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특수효과 - 2001 seupeiseu odisei teugsuhyogwa

사상 최고의 악평 홍수 속에 걸작으로 올라서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제작에서 평가까지

2001.01.27 / 김미영 기자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두고 "스탠리 큐브릭은 최고의 공상과학영화를

만들었다. 앞으로 누구도 이 영화보다 뛰어나거나

근접한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살아 있었다면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미래상 예측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속물적 갑론을박보다

자신의 영화가 여전히 누리고 있는

고전의 위치에 만족해할 것이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개봉했던

68년 당시에는 상상치 못했던 비난이

이 영화에 쏟아졌다.

큐브릭에게 유난히 적대적이었던 저명한 평론가

앤드류 새리스는 "큐브릭은 일관된 논리로

스크린에 이야기를 펼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확인시켰다"고

포문을 열었다. '뉴욕 타임스'는

"너무 지루해 최면제 같은 영화"라고

독설을 퍼부었고, 평론가 스탠리 카우프만은

"큐브릭은 지난 5년 동안 그의 재능을 무시하고

독창성에만 초점을 맞춰 엄청난 실망만

가져왔다"고 냉소했다. 심지어 "사상 최대 규모의

아마추어 영화"라는 어이없는 평가까지 나왔다.

1968년 4월 첫 시사회 이후 큐브릭은

19분 가량을 들어내고 영화를 개봉했으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본 관객은

대사가 거의 없는 미약한 이야기 구조와

혼란을 안겨주는 결말에 당혹스러워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히피 관객들이 차츰

극장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들 사이에서

마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환상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영화로 소문이 나자

관객층이 점점 넓어졌다. 큐브릭은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초기의 비평은 모욕적이었다.

항상 그런 비평은 관객의 호평과 함께

바뀌곤 했다. 내 영화가 메시지는 강하지만

해답은 쉽게 내지 않다는 비난도 있는데

내게 쉬운 해답은 없다"고 회고했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그랬다.

이 영화는 젊은층의 호응을 업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2,15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젊은 평론가들은

열광적인 리뷰로 이 영화를 헐뜯은 사람들에게

다시 영화를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심지어 몇몇 평론가는 이전에 발표했던

자신의 리뷰를 번복했다.

"처음에 이 영화는 지루함 자체라고 생각했으며

잘근잘근 씹는 글을 썼다"는

공상과학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할랜 엘리슨은 "1년 후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봤다. 큐브릭의 편집이 느껴졌고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그 전에 쓴 글이

부끄러워졌다"고 고백했다.

야심적인 형이상학적 우주 서사시의 모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제작에

착수할 무렵의 큐브릭은 <로리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성공으로

경력의 꼭지점에 이미 올라서 있었고 야심적인

형이상학적 서사시인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전통적인 시각적 형식과 구성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각본에서 이미

그런 조짐이 보였다. 아서 클라크의

원작소설 자체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A. C. 클라크의 단편소설 '센티널 (The Sentinal)'

큐브릭과 클라크는 64년에 만나 "전설이 될 만한

근사한 공상과학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야심을 나눴다. A. C. 클라크의 단편소설

'센티널'(The Sentinal)을 토대로

스탠리 큐브릭과 클라크는 1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추려진 이야기는 유인원들이 살던

과거의 지구에서 시작한다.

모노리스.

'할 9000'

검은 석판 모노리스가 나타나고

유인원들의 싸움이 벌어진다.

시간이 흘러 2001년, 달에서 모노리스가

발굴된다. 다시 18개월 후 목성으로 가는

디스커버리호가 위험에 직면한다.

우주선의 운행을 제어하는 컴퓨터

'할 9000'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승무원들이 모두 죽고 겨우 살아남은 승무원

보우만은 '할 9000'을 제거한다.

목성에 도착한 보우만은 모노리스를 발견하고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져 늙어버린 자신을 두고

스타 차일드로 다시 태어난다.

1965년 2월 3일 MGM의 로버트 H. 오브라이언

회장이 <별들 너머의 여정>(Journey Beyond

the Stars)을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큐브릭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했다.

1965년 영국에서 촬영을 시작할 당시의 예산은

6백만 달러였지만 3년 동안 MGM 보어햄우드

스튜디오의 9개 스테이지를 모두 사용하고

205개의 특수효과 화면을 만들면서

제작비는 1,050만 달러로 뛰었다.

1966년 5월 촬영을 마쳤지만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스탭들은 다시

1년 반 동안 특수효과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주인공 보우만 역을 맡았던 카일 듈레아는

"큐브릭 감독의 팔이 14개였다면 그는 촬영부터

분장까지 모든 걸 직접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고집불통에다 지독한 집념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했다.

큐브릭 감독은 과학적 검증을 위해 클라크가

추천한 나사(NASA) 출신 전문가

프레데릭 오드웨이와 해리 레인지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했고 직접 특수효과 팀을

지휘하는 한편 실제 촬영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비디오카메라 리허설이라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큐브릭은 또 카메라를 고정장치에서 떼어내

들고 찍게 했는데, 요즘처럼 스테디캠이 없는

상황에서 육중한 파나비전 카메라를 들고

찍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큐브릭밖에 없었다.

이런 노력을 들여 촬영한 달 기지 장면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미니어처와 매트 페인팅을 이용해 표현한

우주세계는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한 충격을 줬다.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받지 않고 이뤄낸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특수효과는

초기 디자인 과정부터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스탭들을 이끌어간 스탠리 큐브릭의

완벽주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050만 달러의 제작비 반이 넘는

650만 달러가 특수효과에만 쓰였을 만큼

큐브릭은 특수효과가 들어가는 하나하나의

장면을 빈틈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우주의 다른 시간대를 통과하는 쾌감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노리스라는 돌의 존재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큐브릭과 클라크의 각본은 애매모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었지만 큐브릭의 야심은

다른 데 있었다. 뚜렷한 줄거리가 없고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순수한 시각적 체험을

전하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반부에는 인간의 시지각으로는 경험하지도

추측하지도 못할, 우주의 영겁의 시간을 경험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한 우주비행사가 우주의

다른 시간대를 통과하는 순간 스크린은

전대미문의 이러한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현란한 속도감과 색감으로 뒤범벅돼 뭐가 뭔지

모를 혼란과 황홀경을 안겨준다.

또한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감독이나 엔지니어,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거나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두고

"스탠리 큐브릭은 최고의 공상과학영화를

만들었다. 앞으로 누구도 이 영화보다 뛰어나거나

근접한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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