操心履行爲先。若遇危險。則發於至誠。虔祈哀懇。無不感應者。比者使事之行。第二舟。至黃水洋中。三柂倂折。而臣適在其中。與同舟之人。斷髮哀懇。祥光示現。然福州演嶼神。亦前期顯異。故是日。舟雖危。猶能易他柂。旣易。復傾搖如故。又五晝夜。方達明州定海。比至登岸。擧舟臞顇。幾無人色。其憂懼。可料而知也。若以謂海道非難。則還朝復命。不應受重賞。以爲必死。則自祖宗以來。累遣使命。未嘗有飄溺不還者。惟恃國威靈。仗忠信。可以必其無虞耳。今敍此。以爲後來者之勸。比者使人之行。去日以南風。歸日以北風。初發明州。以其年五月二十八日。放洋。得順風。至六月六日。卽達群山島。及回程。以七月十三日甲子。發順天館。十五日丙寅。復登大舟。十六日丁卯。至蛤窟。十七日戊辰。至紫燕島。二十二日癸酉。過小青嶼,和尙島,大青嶼,雙女焦,唐人島,九頭山。是日泊馬島。二十三日甲戌。發馬島。過軋子苫。望洪州山。二十四日乙亥。過橫嶼。入群山門。泊島下。至八月八日戊子。凡十四日。風阻不行。申後。東北風作。乘潮出洋。過苦苫苫。入夜不住。九日己丑。早過竹島。辰巳望見黑山。忽東南風暴。復遇海動。舟側欲傾。人大恐懼。卽鳴鼔招衆舟。復還。十日庚寅。風埶益猛。午刻。復還群山島。至十六日丙申。又六日矣。申後風正。卽發洋。夜泊竹島。又二日風阻不行。至十九日己亥午後。發竹島。夜過月嶼。二十日庚子。早過黑山。次過白山。次過五嶼夾界山。北風大作。低篷以殺其埶。二十一日辛丑。過沙尾。午間。第二舟三副柂折。夜漏下四刻。正柂亦折。而使舟與他舟。皆遇險不一。二十三日壬寅。望見中華秀州山。二十四日癸卯。過東西胥山。二十五日甲辰。入浪港山過潭頭。二十六日乙巳。早過蘇州洋。夜泊栗港。二十七日丙午。過蛟門望招寶山。午刻。到定海縣。自離高麗。到明州界。凡海道。四十二日云。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九

12일(계사) 아침에 비가 멎자 조수를 따라 예성항으로 들어가고, 정사와 부사는 신주(神舟)로 돌아 들어왔다. 오각에 정사와 부사가 도할관과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색배에서 조서(詔書)를 받들고 갔다. 만으로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무기ㆍ갑마(甲馬)ㆍ기치ㆍ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었다. 채색배가 해안에 닿자 도할ㆍ제할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로 들어가고,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며 정사와 부사는 뒤에서 따라가고 상ㆍ중절이 차례로 따라가서 벽란정(碧瀾亭)으로 들어갔다.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는 위차(位次)를 나누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생각하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거니와, 일엽편주로 험난한 바다에 떠 있을 적에, 오직 종묘 사직의 복이 파신(波神)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음을 힘입어 건너온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달해 낼 수 있었겠는가? 큰 바다에 있을 때에 돛단배로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갔으리니,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이다. 또 세 가지 위험을 싫어하니, 치풍(癡風 음력 7ㆍ8월에 부는 동북풍)과 흑풍(黑風 폭풍)과 해동(海動 바다의 지진으로 일어나는 물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외치며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을 가려내지 못한다. 흑풍은 때없이 성내어 불어닥치고 하늘 빛이 어두워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한다. 해동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큰 바다 가운데서 이것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적다. 또, 한 물결이 배를 밀어내는 것이 툭하면 몇 리나 되니, 몇 길의 배로 파도 사이에 떠 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있는 것 정도도 못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행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에 위험을 만나면 지성에서 우러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간구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근자에 사신의 행차에 둘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을 때 내가 마침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은 배의 사람들과 머리를 깎고 슬프게 간구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배가 비록 위태로웠으나 다른 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바꾸고 나서도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주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달하였다. 상륙할 때에 가까워져서는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바닷길이 험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조종(祖宗) 이래로 누차 사절을 파견하였어도 표류, 익사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다. 다만 나라의 위령(威靈)을 믿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는 바이다. 근자에 사절의 행차는, 떠나가는 기간 중에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오는 기간 중에는 북풍을 이용한다. 처음 명주를 출발한 것은 그해 5월 28일이었는데, 큰 바다로 나가서는 순풍을 얻어 6월 6일에 가서 곧 군산도에 도달하였다. 귀로에 오르게 되어서는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順天館)을 떠났고,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蛤窟)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紫燕島)에 이르렀고, 22일(계유)에 소청서(小靑嶼)ㆍ화상도(和尙島)ㆍ대청서(大靑嶼)ㆍ쌍녀초(雙女焦)ㆍ당인도(唐人島)ㆍ구두산(九頭山)을 지났는데, 이날 마도(馬島)에 정박하였다. 23일(갑술)에 마도를 떠나 알자섬(軋子苫)을 지나 홍주산(洪州山)을 바라보았으며, 24일(을해)에 횡서(橫嶼)를 지나 군산문(群山門)을 들어가 군산도아래서 정박하였다. 8월 8일까지 도합 14일 동안 바람이 막혀 가지 못하다가, 신시(申時) 후에 동북풍이 일어나 밀물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가 고섬섬을 지났고 밤으로 접어들어서도 머물지 않았으며, 9일(기축)에는 아침에 죽도(竹島)를 지났다. 진시와 사시에 흑산(黑山)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이 동남풍이 사나워지고 또 해동(海動)을 만나 배가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곧 북을 울려 뭇사람을 불렀더니, 배가 다시 바로 돌아왔다. 10일(경인)에는 풍세가 더욱 맹렬해져 오각(午刻)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16일(병신)까지 또 6일이 지났다. 그날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가라앉자 곧 큰 바다로 떠나 밤에 죽도에 정박하였다. 또 이틀 동안 바람에 막혀 가지 못하다가 19일(기해)에 이르러, 오시 후에 죽도를 떠나 밤에 월서(月嶼)를 지났다. 20일(경자)에는 아침에 흑산(黑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백산(白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오서(五嶼)와 협계산(夾界山)을 지났는데, 북풍이 대단하게 일어나 뜸을 낮춰 그 기세를 줄였다. 21일(신축)에 사미(沙尾)를 지났고 오시 사이에는 둘째 배의 세 개의 보조 키가 부러졌고, 밤의 누각(漏刻)이 4각으로 내려가자 정타(正柂) 역시 부러졌다. 사신의 배와 다른 배들도 다 위험을 당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3일(임인)에 중화(中華)의 수주산(秀州山)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 25일(갑진)에 낭항산(浪港山)으로 들어가 담두(潭頭)를 지났다. 26일(을사)에는 아침에 소주양(蘇州洋)을 지나 밤에 율항(栗港)에 정박하였고 27일(병오)에 교문(蛟門)을 지나 초보산(招寶山)을 바라보았고 오각(午刻)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부터 명주 땅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권  

개성부 상(開城府上)

예성강(禮成江) 부 서쪽 30리에 있다.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조읍포(助邑浦)의 하류가 부의 서쪽에 이르러 이포(梨浦)가 되고, 또 전포(錢浦)가 되며, 또 벽란도(碧瀾渡)가 되고, 또 동쪽으로 예성강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고려에서 송 나라에 조회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禮成)이라 하였다. ○《송사(宋史)》에,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또 5일 만에 묵산(墨山)에 이르러 그 지경으로 들어간다. 묵산에서 섬의 구불구불한 돌 사이를 지나면서 배가 매우 빨리 가서 7일 만에 예성강에 이른다. 강은 두 산 사이에 있고 석협(石峽)으로 묶였으며 물결이 빠르게 내려가는데,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이라는 데가 제일 험악하다.” 하였다. 또《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급수문은 개성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흡사 무협(巫峽) 같다.”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예성강곡이 있다. 과거에 중국 상인 하두강(賀頭綱)이 바둑을 잘 두었는데, 일찍이 강가에서 한 아름다운 부녀자를 보고 내기를 해 빼앗으려고 그 남편과 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지고 나서 내기를 두 배로 걸자 그 남편이 탐내어 아내로 내기를 걸었다. 두강이 단판에 빼앗아 배에 싣고 가니, 그 남편이 뉘우쳐 이 노래를 지었다. 부인이 갈 때에 옷 단속을 매우 단단하게 하니, 두강이 범하지 못하였다. 배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자 빙빙 돌면서 가지 않으니, 점을 치자, ‘절부(節婦)에게 감동되어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두강이 부녀자를 돌려보내니, 부녀자 역시 노래를 지었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강 언덕에 사람은 드물고 백로만 나는데, 날 저무니 고기잡는 늙은이가 고기 잡아 돌아가네. 가벼운 구름 엷고 엷으니 어찌 비가 되랴. 바다 기운 하늘에 올라가 우연히 이슬비 되는 것이.” 하였다. ○ 이곡의 시에, “하해(河海)가 동쪽으로 흐르게 한 우(禹) 임금의 공이 상상되니, 남쪽과 북쪽에서 오가는 배들 멀리 서로 통한다네. 어느 사람, 강에 뿌리는 비에 졸고만 있나. 손의 수심은 종일 부는 바람에 깊어만 지네. 한 조각 배는 아득한 저 바다에 키질하는데, 많은 산들 보일락말락 나고 들고 하누나. 노(魯) 나라의 뗏목 타고 오려던 늙은이(공자)야 감히 바라리. 반계(磻溪)로 가서 낚시질하는 늙은이(강태공)나 찾아볼거나.” 하였다. ○ 고려 정포(鄭誧)의 시에, “바람 고요한 긴 강이 기름을 뿌린 듯 푸른데, 가는 돛 하나하나 조수 머리에 모여 드네. 사공이 불을 놓고 타고(鼉鼓)를 울리니, 동남쪽에서 온 장사 배임을 알겠네.” 하였다. ○ “백발 어옹이 낚싯대 하나 들고, 조각배 위에서 종일토록 바람치는 여울과 싸우고 있네. 그의 마음은 고기가 미끼 먹기만 기다리니, 곁에서 구경하는 간담이 역시 서늘한 줄 어이 알리.” ○ “그림 같은 청산이 배의 창문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 하였다. ○ “열흘동안 가을 장마에 강물이 불었는데, 사라져 가는 구름 다시 비 되어 부슬부슬 뿌리네. 밤이 옴에 누(樓) 아래에 파도 소리 거세더니, 새벽 들자 인가들 사립문 절반이나 물에 잠겼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맑은 휘파람 긴노래가 바로 좋은 놀음인 것이, 세상 마음[機心] 다 버리고 갈매기나 가까이 하리. 질 항아리와 막걸리가 집집마다 있으니, 이로부터 강두(江頭)에 나가 날마다 갖옷을 저당잡히네.” 하였다. ○ “살구꽃 눈같이 흩날리고 버들이 실 같으니, 봄은 강성(江城)에 가득하고 낮은 모자 짧은 신 신으매, 돌아오는 말 위에서 새로 지은 시가 있다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강 언덕 방초(芳草)에 비 적시는데, 강두에 자리 펴고 앉아서 돌아가지 않네. 백발 어옹은 술을 낼 줄 알고, 푸른 도롱이 입고 지나는 손은 시 읊을 줄 아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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