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생애 요약 - binsenteu ban goheu saeng-ae yoyag

고흐는 색채 본래의 가치를 강조하던 화가였습니다. 색채를 점과 선으로 그리는 것을 즐겨했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가 인상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색과 형태를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격렬하고 거친 붓터치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감정과 정신상태가 어땠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예술가들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반 고흐에 있어서 그림은 사진을 찍는 것처럼 사물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직접적인 감정과 예술가 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반 고흐의 특성은 20세기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반 고흐의 연보는 예술가로서 활동한 10여년 간 그기 살았던 지역으로, 보통 다음과 같이 5개의 시기로 구분합니다.

네덜란드 (1881-1885)

램브란트와 같은 네덜란드 거장들의 영향을 받아 이 당시 반 고흐의 그림은 명암법을 바탕으로 한 어두운 색과 밝은 색채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등, 가난한 민중의 삶을 회색, 검정색, 짙은 황갈색과 청록색 등 암울한 색깔로써 표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유명한 그림은 1885년 작 감자먹는 사람들입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하였습니다.

파리 (1886-1888)

파리의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 덕분에 인상주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빛의 발견은 반 고흐의 색채세계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네덜란드 시기의 어두움에 비해 좀 더 밝은 색채 사용하고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우키요에 와의 만남입니다. 정확한 윤곽선에 의한 형태의 명확함과 평평한 색채의 대조에 의한 장식적 예술 감각,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 등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아를 (1888-1889)

아를에서 머무는 15개월 동안 무려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가 고흐에 대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화법들의 작품이 이 당시에 탄생한 것들입니다. 순수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고흐에 있어서 그림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징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생레미 (1889-1890)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슬픔이 그를 사로잡았지만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램브란트와 밀레와 같은 예술가들의 그림의 복사본을 포함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에 갇혀있어야 했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여름 아를에서 사용한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의 정신 건강은 계속해서 변해갔지만, 생레미에서의 1년 동안 약 150편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오베르 (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의 70일간의 짧은 기간동안 무려 80여점의 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오베르의 농가와 들판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평화와 조용함 덕분에 안정감 있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또다시 격렬한 신경 증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의 아픈 마음을 보여주는 듯한 불안한 붓터치, 강렬한 색채 등이 오베르 시기의 그림에 보여집니다. 생레미 시기에서 보이지 않았던 아를에서의 대담한 원색 대비가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다원 팔레트는 명작을 남긴 반센트 반 고흐의 생애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해요. 다들 고흐 작품 좋아하시죠? 고흐의 작품은 렘브란트 이후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라고 인정받고 있는데요. 현대 미술사의 표현주의 흐름에서도 강한 영향을 끼친 화가입니다. 고흐 하면 강한 붓터치가 생각나실 텐데요. 이러한 강한 색채, 붓터치, 뚜렷한 윤곽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되었다고 해요. 그렇다면 과연 고흐의 생애가 궁금해지는데요. 함께 알아보아요! 

빈센트-반-고흐-생애

목차

고흐의 소년기에서 청년기

고흐의 네덜란드에서 파리 시기

고흐의 아를르에서 생레미 시기

마무리

고흐의 소년기에서 청년기

빈센트-반-고흐-자화상

고흐는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의 개신교 목사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어요. 고흐 집안은 대대로 목회자 집안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캔빈 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는 왕실 제본사의 딸로 그림과 글 솜씨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고흐의 예술성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지 모르겠네요. 

고흐는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설교사로 지냈던 적이 있었고 1877년에는 책방 점원으로도 일한 적이 있어요. 고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신학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고흐는 정통교리의 접근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교회 당국과 충돌을 일으켰는데요.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 전도사로 임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고흐는 벨기에에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어요. 

여기서 고흐는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맞이 하게 되어 후대에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의 길을 가게 되는데요. 바로 1879년~1880년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사역을 하던 고흐는 자신의 전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재산을 나눈 것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 활동을 못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고흐의 마음을 어느 곳 하나 받아 주는 곳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흐는 믿음도 잃고 전재산도 잃게 되었지요. 이러한 절망 속에서 고흐는 사람들을 기피하기 시작했고 예술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흐는 예술이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창조력을 발견한 천직임을 알게 되면서 예술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게 되지요. 

고흐의 네덜란드에서 파리시기

빈센트-반-고흐-감자-먹는-사람들-탕기-염감의-초상

고흐는 1880~1890년, 이렇게 10년의 기간이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데생과 수채화로 기법을 익히며 전념했고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습니다. 이 시기에 고흐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주로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어요. 예를 들면  <감자 먹는 사람들> <베 짜는 사람들> 등이 있는데요. 아마 제목만 들어도 어떤 작품인지 떠오르실 거예요.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하고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었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 레트와 폴 고갱 등의 화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흐는 이들을 통해서 한 발짝 작품에 눈을 뜨게 되어요. 

파리로 온 고흐에게 동생 테오는 많은 작품들과 화가들을 고흐에게 소개해주었다고 해요. 제가 추천드리는 '빈센트 반 고희 영혼의 편지'를 꼭 읽어보세요. 그 책에서 고흐의 예술적 고뇌와 동생 테오에 대한 마음을 느끼 실 수 있을 거예요. 파리에서 고흐는 개성적인 화풍과 붓터치를 창조해냈는데요. 몽마르트르를 그린 초기 작품에서 고흐의 다채로운 색감은 전통적인 회화에서 많이 벗어난 고흐만의 색감을 보게 됩니다. 1888년 초 <탕기 영감의 초상> <이젤 앞에 선 자화상> 등 명작이 탄생된 시기가 바로 고흐가 파리에 있었던 시기의 작품이에요. 

고흐의 아를르에서 생레미 시기
별이-빛나는-밤-우편배달부-룰랭-빈센트-반-고흐

고흐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체의 효과를 통하여 고흐의 작품이 확장됩니다. 고흐는 아를르에서 주로 꽃이 핀 과일나무,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 마을과 그 주변 풍경,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렸는데요. 이렇게 멋진 작품을 남겼지만 고흐는 그 당시 계속 심해지는 예술적 갈망이 깊어져 혼자만의 작업은 발전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죠. 그래서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 했습니다.  고흐는 2달 동안 고갱과 함께 일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요. 하지만 둘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고흐는 신경 발작을 일어 키면서 귀의 일부를 잘랐죠. 너무 유명한 일화예요.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등 이러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되었어요. 

고흐는 그 후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까지 합니다. 이 시기에도 많은 명작을 남겼지요. <올리브 나무> <정신병원의 정원> 등등 기분이 오락가락하면서 계속 작품 활동을 했어요. 그렇지만 끝내 고흐는 스스로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아이러니하게 고흐의 동생 테오는 6개월 후에 만성 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흐는 살아생전 고독과 외로움으로 싸워가며 동생 테오에게 금전적으로 의존하면서 무명의 화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는 20세기 초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현재 까지도 아니면 미래에도 고흐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져 갈 것입니다.

마무리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라는 말을 남긴 고흐의 생애는 항상 고통 속에 있었던 치열한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분열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 연구자들도 있는데요. 후대에 인정받은 화가로 그 당시에 처절하게 살았던 고흐의 삶을 오히려 알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고흐의 생애를 통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글이 도움 되셨기를 바랍니다. 사랑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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